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06화 (106/139)

106.

결혼 후 그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머리 땋아 주기’로 날 놀라게 할 셈인 모양이었다.

굴곡진 삶을 살아오면서 꽤 여러 사건을 겪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지금껏 내 인생에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딱히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 인생은 사랑도 행복도 없는 3대 비극 중 하나였단 말이다.

그런데 생일에 남편이 머리를 땋아 줘?

매일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허를 찔러 오니 이쪽은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놀라셨습니까?”

“조찬 때 보자더니.”

오늘 새벽 내가 눈도 못 뜨고 하녀들의 손에 끌려갈 때 노마는 분명 ‘조찬 때 봅시다’ 하고 날 배웅했다.

“시모어 부인에게 열심히 배웠습니다.”

날 놀라게 하는 데 성공한 노마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힐끗 시모어 부인을 돌아보니 그녀는 모르쇠를 잡으며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나는 이날 확실히 깨달았다. 편 나누기를 할 일은 아니지만, 맥포이 성 사람들은 죄다 노마의 편이라는 사실을.

시모어 부인과 방 안의 하녀들이 모여 노마와 어떤 작당을 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최근엔 늘 이런 식이기도 했다.

“지난번에 시모어 부인에게 배울 것이 있다더니 머리 땋기였습니까?”

“네. 당신은 언제나 머리를 땋아 올리고 다니시니까. 항상 직접 손질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나. 지난번에 급하게 사라졌던 게 정말 머리 땋는 법을 배우러 가기 위함이었다니. 그는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평소 내 머리칼에 관심이 많긴 했다. 어느 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을 때였나,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숱이 많고 구불거리는 게 신기하다고 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직접 머리를 땋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당신 생일엔 시모어 부인이 머리를 땋아 준다고 들었습니다. 땋는 법은 부인이 잘 알려 주었습니다.”

습관이 되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그의 입으로 들으니, 스물여섯 살이나 먹고 생일에는 어릴 적 유모가 머리를 땋아 준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그가 상체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갑작스럽게 거리를 좁혀 오는 바람에 순간 그가 이대로 입을 맞추는 줄 알고 질끈 눈을 감았다.

“당신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특히 몸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 배움이 빠르니―.”

그러나 그는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이기만 했다.

나는 그제야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곤 부자연스럽게 눈동자를 굴려 부러 야릇한 말을 골라 하는 그를 경계하듯 응시했다. 일련의 동작이 몹시 어색했을 것이다.

그의 어깨 너머로 사용인들이 재빠르게 다른 곳을 보는 척,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나만큼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걱정 마세요. 예쁘게 땋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살살 눈웃음을 치는데 사람을 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는 촌스럽게 볼이 붉어지는 것만 빼면 매사 굉장히 여유롭고 능숙해 보였다. 나와 다르게.

그 사실을 깨닫자 위기감이 들었다. 그에게 질세라 눈이라도 부릅떠 봤다. 그러자 노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훅 상체를 세우며 멀어졌다.

어쩐지 한 번 봐준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덕분에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앉아 주시겠습니까.”

노마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하자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내 앞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들이밀었다. 다시 한번, 그녀들은 노마의 편이 확실했다.

나는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는 중에도 거울에 비친 그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역시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등 돌렸던 것을 사과한 후엔 절대 먼저 등을 돌리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가주님. 그럼 저는 이만 할 일이 많아 물러나겠습니다. 시킬 일이 있으니 너희들도 따라오렴.”

시모어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뺄 준비를 했다. 노마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답지 않게 재미난 일을 벌인 그녀를 새초롬한 눈으로 한 번 흘기고 말았다.

“…….”

둘만 남은 방 안. 무슨 꿍꿍인지는 몰라도 그는 말없이 연신 내 머리칼을 손빗으로 쓸어내리기만 반복했다. 그의 손가락 틈새로 굽이치는 검은 머리칼이 한 움큼씩 걸렸다가 촤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거울을 통해 보였다.

계속 그러고만 있으니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리칼을 만지고 있는 게 뭐라고 이렇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드는지. 한 소리 하고 싶어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다시 후두둑.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진 머리칼이 다시 등에 닿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감각은 하늘과 땅을 오가는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에 나는 재차 입술을 앙다물고 말았다.

나는 최근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닌 척하고 앉아 있다고 한들, 기민한 그는 내가 조그마한 자극에도 펄쩍 뛰고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간지러우신가요?”

다 알면서 그가 물었다.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어딘가 나른하고 웃음기가 어려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그는 능글맞고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이야 잘 안다. 재미난 반응을 노리고 장난을 치는 것이니, 무반응보다 좋은 대응책이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숨만 쉬어도 웃어 주는 이상한 남자였다. 그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푸스스 웃을 뿐이었다. 어쩐지 기가 팍 꺾였다.

그가 내 머리 가마를 중심으로 머리칼을 양쪽으로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등이 피부를 스쳤다. 한쪽 목이 드러나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노마의 손이 닿은 곳만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려 입 안이 탔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나마 그의 손이 닿는 순간에 몸을 움츠리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노마가 한쪽 머리를 땋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손길을 밤의 그것처럼 의식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속으로 가신들의 이름을 외운다거나, 고대어로 숫자를 센다거나.

