108.
쌍둥이 남매 요나스와 록시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한때 북부의 노턴 하면 대부분 붉은 기가 도는 신비로운 금발을 가진 요정 같은 쌍둥이 남매부터 떠올릴 정도였다.
숲의 요정으로 불리던 노턴의 아가씨가 드디어 약혼을 할 나이가 되었을 때, 혼기 찬 제국 남자란 남자들은 죄다 그녀에게 구혼장을 보냈다.
그러나 명랑하고 아름다운 노턴의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노턴에서 제일가는 인기인이었고, 그녀의 혼사는 노턴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극성과 까탈을 부리며 약혼자를 물색하는 데만 2년을 넘게 시간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난 끝에 록시와 결혼한 자는 ‘서부의 양아치’라 불리던 아이노 맥포이 경이었다.
‘록시의 남편 찾기’를 주도한 것이 그녀의 쌍둥이 오빠 요나스였다는 점에서 더욱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지금도 종종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물론 록시의 남편 자리에 아이노가 낙점된 것은 결코 요나스의 뜻이 아니었다.
요나스는 록시에게 어떤 놈을 들이대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니 날카로운 인상 그대로 불같은 성격에, 숨 쉬듯이 우쭐대는 아이노 자식은 진작 록시의 약혼자 후보에서 탈락이었다.
그러나 서북부의 기사 합동 훈련을 위해 아이노 맥포이가 노턴에 방문하면서 록시의 혼사는 요나스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잠깐으로 아이노와 록시가 우연히 눈이 맞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요나스는 북부와 서부 중 어디에서 합동 훈련을 할지 논쟁이 벌어졌을 때 절대 북부에서 하자고 자존심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노와 록시는 그렇게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났다.
무엇보다 결혼은 요나스가 아니라 록시가 하는 것이었으니, 그녀가 아이노를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요나스에겐 더 이상 발언권이 없었다. 불행히도 요나스는 평소 록시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맥포이는 경사가, 노턴은 초상이 난 듯했다. 당시 요나스의 눈에 맥포이는 전부 야만인, 아이노는 특별히 도둑놈이었다.
물론 이런 사정과 별개로 록시를 빼다 박은 조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겼던 록시가 결혼한 지 2년도 안 되어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은 탓에 그 시신조차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다. 피눈물이 나는 일이었다.
그 애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 바로 아치였다. 요나스가 아치를 각별하게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물리적 거리 탓에 정서적 거리도 함께 멀어져 아치에겐 먼 친척 취급을 받고 있었으나, 요나스가 아치를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아이사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 역시 조카라면 간이고 쓸개고 빼 줄 수 있는 훌륭한 외삼촌이었다.
‘맥포이 가주가 서신으로 말한 것처럼, 클수록 록시와 똑같구나.’
요나스는 옆에 앉은 아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3년 만이던가. 아이들의 성장은 대단했고 아치는 그새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아치는 록시를 닮아 붉은 기가 감도는 금발을 가졌다. 여기에 클수록 아이노의 흔적이 사라지고 록시의 유전자가 승기를 잡았으니, 요나스는 오랜만에 조카를 마주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었다.
아치가 록시를 닮았다는 것은 결국 외삼촌인 요나스를 닮은 것과 같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요나스와 아치는 부자 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리저리 섞여 쏘다니던 연회 손님들은 똑 닮은 두 사람이 앉은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하나같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신기하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요나스는 뿌듯했지만 아치는 죽을 맛이었다.
‘아, 고모랑 고모부는 도대체 뭘 하는데 이렇게 안 오는 거지? 또 아침마다 한다는 부부의 의무인가?’
기계적으로 예를 갖춘 아치는 어른들의 인사치레가 오가는 동안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어른들만 북적이는 고모의 탄신 연회는 여느 때처럼 재미가 없었다. 설상가상 옆에선 추억에 젖은 외삼촌이 연신 아련한 눈빛을 보내왔다.
짧은 인생에서 3년은 제법 먼 옛날이었다. 얼굴은 닮았으니 익숙하다고 쳐도,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한 외삼촌이 5일 내내 제게 착 붙어 있으니 아치는 난감할 뿐이었다.
‘덕분에 고모부랑 폰이랑 놀지도 못하고.’
질척이는 외삼촌의 시선을 피해 애꿎은 시모어 부인을 부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여간 어른들은 날 너무 예뻐한다니까.’
인기 많은 어린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빨리 해가 지고 작년에 담근 멧 통을 열 때가 돼서 고모가 어린이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들었다.
“맥포이 가주님, 맥포이 가주 부군께서 드십니다!”
아치의 인내심이 마침내 한계에 다다를 때쯤, 드디어 맥포이 가주 부부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이 들렸다. 외삼촌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애먼 땅을 보고 있던 아치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치는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들 틈바구니에 끼어 목을 쭉 빼고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장벽 같은 어른들의 어깨 사이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이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와.’
아치는 평소 제 고모가 괴팍하고 유치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아이사와 말다툼을 하다 보면 어떻게 저렇게 치사한 사람이 맥포이 가주고 롬닥 상단주지?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예장을 갖추고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면 아이사는 누가 봐도 대귀족이었으며 ‘맥포이 가주’였다.
