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04화 (104/139)

104.

“어떻게 저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주인이라고, 에리카는 단단히 질린 얼굴을 한 주제에 대충이라도 내 말에 꼬박꼬박 대꾸해 주었다.

“어떻게 누가 누굴 저렇게…… 하.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철학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탄식에 가까운 내 중얼거림에 에리카는 대단히 소름 끼치는 발언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나는 매우 진지했으므로 그녀의 표정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 질문에 내가 내놓는 답은 언제나 같았다.

‘정신이 나간 노마 디아시가 제 마음을 착각한 게 아니고서야 날 사랑할 리 없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악독한 인간은 세상에 없지 않을까?’

스스로 염병을 떨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노마 디아시가 엉엉 울며 자신의 마음을 착각이라고 치부하지 말라고 하는 얼굴을 봐야 했다.

물론 실제로 노마는 아주 우아하게 눈물을 한두 방울 정도 또르르 흘렸지만, 어쨌건. 그 모습을 떠올리면 내가 도낏병에 걸려 판단력을 아주 잃은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오늘만 벌써 수십 번째인 혼자 묻고 답하기가 끝났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방금 전 작게 손을 흔들며 응접실을 나가던 그의 옆모습을 곱씹기 시작했다.

그 얼굴에 그 키, 그 덩치를 하고 손 인사를 하다니. 노림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주님.”

“하여간 또 뭘 꾸미는지.”

“가주님?”

‘귀여워 죽겠군.’

나는 멋대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며 지레 놀라 어색한 동작으로 에리카를 돌아봤다. 그제야 내가 아직도 노마가 나간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또 왜 그러세요?”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나?”

“……하다 마셨습니다.”

어쩌면 미친 건 노마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머리통이 두 개는 많은 남자가 귀여워 보이다니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객관적으로 봐도 귀엽지 않나?’

……최근 내 의식의 흐름은 이따위라 나조차 따라가기 어려웠다.

“너는 찬물을 좀 가져오렴.”

에리카가 쯧, 혀를 차더니 옆에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진정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멍청한 짓거리를 조금도 참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것치고 꽤 잘 참고 있었다.

“문. 창문도 좀 열어라. 젠장, 여름 되더니 날이 덥구나.”

“추위는 많이 타셔도 더위는 잘 안 타시면서 무슨 소리세요.”

부산스럽게 손부채질을 하며 날씨 탓을 해 봤지만 에리카는 나의 어설픈 핑계를 봐주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웃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다들 괘씸했다.

에리카는 예의 꼿꼿한 자세로 앉아 내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게 용건이 있어 보였다.

내가 컵을 내려놓기 무섭게 역시나 에리카가 두루마리 하나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진정하셨으면, 이것 좀 승인해 주십시오.”

“자네는 결재할 걸 왜 응접실까지 들고 와?”

누가 일 중독 아니랄까, 불쑥 서류를 내미는 에리카를 한 번 째려보고 어쩔 수 없이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도르륵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리고 몇 번이고 글자를 다시 읽어 내려야 했다.

에리카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결혼 허가서’였다.

대귀족이 황제에게 결혼을 허락받는다면, 가신들은 가주의 허락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다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지만.

한 열 번은 읽었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에리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갑자기?”

“허락해 주시면 최대한 빨리 진행해 보겠습니다. 물론 가주님 성혼식만큼 빠르게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요.”

“……자네는 어떻게 알현실도 안 잡고 이렇게 날치기로 결혼을 허락받으려고 하나?”

우아하게 차나 들이켜던 에리카가 사돈 남 말 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에 나는 내 결혼이야말로 날치기 중의 날치기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언제는 왜 안 하냐고 재촉하시더니. 승인해 주시면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혼자가 편하다더니.”

“글쎄, 그게 아주 거짓말은 아니긴 한데―.”

“그런데?”

“이제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해리 폴른이 뭘 해도 귀여워 보이니, 더 이상 도리가 없습니다. 맹세코 결혼은 제 인생 계획에 없었는데 날벼락이 따로 없죠.”

“그게 무슨 논리야?”

귀여워 보이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직전에 성인 남성에게 치명적 귀여움을 느낀 나는 그녀의 말에 초조하게 미간을 구겼다.

에리카는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해리를 사랑하나?”

“네. 사랑하는데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재차 얼굴을 구겼다. 그놈의 사랑은 좀처럼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다들 그렇게 자기 마음을 확신할 수 있지?”

“글쎄요. 다만, 당장 죽는다면 해리 폴른과 결혼하지 못한 일이 후회로 남을 것 같더군요. 고작 서류로 묶이는 것이 뭐라고. 우습다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에리카는 꽤나 감성적인 말을 뱉고는 스스로도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인생은 낭만극이 아니니, 이 모든 게 영원하리라곤 생각 안 합니다. 미래를 누가 확신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저는 이제 그만 이 순간만 생각하려고요.”

“…….”

“제가 해리에게 청혼하면 그는 기뻐할 것이고, 저는 그가 우는 것도 좋지만 웃으면 좀 더 좋습니다. 저는 이제 편해지고, 아니, 행복해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어딘가 이상한 말이 섞여 있었지만 에리카가 행복을 논한 순간, 나는 어딘가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 말처럼 닉스 그 새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겁쟁이처럼 살아야 하나 싶고.”

“…….”

에리카는 꽤나 무거운 말을 연달아 던진 주제에 혼자만 개운한 얼굴을 하고 다시 찻잔을 들었다.

