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어떻겠는가? 똑같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음에도 헤이롯은 최선을 다해 성질머리를 부렸다.
“…….”
“이보시게, 니콜라스 디아시.”
언제나처럼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헤이롯이 사나운 얼굴을 했다. 그래 봤자 클로이의 등에 업혀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니콜라스에게 그다지 위협을 주지는 못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건 자네가 가장 잘 알 테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걸세.”
그 말에 니콜라스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난 아주 바쁜 사람이네. 그나마 바그다트에 있으면 오필리아를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애는 도대체 어딜 간 것이지?”
“알 것 없다.”
니콜라스는 헤이롯의 입에서 오필리아가 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웃기는 놈. 오필리아가 네놈 것이라도 되나?”
“진짜 하려는 말이 뭐지. 본론만 말해.”
“이 몸도 대신관 존경할 줄 모르는 네놈과 길게 이야기할 생각 없다.”
대신관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미친놈 소리를 듣는 헤이롯도 헤이롯이지만, 니콜라스 디아시의 의사소통 능력 역시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오필리아를 사랑한다는 것뿐이었다. 목적이 같기 때문에 팔자에 없던 협업을 하게 된 것이니 대화가 잘 될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대화는 보통 일방적인 통보식이었다.
“곧 황태자의 성년식이야. 황제가 그 때문에 이 몸을 불렀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으니 혼자서 잘 버티고 있으시게.”
“얼마나?”
“아까 했던 이야긴 그냥 한 소리가 아니야. 언제까지 이럴 순 없다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헤이롯은 당한 것을 갚아 주려는 듯 니콜라스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니콜라스에게 은막대를 겨누며 경고했다.
니콜라스는 신관의 등에 업힌 채 총총 사라지는 헤이롯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봤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역시 헤이롯이 말한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벌써 1년 가까이 바그다트에 묶여 있었다.
물론 닉스는 순식간에 대륙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긴 했지만, 언제까지 디아시 가주와 대신관이 닉스 하나에 붙들려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헤이롯과 번갈아 격일로 닉스에게 성력을 퍼붓는 것도 꽤 부담이 컸다. 헤이롯이 자리를 비울 동안 매일같이 닉스를 봉인하는 것은 니콜라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필리아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저것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니콜라스는 며칠 전 자신의 충실한 기사이자 친구인 잭 바인스가 보내온 전서구를 떠올렸다. 전서구가 매달고 온 쪽지에 의하면 오필리아의 상태는 마치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는 쪽지를 읽자마자 당장 오필리아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봉인이 풀린 닉스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맥포이에 또다시 전과 같은 참사가 벌어지면 오필리아가 버틸 수 있을까? 니콜라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오필리아가 아이사에게 가지는 집착에 가까운 감정을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맥포이엔 다시금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야겠군.’
니콜라스는 형, 노마만 살아 돌아오면 이 숨 막히는 여정도 다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뭐든 쉽지 않았다.
‘진전 없음.’
니콜라스가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음에도 공기가 무더웠다.
바야흐로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아이사 맥포이, 맥포이 가주의 탄신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맥포이 가주의 탄신 연회’를 앞두고 손님들이 속속들이 맥포이 성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번 탄신 연회는 노마가 맥포이의 안주인으로서 처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를 이른 아침부터 응접실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회엔 보통 맥포이의 가신들과 롬닥으로 연을 맺은 손님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번엔 디아시에서 밀란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만 그는 디아시 가주의 부재로 가주 대리 역할을 하고 있어 오래 머물진 못한다고 한다.
이제는 내게 ‘아버님’인 밀란 디아시 공은,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상대라 그가 나의 형식적인 초대에 응했을 땐 아뿔싸 싶었다. 그러나 옆에서 은근히 기쁜 티를 내는 노마를 보고 있자니 불편한 기색을 보일 수 없었다.
명단을 훑어보던 에리카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두 분께서 직접 마중하실 인사는 노턴 가주 정도입니다. 보고는 이상입니다.”
“아치가 제 외삼촌을 몇 년 만에 보는 것이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해.”
“예, 가주님.”
그러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좀 남았겠다, 이 붕 뜬 시간을 저 별 가루 인간과 또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고민할 때였다.
“아이사.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시모어 부인에게 배울 것이 있어서요.”
웬일인지 노마가 답지 않게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아한 얼굴로 노마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게 노마는 그동안 내 응접실 또는 집무실에 한 번 들어오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눌어붙어 있으려 온갖 수를 다 쓰곤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알기로 그는 오찬까지 다음 일정이 없었다.
