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에리카가 등장하자 하녀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녀에게 쏠렸다.
근 몇 달간 맥포이 성 최고의 화두는 천상계 외모를 자랑하는 가주 부군이었다. 그러나 최근 그보다 뜨거운 것이 바로 에리카 시모어였다.
그녀가 맥포이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해리와 9년째 열애 중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와 결혼을 허락받았다는 소식이 한꺼번에 터지자 온 성이 뒤집어졌다.
그럼에도 하녀들은 에리카가 은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신속하게 퇴장하기 시작했다. 여러 정보를 굴리는 주인을 모시기 위해선 궁금증을 자제할 줄 알아야 했으며 눈치가 필요했다.
물론 그녀들은 우르르 나가는 중에도 에리카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득한 시선에 에리카는 대놓고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더 이상 못 해 먹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최근 전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나는 태평히 그 광경을 구경했다. 남 일이라 그런지 마냥 재미나기만 했다.
에리카는 시모어 부인에게 눈인사를 하고 내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서신으로 보아 인장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보낸 것인지 알 만했다.
“디아시 가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니콜라스 디아시가 닉스의 소식을 보낼 때가 됐다 싶었는데, 역시나.
살면서 니콜라스에게 정기적으로 서신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내가 그 서신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니, 세상 길게 살고 볼 일이었다.
남몰래 심호흡을 한 뒤에 서신을 펼쳐 들었다. 닉스의 소식을 확인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긴장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뭐야?”
그러나 긴장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신은 딱히 읽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전 없음.
설마 이게 끝인가 싶어 종이를 뒤집어 봤다. 하지만 서신을 가로로 보고 세로로 봐도 달랑 네 글자만 적혀 있었다.
매번 진전이 없다는 소식도 맥이 빠졌지만, 어째 서신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암호문이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하여튼 싸가지하고는.”
니콜라스가 날 굉장히 귀찮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내게 모든 걸 알려 줄 거란 기대도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첩자였다.
나는 서둘러 다음 서신을 집었다. 니콜라스가 서신을 보낼 때 항상 함께 오는 서신이 있었다. 바로 동부의 고위 신관 클로이가 보내는 밀서였다.
클로이는 동부 구석에 위치한 위고 신전 소속의 고위 신관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서부 출신으로, 그녀가 여성 신관만 받는 위고에 들어가는 데엔 맥포이의 도움이 있었다.
신전을 통한 신분 세탁은 갓난아기만 가능한 게 아니다. 그녀는 내가 처음 신전을 이용해 신분 세탁을 해 준 인물이었다.
다행히 클로이는 신전에 무난하게 자리를 잡았다. 일전에 패트라 랑드라이가 낳은 여아를 손쉽게 위고 신전에 들인 것도 그녀를 통해 손을 쓴 일이었다.
닉스를 바그다트로 옮긴 후에 대신관은 각지에서 은밀하게 고위 신관을 뽑아 그곳에 모았다. 동부에서 이름을 제법 날린 클로이 역시 그중 하나였다.
비록 훈련된 정보원은 아니었으나 대신관과 함께 움직이는 클로이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곧 니콜라스가 내게 서신을 보낼 때에 맞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조리 적어 보내기 시작했다.
정보 수집에 서툰 그녀의 서신은 마치 개인의 일기처럼 장황했다. 이번에도 닉스에 관한 내용만 족히 세 장이 넘어갔지만 요약하면 결국 니콜라스가 보낸 서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보니 세상 간결하고 명료한 니콜라스의 서신이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이번에 전해 준 소식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대신관 헤이롯이 황태자의 성년식 준비를 위해 잠시 황도로 떠났다는 내용 정도였다.
“황태자의 성년식이라. 그 멍청이가 곧 바그다트에 가겠군.”
내가 은쟁반에 서신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자, 에리카가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성년식을 바그다트에서 치르는 것은 귀족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로, 특권처럼 여겨졌다. 하물며 빌리넌트는 황족이자 황태자이니 후계자로서 위치를 굳히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곳에서 성년식을 치르려고 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바그다트는 무슨, 동부에 발도 못 디디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닉스의 존재가 극비리로 다뤄지는 지금, 황태자가 바그다트로 향하는 걸 막을 적당한 핑계가 없었다.
“찝찝하군.”
지나친 걱정일 수 있지만 멍청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한 빌리넌트가 바그다트에 향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 요소였다.
물론 귀하신 황태자 저하가 닉스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한 번 닉스에게 자식을 잃은 황제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는 그렇게 무능력한 인간이 아니었다.
또한 닉스는 바그다트에 위치한 신전이 아닌 외딴 동굴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니 부러 개고생을 하지 않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그때 서신을 다 읽은 에리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을 써 두는 편이 좋겠지요?”
“황제가 손 놓고 있진 않겠지만 긴장을 풀고 있을지도 모르니 겁을 주는 게 좋겠다. 황태자가 그분 생각보다 멍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줘야겠어. 가서 가노를 불러와라.”
뭐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런 일엔 가노가 늘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를 먼저 찾았다.
“가노 님 말이십니까?”
“그래.”
“아직 휴가 중이신데요.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그가 지금 성에 없다는 말인가?”