나는 인상을 쓴 채 한동안 침묵했다. 정적이 이어지길 한참,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똑똑하군.”

순수한 감상이었다. 똑똑할 뿐 아니라 용감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지막한 내 목소리에 홀짝홀짝 차를 마시던 에리카가 눈을 번쩍 떴다.

“풉! ……파하!”

이내 답지 않게 차를 뿜은 그녀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에리카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은 내가 웃는 것보다 귀했다. 그것도 비웃거나 냉소가 아닌, 저렇게 신나서 웃음을 터뜨리는 건 나도 몇 년 만에 보는 듯했다.

나조차 놀랐으니 사용인들은 뒤집어졌다. 특히 에리카의 비서들은 그대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 예, 제가 좀 똑똑하고 현명한가요. 그러니 맥포이 가주의 수석 보좌관이죠.”

한참 웃던 에리카가 눈물까지 훔치며 말했다.

“그래.”

“가주님은 아직 겁쟁이시고요.”

굉장히 무엄한 발언이었지만 나는 그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화끈한 하극상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은 것에 가깝긴 했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집무 보시기 전까지 잠시 쉬십시오. 저는 집무실 가서 먼저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에리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동안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두루마리와 왼손 검지에 끼워진 가주 반지를 번갈아 봤다.

곧 어느 때보다 신중한 동작으로 두루마리에 인장을 꾸욱 찍었다. 한 점 번짐 없이 반듯하게 찍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갑자기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실마리를 찾은 것처럼, 쪼개질 듯이 복잡했던 머릿속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 * *

ㅎㅂㄹㄱ.공금

“역시 붉은색이 잘 어울리십니다.”

오랜만에 옷시중에 끼어든 시모어 부인이 말했다.

나는 시침 중인 하녀를 위해 어정쩡하게 팔을 벌린 채로 눈알만 굴려 시모어 부인을 찾았다. 전신을 비추고 있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 쉽게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수고했다는 말을 잊었군. 부인, 이번에도 신전 오가느라 수고했소. 별 탈은 없었지?”

“예, 가주님. 올 들어 맥포이에 경사가 많으니 이디오 신관이 늙어서 고생이지요.”

시모어 부인이 예의상 비슷한 연배의 이디오를 걱정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거울 속에 비친 치렁치렁한 붉은 드레스를 훑어봤다.

이 드레스로 말할 것 같으면 시모어 부인이 직접 서부 신전에 들러 받아 온 물건으로, 무려 고위 신관 이디오의 축복이 깃들어 있었다.

귀한 옷이 분명했지만 신앙심 없는 자의 입장으로 사람도 아니고 고작 드레스에 축복을 내리는 건 해괴한 일일 뿐이었다.

“이디오는 이걸로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가만 보면 신전 것들은 돈 벌 궁리만 하는 것 같다니까? 생일에 신관이 축복을 내린 옷을 입으면 장수한다니 그게 다 상술이 아니면 뭐냐.”

신전의 입김이 세다는 소린 일상 구석구석에 그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과 같았다. 생일에 신관이 축복을 내린 의복이나 장신구를 하면 장수한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당연히 유명한 신관의 축복일수록 비싼 값을 치러야 했고, 소위 잘나가는 신관들의 개인 재산은 까 보면 어마어마했다.

오늘은 맥포이 가주의 탄신일. 내가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는 모조리 서부 최고 신관 이디오의 손을 거쳤다. 늙은이는 내 생일을 맞아 앉은 자리에서 한탕 한 셈이다.

‘장수는 개뿔이. 사기꾼 놈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생일마다 축복을 내린 온갖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거늘. 지난 건국제 때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걸 보면 상술이 확실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신전 놈들이 더욱 괘씸했다.

“이것들도 세금을 왕창 때리든가 무료로 해야 해. 종교인이 봉사 정신이 있어야지, 원.”

“가주님. 좋은 날이니 부디 너그러워지십시오.”

시모어 부인은 내가 평소보다 더욱 거세게 신전을 비난하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나는 시모어 부인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실은 방금 괜스레 짜증을 부린 것도 맞았다.

따분한 건 둘째 치고, 해도 안 뜬 새벽에 일어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박 씻김을 당하고 뻣뻣한 자세로 수십 분째 서 있는데 피곤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연회를 괜히 싫어하는 게 아니다. 온갖 기 싸움과 아첨의 향연이 벌어지는 연회도 연회지만, 준비를 위해 수 시간을 들이는 과정은 더욱 끔찍했다. 그야말로 신종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때 시침질을 마친 하녀가 드디어 내 허리 부근을 열심히 실로 꿰매기 시작했다.

경험상 허리만 꿰면 가장 지루한 ‘드레스 입기’도 끝이었다. 물론 장신구 차기와 머리 손질이 남아 있었지만 드레스 입기보다야 백배는 나았다.

“다 됐습니다, 가주님!”

마침내 대장정을 끝낸 하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시뻘게진 얼굴이 꽤나 안쓰러웠다.

“오냐. 잘했다.”

그래, 아무렴 네가 나보다 더 힘들었겠지. 나는 고생한 하녀를 가볍게 치하해 줬다.

때마침 거울로 에리카가 소리 없이 방에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엔 익숙한 은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새하얀 서신이 있었다.

옷시중을 받고 있는 중간에 들어온 것을 보아 꽤나 중요한 서신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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