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07화 (107/139)

107.

“아이사.”

어떻게 하면 저걸 자빠뜨릴 수 있는지 각도를 재는데 그가 대뜸 나를 불렀다.

엄한 상상을 하던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침을 꿀꺽 삼키자 노마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가 양팔로 내 허리를 안더니 파고들 것처럼 안겨 왔다.

대담한 상상을 하고 있는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급소가 눌린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남의 배에 얼굴을 묻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사. 좋은 향기가 납니다.”

“……그럼. 얼마나 오래 씻었는데.”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는 지점은 언제나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뛰는데. 괜찮습니까?”

“남 말 하네…….”

그러는 자기도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주제에. 아닌 척 시치미를 떼는 그가 괘씸해 퉁명하게 받아쳤다.

“하하, 그렇네요.”

맥없는 노마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나와 그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딘가 참기 어려운 기분이 들쯤, 그가 정적을 깼다.

“―당신 옷을.”

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내 등허리 부근을 간지럽히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새 한층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지금 여길 뜯어 버리면 손님들은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겠죠. 저는, 참을 수 있습니다.”

분위기에 한껏 심취해 있던 나는 순간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이래 놓고 그만두자는 건가?’

실은 머릿속으론 이미 몇 번이고 내 손으로 이 망할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나는, 손님이고 뭐고 이 답답한 옷을 당장에 벗고 당신과 뒹굴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어느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연회 주인의 의무를 논하다니. 말문이 막혔다.

“…….”

내가 대답이 없자 복부에 철썩 달라붙어 있던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틀어 시선을 맞춰 왔다.

‘아―.’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음험하게 빛나는 금안을 마주 봤다.

‘멈출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내숭을 떤 것이구나.’

나는 눈치가 나쁘지 않았고, 노마는 알기 어렵게 표정을 꾸며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접촉에 있어 나는 그보다 부끄러움을 더 많이 탔고, 그가 평소에 그런 나를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내가 겁을 먹고 한 발짝 물러서면 그는 한 발짝을 넘어 두 발짝 다가와 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어렵지 않게 노마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의 그는 평소와 다르게 얄궂은 구석이 있었다.

‘이번엔 내가 움직여 보라는 것이겠지.’

나는 감히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요망한 남자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술을 뗐다.

“……아니.”

뒷걸음을 열심히 쳤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신기하게도 그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니 오히려 묘하게 신이 났다.

“우리는 맥포이인데. 그들이 기다려야지.”

머리 땋아 주기는 무슨, 처음부터 이런 걸 노리고 들어온 속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그에게 노림수가 있더라도 달갑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 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눈을 감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노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단숨에 턱 아래까지 치고 올라온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통을 쥐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고 그의 입술이 작게 벌어진 내 입술을 덮쳐 왔다.

어느 순간 번쩍 몸이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입술과 혀, 여린 입 안 살을 핥아 올리고 약하게 빨아들이는 모든 행위가 그저 좋았다.

‘아. 탄신 연회고 손님이고―.’

나는 그저 계속 그와 이렇게 입을 맞추고, 살갗을 맞대고나 싶었다.

노마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눈을 감고 입맞춤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사를 응시했다. 당장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빛이었으나 동시에 퍽 애틋했다.

그녀는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것처럼 서툴렀으나 확실하게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에 빠져 열이 나길 잘했지.’

아이사가 알면 굉장히 화를 내겠지만, 노마는 그날 연못에 빠지길 아주 잘했다고 생각했다. 열이 난 것을 그녀에게 들켜서 진심으로 잘됐다고 여겼다.

노마는 아이사가 자신을 ‘정신이 온전치 못해 제 마음을 착각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슬펐다. 그녀가 제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더는 괜찮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열이 올랐던 밤, 몽롱한 머리로 제 현실을 돌아보니 노마는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노마가 눈물을 흘리며 아이사에게 서러움을 토로한 것은 딱히 어떤 노림수가 있던 행동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그런 와중에도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울기 위해 노력하긴 했다.

노력에 대한 보답일까. 놀랍게도 그날 이후 아이사는 노마의 마음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변화에 노마는 처음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아이사는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티를 격하게 냈다. 그녀는 누가 봐도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원래도 아이사는 노마 앞에서 썩 자연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녀는 급기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숨을 참기 시작했다.

단, 아이사는 기절할 것처럼 어색하게 구는 와중에도 절대로 노마를 피하지는 않았다.

노마는 사정없이 삐걱대면서도 전보다 더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사의 모습에 과연 언제나 당당한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실은 노마는 아이사에게 환청과 환각에 시달린 끝에 열이 난 것을 들켰을 때, 그녀가 제 마음을 더욱더 착각이라 여기시겠구나 했다.

그러니 아이사의 변화는 노마에게 있어 뒷걸음을 치다 얼결에 노다지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왠지 그날 밤의 대화 말고도 그녀의 심경에 영향을 미친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일단 이 기회를 잡고 봤다.