“아직 이기오 섬에서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탕 부인에게 맡기지. 생각해 둔 게 있으니 틈을 봐서 조용히 불러와라.”
왜냐하면 나는 무의식중에 가노가 맥포이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중요한 가신으로서 다른 가신들과 마찬가지로 내 생일 즈음엔 언제나 맥포이에 머물렀으니까.
사실 내 머릿속에서 그와 그렇고 그런 일로 대판 싸운 일은 휘발된 지 오래였다.
그동안 노마 때문에 정신이 뺏긴 탓도 있었지만 평소 가노와 항상 이런 식으로 싸우고 어물쩍 화해하길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쉽게 그와 다툰 일을 잊었다. 그러나 가노는 이번엔 좀 다른 모양이었다.
용무가 끝난 에리카가 방을 빠져나가고 나는 다시 몸을 틀어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여자는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뭘 당연하게 생각한 거람. 이런 날 가노가 옆에 있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질 정도면 확실히 그가 내 곁을 오래 맴돌긴 한 모양이다.’
가노는 내게 자주 토라졌고 삐지는 대로 티를 냈다. 하지만 내버려 두면 금방 혼자 풀린다는 것이 또 그의 장점이었다. 그런 그와 냉전이 길어지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찝찝한 기분을 표현하자면, 마치 오래전 성질 더러운 내 오라버니 아이노와 대판 싸웠는데 실은 그게 내 탓이었을 때와 비슷했다.
아마 가노가 난폭하고 무례하게 군 일과 별개로, 내가 오랜 시간 그의 감정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거……. 깔끔하게 결판을 내긴 해야겠는데.’
시모어 부인 말처럼 좋은 날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태어난 날에 딱히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걱정거리가 단숨에 늘어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가주님. 이제 슬슬 머리를 손질하셔야 합니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맞다, 아직 옆에 시모어 부인이 있었다.
“그렇지. 부탁하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어린 시절, 유모였던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면 혼쭐이 났기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시모어 부인은 내가 열다섯 살 때까지 내 머리 손질을 직접 도맡았었다. 오랜 시간 그녀의 손길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시모어 부인이 머리를 땋아 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귀신같은 시모어 부인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아치의 유모가 된 그녀는 내 머리를 땋아 줄 일이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내 생일이 돌아오면 직접 내 머리를 땋아 주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생일에 시모어 부인이 내 머리를 땋아 주는 일은 그렇게 나름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은근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기다렸다.
“오늘은 다른 분이 손질을 도와주실 겁니다.”
그러나 또다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소린가?”
갑자기 다른 분이라니. 방심하고 있던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모어 부인을 찾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런 느끼한 표정은 또 처음 보는 것만 같아 뒷덜미에 소름이 주욱 돋았다.
가뿐하게 대답을 생략한 시모어 부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짝, 박수를 쳐 주변을 환기했다.
“뭣들 하니? 오래 기다리셨겠구나. 어서 모시렴.”
그러곤 어느새 방에 들어와 열을 맞춰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을 향해 외치는 것 아닌가.
그 순간에도 내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시모어 부인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맥포이 성에서 시모어 부인이 존대해야 하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누가 누구 머리를 땋아 준다고?’
머릿속에 스친 그림에 나는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았다. 잠깐 그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습관처럼 몸이 삐걱거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이 성의 주인은 난데 어째서 내 허락 없이 문이 열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난 아직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다고 호통을 칠 새도 없었다. 문틈으로 이젠 너무나 익숙한 남자가, 아까 새벽에 헤어졌던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노마가 등장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좌중엔 잠시간 침묵이 흐른다.
일단 자체 발광하는 별 가루 미인을 마주치면 누구나 숨을 죽이고 그를 감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잠깐의 정적은 익숙했다.
하지만 노마의 얼굴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맥포이 가주의 탄신 연회를 맞아 가주 부군은 평소보다 몇 배는 힘을 주었고, 효과는 대단했다.
나와 맞춘 듯, 그는 기다란 붉은 튜닉을 두르고 있었다. 그와 옷을 맞춰 입는 게 처음도 아니었으나 새삼스레 얼굴에 열이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파렴치한 생각이었지만 붉은 천에 싸인 그는 마치 선물처럼도 보였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어쨌든.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노마는 연회 때마다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넘겨 이마를 드러내곤 했다. 그는 오늘도 반쯤 이마를 드러냈고, 당연하게도 반듯한 이마 아래에 있는 금안은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유독 화려하게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마치 작정하고 유혹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는 반달로 사라지는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점점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오늘따라 그에 대한 감상이 유별나게 긴 것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최근 노마를 미친 듯이 의식하기 시작한 후로 그의 모든 것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그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쩍번쩍거리는 것이 꼭 ‘여보, 나 여기 있소!’ 하고 온몸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가주 부군께서 손질을 도와주실 겁니다, 가주님.”
시모어 부인이 쐐기를 박았다. 그 순간에도 노마는 한 발짝 두 발짝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와중에 눈이 마주쳤다 하면 볼을 붉히고 보는 것은 여전했다.
‘돌아 버리겠네.’
지금껏 나는 저걸 어떻게 부정해 왔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나를 사랑한다고 아주 온몸으로 광고를 했다.
직전의 걱정거리는 더 이상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맥포이 가주는 오늘도 암군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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