물론 전체적으로 사람이 자그마하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조그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강렬했다. 그녀는 절로 눈을 내리깔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남다른 기운을 뽐내는 아이사를 보자 아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같은 맥포이라는 것에 새삼 벅참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그러다 문득, 아치는 오늘따라 아이사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언제나 혼자 입장하던 아이사 옆에 없던 것이 생겼다. 후광을 달고 다니는 노마였다.
‘고모부가 옆에 있으니까 평소보다 더 작아 보이긴 한다. 고모는 알까? 고모한테 말하면 진짜 싫어하겠지? 일단 나만 알고 있어야겠다.’
아치가 배려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회장에 모인 손님들은 어린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오는 가주 부부를 멀리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보니 맥포이 가주가……. 새삼 체구가 작긴 하군.’
손님들의 직관적인 감상들은 하나같이 아이사가 알면 펄쩍 뛸 것들이었다.
이내 가주 부부가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연회의 손님들은 두 눈을 번뜩였다. 결혼 전부터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던 부부 사이에 혹시나 ‘재미난 일’이 없나 하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일단 맥포이 가주는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한여름에 어깨만 겨우 노출한 재미없는 차림새나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하는 것, 알량한 인사치레엔 자비 없이 왼 눈썹을 까딱이는 것까지. 결혼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맥포이 가주를 둘러싼 공기는 결혼 전과 달랐다. 그녀 옆엔 이제 그녀의 냉기를 상쇄하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넘어 연회장 전체를 밝히는 화사한 남자의 존재 덕분일까. 손님들은 어쩐지 오늘은 맥포이 가주의 눈을 마주 봐도 될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상에. 디아시, 아니 이젠 맥포이 경인가? 그가 맥포이 가주를 보는 눈빛을 좀 보라지. 일단 두 사람이 연애결혼이라는 말이 아주 헛소문은 아닌가 봐.’
가까이서 맥포이 가주 부부를 본 손님들은 곧 비슷한 결론을 냈다.
‘괴팍한 서부의 마녀와 아름다운 성기사가 정말 사랑에 빠진 게 맞나 봐!’
두 사람을 둘러싼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그건 맥포이 가주와 꽤나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요나스 노턴이 보기에도 비슷했다.
요나스는 사육제 기간에 영지에 문제가 생겨 부득이하게 맥포이 가주의 성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아이사가 보낸 서신대로 두 사람이 그저 평범한 정략혼을 했다고만 알고 넘겼다. 중앙에서 들려오는 낭만적인 소문이야 당연히 아이사가 퍼뜨린 거짓 소문이라 믿고 있었단 말이다.
‘정략혼이라더니 이게 무슨……. 그날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나 보구나.’
요나스는 점점 다가오는 맥포이 가주 부부를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며칠 전 맥포이 가주 부부가 도개교까지 마중 나왔을 때, 요나스는 정체 모를 불쾌감과 압박감을 느꼈었다.
긴 마차 여행 탓에 심신이 허약해져 그런 줄 알았건만. 눈부시게 밝은 연회장에서 요나스는 드디어 알 수 없는 감각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먼저 불쾌감의 정체는 놀랍게도 아이사였다. 요나스는 아이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온갖 무게를 잡으면서 언뜻 무심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미묘하게 들떠 우쭐해 보이는 저 얼굴은.’
“……아이노.”
요나스는 십수 년 전 록시를 채 간 도둑놈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 지금 아이사의 표정은, 아이노 놈이 록시와 있을 때 짓는 것과 똑같았다.
요나스가 아이노를 싫어했던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록시를 보면 좋아 죽으면서 기를 쓰고 표정 관리를 한단 것이었다. 그의 눈엔 아이노가 록시 앞에서 담담한 척하는 것이 그저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반대로 록시에게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 못 차리는 꼴을 낱낱이 보였다면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나빴으리란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당시 요나스는 아이노가 숨만 쉬어도 싫었기 때문이다.
‘저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이노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다.’
요나스는 아이노와 아이사가 닮은 것은 알았지만 이런 부분까지 닮았을 줄은 몰랐다.
물론 오래전 고인이 된 아이노에겐 오히려 오만 정이 다 들었다면 들었지, 더 이상 어떤 유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 저 얼굴에 유감이 있는 건 별개였다.
“노턴 가주.”
그때 아이사와 노마가 다섯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두고 얼빠진 요나스 앞에 멈춰 섰다. 아이사가 요나스를 부르며 그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그는 장갑을 낀 아이사의 손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정을 꾸며 낸 그가 아이사의 손을 가볍게 받치고 허리를 숙여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입술이 닿은 순간, 요나스는 어마 무시한 시선이 머리통에 꽂히는 것을 느꼈다. 각오한 바였지만 맹수에게 급소가 노려지는 듯한 위압감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압박감 역시 착각이 아니었군.’
요나스가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입꼬리만 화사하게 올린 채 눈은 절대 웃고 있지 않은 노마가 보였다.
‘그래서, 저 아름다운 남자는 도대체 왜 나를 경계하는 것인가?’
압박감의 정체는 아이사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노마였다. 요나스는 그의 형형한 눈을 버티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도개교에서 맥포이 가주 부부를 마주했을 때 느낀 쎄한 시선은 요나스의 착각이 아니었다. 천사의 얼굴을 한 남자는 이따금 요나스를 더없이 싸늘한 눈으로 바라봤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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