그런 생각 끝에 노마가 아이사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를 안고 가까운 카우치로 향하는 사이에도 서로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노마는 형형한 눈으로 내내 아이사를 잡아먹을 듯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번 입맞춤이 시작되면 눈을 뜰 생각을 못 했다. 단순히 입을 맞출 땐 으레 눈을 감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러시면서 나를 순진하다고 여기시니.’

노마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아이사를 카우치에 내려놨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떨어지면서 그녀가 눈을 떴다.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린 노마가 아이사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타고 올랐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검은 속눈썹, 여전히 제 목에 감긴 팔이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진심으로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정말 머리만 땋아 드리고 중간중간 입맞춤 몇 번 하는 것으로 사심을 채우려 했다.

노마는 제 몸 아래에 있는 그녀를 빤히 보며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아마도 머리칼을 반으로 나누었을 때 드러난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 때문일 것이다.

몇 시간 전에도 한참 입을 맞췄던 곳이었으나, 훤한 방 안에서 그녀의 살갗이 드러난 것을 보고 있자니 충동적으로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변명을 해 보자면 노마 디아시는 아이사 맥포이라는 존재가 주는 모든 자극에 몹시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사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실은 노마는 그녀가 눈길 한번 주는 것으로 충분히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남자였다. 노마는 스스로도 변태로 오해받기 딱 좋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변태가 맞나.’

그는 아이사가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주는 자극에 무척이나 약했다.

그러니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아이사의 반응을 기대하고 그녀의 목에 손을 댄 것인지도 몰랐다. 작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고 이어서 신음 소리를 들은 순간, 혈기가 날뛰었다. 더 이상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욕심 많은 남자는 그녀를 한번 떠봤다. 그녀가 제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받고 싶었다.

“이리 와 봐요.”

그녀는 기꺼이 한 걸음 다가와 주었다.

노마는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잃은 그녀가 잃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안다.

또다시 소중한 것들을 잃을까 봐 더 이상 그런 존재를 만들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조금도 애정을 주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저 한 마디로도 그녀는 충분히 용감했다. 느리게나마 확실하게 제게 다가와 주고 있는 그녀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노마는 용기를 낸 아이사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며 그새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매 순간 심장이 콩콩 뛰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아무리 저라도 여기서 끝까지 하진 않습니다.”

시뻘건 얼굴을 한 노마가 최대한 달큰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닥였다.

그러나 그의 배려는 쓸데없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뭐가 되었든 적당히 하려던 노마는 멈칫했다.

마찬가지로 얼굴에 잔뜩 열이 몰린 아이사가 매우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널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본 것이다.

‘일 났군.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겠는데.’

아이사는 온갖 부끄러움을 타면서도 막상 일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덕분에 노마의 얼굴은 한층 붉게 타올랐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킨 끝에 발언을 수정했다.

“……드레스를. 최대한 망치지 않게 해 보겠습니다, 아이사.”

다음 순간 노마의 커다란 손이 아이사의 붉은 드레스 자락을 들쳤고, 그 안을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 * *

노턴의 가주, 요나스 노턴이 몇 번째 과실주를 홀짝였다.

‘다 마셨군.’

요나스가 빈 잔을 빙글 돌린 끝에 테이블 내려놓았다. 흘끗 계단 위에 있는 연회장 입구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탄신 연회의 주인공은 벌써 한 시간 넘게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맥포이 가주가 손님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또 처음 있는 일인데. 무슨 일이 생겼나?’

맥포이 가주는 귀족들이 모이는 회의엔 일부러 지각을 하곤 했지만 자신이 연회의 주인공일 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은 딱히 요나스만 아는 것도 아니라, 맥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며 아까부터 좌중이 술렁거렸다.

곧 맥포이 가주의 수석 보좌관이 나타났다. 그녀는 맥포이 가주가 상단에 급한 용무가 생겨 늦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수선함 속에서 맥포이 가주 없는 맥포이 가주 탄신 연회가 시작되었다.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연회의 분위기에 취한 손님들은 다행히 맥포이 가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을 빠르게 접었다.

그 한구석에 자리 잡은 요나스는 손님들과 어울리지 않고 오늘도 조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요나스가 맥포이에 온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오랜만에 보는 조카와 보냈다. 물론 그의 조카 아치는 오랜만에 보는 외삼촌을 퍽 어색하게 여겨 자꾸만 유모를 찾았지만.

조카와의 유대감이 그새 희미해지다 못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것에, 요나스는 다시 한번 물리적 거리를 저주했다.

노턴은 북부 중에서도 동쪽에 치우쳐져 있었다. 때문에 서부의 한가운데에 있는 맥포이에 쉽게 오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대귀족 가문의 가주이면서 가정이 있는 몸이었으니 11년 전,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쌍둥이 여동생 록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곧장 맥포이에 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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