가신들의 이름을 전부 왼 뒤, 고대어 숫자가 60을 넘어갔을 때였을 것이다.

“아―.”

나는 결국 바르르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별일 없었다. 그저 노마가 머리를 땋다 말고 내 목덜미를 느릿하게 아래에서 위로 쓸었을 뿐이다. 정말 별게 아닌 걸 나도 알지만, 난데없는 자극에 그 감각을 1초도 버티지 못했다.

나는 새삼 내가 외부 자극에 몹시 참을성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반응에 노마도 놀랐는지 목 부근에서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변태가 된 기분에 완전히 기가 죽은 나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무너지듯 스르르 상체를 숙이더니, 대뜸 내 뒷덜미에 코끝을 붙인 채 앓는 소리를 했다.

“하. 아이사 제발.”

“으―.”

아뿔싸.

그의 뜨거운 숨결이 갑작스레 목 부근에 퍼지는 바람에 또다시 괴상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막을 새도 없었다. 한여름에 맞춰 시원하게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덕분에 맨살에 닿는 그의 콧등, 볼, 입술의 촉감이 적나라했다.

“왜, 왜? 내가 뭘요?”

또다시 변태처럼 반응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당황한 나는 급히 고개를 쳐들고 일단 큰소리를 내고 봤다. 기가 죽은 것도 잠시, 그 역시 뻔뻔하게 굴 때가 더 많으니 적반하장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급하게 정면을 바라보자 거울 속엔 내 뒷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노마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귀는 아주 눈에 잘 들어왔다.

저런. 멋대로 빨개지면 곤란했다. 달아오르는 것은 전염성이 있단 말이다.

하필이면 눈앞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나는 이날 내 얼굴이 노마만큼 빠르게 빨개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나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길. 평소에 내가 이러나 보구나. 이러니까 다들 날 보고 웃어 댄 거였구나.’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그와 나의 모습에 새삼스러운 충격에 빠져 있는데, 노마가 예고 없이 움직였다.

그가 고개를 바짝 틀어 콧등으로 기다랗게 목선을 쓸고 올라갔다. 그의 입술이 펄떡펄떡 맥이 뛰고 있는 곳에 닿았다. 그에게서 아까보다 거친 숨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잠깐. 잠깐!”

나는 본능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이 흐름을 알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잡히면 나와 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끈적하게 입을 맞추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그를 깔고 앉아 있거나 그가 내 위에 올라타 서로에게 엉켜 있기 일쑤였다.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연회는 곧 시작될 것이고, 연회의 주인공은 나와 그였다.

“머리, 아직 반도 안 했어요, 노마.”

내가 생각해도 소극적인 제지였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고, 여우 같은 남자가 내 욕망과 망설임을 눈치챘다.

노마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그가 입술을 살갗에 붙인 채 목뼈를 따라 점점 입을 맞추며 내려왔다. 마침내 도드라진 뼈에 닿았을 때 농밀하게 혀를 굴렸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비명 같은 신음이 샐 것 같아 다급하게 양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에선 목소리 두 개가 시끄럽게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회까지 시간이 촉박하니 그만해야 하는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그들보다 신분이 위인데 기다리게 해도 되지 않나?

아―, 아니다. 밀란 디아시, 아버님이 계시구나.

하지만 우린 부부고, 노마는 다정하고 나를 좋아하지. 정확히는, 사랑한다잖아?

‘그리고 나도―.’

신경이 들끓고 이성이 휘발된 순간, 어느새 작게 튀어나온 어깨뼈 끝에 머물러 있던 그가 확 몸을 떼며 멀어졌다.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에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는 목소리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등 뒤에 닿던 뜨거운 체온이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나는 허억, 헛숨을 들이켰다. 알 수 없는 상실감과 묘한 아쉬움이 뒤따랐다. 왠지 모르게 서럽기까지 했다.

기가 막힌 감상에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았으면…… 난 방금 뭘 하려고 했지.’

노마는 어떨 때 나보다 나았다. 시작은 언제나 그였지만 정욕을 못 이겨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그는 그나마 상황을 살펴 고삐를 잡을 줄 알았다.

그때 거울 속의 노마가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스르륵 카펫에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몸을 반쯤 틀자 쭈그려 앉은 노마의 정수리가 보였다.

체면도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끙끙 앓는 강아지인 양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어 왔다. 귀는 아까와 다를 게 없었고, 어느새 목 뒤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허벅지에 느리게 볼을 문댄 끝에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올려다봤다.

“…….”

참 나, 그러면 그렇지. 그가 아무리 나보다 나아 봤자였다.

언제나 총명하게 빛나는 금안이 흐릿했다. 마치 밤의 그처럼 축축하고 아득했다. 뭔가에 푹 빠진 것 같은 눈이었다.

그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었다.

불은 이미 붙어 있었으니 그가 기름을 붓자 타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이대로 노마를 덮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잠겼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