“무엇을?”
“음, 비밀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노마가 얼굴에 빗금을 그어 가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묵비권 행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딱히 더 추궁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또 깜찍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정체 모를 기대감, 긴장감 따위로 은근히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노마가 슬쩍 사용인들을 돌아봤다.
“……!”
유능한 맥포이의 사용인들은 안주인이 뭘 말하는지 빛보다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들은 ‘맡겨만 주십쇼!’ 하고 말하는 듯이 노마를 향해 신속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일사불란하게 몸을 틀어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군. 저게 정말 나 모르라고 하는 짓들이란 말인가?’
그 꼴을 지켜보던 나는 기가 찰 뿐이었다. 그들은 이게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퍽이나.
나는 더럽게 부자연스러운 그들을 바라보며 노마와 사용인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을지 상상했다. 덕분에 내 수치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하는 양을 모르는 척 말없이 빈 찻잔이나 들이켰다. 어쩌면 저들보다 내 행동이 더 어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쓱하게 찻잔을 입술에서 뗀 순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노마가 내 쪽으로 상체를 숙여 왔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말랑한 것이 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번쩍 눈을 뜨니 코앞에서 반달로 접힌 눈꼬리가 보였다. 그 아래 자리 잡은 노마의 눈동자는 벌건 대낮부터 번쩍번쩍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제길. 왜 입술일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오늘도 그의 기출 변형에 꼼짝을 못 했다.
노마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자그맣게 웃었다. 내 미간이 와작 구겨질 때쯤, 날렵하게 움직인 그가 기어코 입술에 쪼듯이 입맞춤을 날렸다.
‘왜긴. 최근엔 항상 입술에 먼저 했으니까.’
“조금 이따 봐요, 아이사.”
세상 뿌듯한 얼굴을 한 노마가 멍청이처럼 입을 쩍 벌린 내 귓가에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의도적으로 귓불에 숨결을 흘려보내니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얕은 소름이 쭈욱 일었다.
아―. 이 감각도, 그에게 이번에도 말렸다는 사실도 이제는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사용인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열 오른 피부로 느껴졌다. 에리카의 질렸다는 얼굴 역시 보지 않아도 보이는 듯했다.
이러한 주변의 반응도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굉장히 어색한 자세로 굳어 노마가 사라진 문을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저 발칙한 걸 정말 어쩌면 좋을까.’
노마가 열이 난 것을 숨기고 각방을 선언했던 날 이후 나와 그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노마의 경우, 그는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그는 이제 남들 앞에서도 온갖 애, 아니, 감정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어떤 확신이 생긴 사람처럼 말이다.
모든 건 이 요망한 남자가 내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시작되었다.
“마음을 부정당하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인지 몰랐습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이 나아지겠나…….”
노마가 문득 담담한 어조로 열이 내린 소감을 말했다. 지레 찔린 나는 물질 공세로 이 일을 무마하기 위해 물었다. 내가 아는 사람 마음 달래는 법이란 이런 것뿐이었다.
“이런. 무엇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내 말에 그가 몹시 놀란 척 눈을 땡그랗게 떴다. 그는 내숭을 떨고 있는 걸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죄가 많은 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뭐든 말해 보세요.”
“그럼…….”
상기된 볼을 한 노마의 눈동자에 이채가 지나갔을 땐 아차 싶었으나, 그의 바람은 김이 샐 정도로 간단했다.
그가 원하는 건 고작 ‘언제 어디서든 원할 때 입을 맞추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노마 디아시가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는 우수한 성기사였다는 것을 기억했어야 했다.
곧, 그의 작은 소원이 정확히 무엇인지 피부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노마는 이미 훌륭한 입맞춤 귀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가 평소 인내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평소 신체 접촉을 많이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사용인들 보는 앞에선 하지 않았다든가.
큰 고민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허락해 준 나는 그가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냅다 입을 맞췄을 때,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뭐, 뭐 하는 짓이지?”
“하지만 아이사. 허락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눈에 띄게 삐걱거리며 주변부터 살피자 노마는 퍽 시무룩해했다. 그가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려 그에게 변명처럼 ‘가주의 위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마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는 그런 문제라면 자신이 해결해 보겠다며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젠장 맞게도 그 해결이란 것이 바로 저 어색한 시선 돌리기, 못 본 척이었다.
그리고 나의 경우, 보다시피 이 모양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부군의 입맞춤 공격에 내 몸은 상시 긴장 상태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버거웠으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날 나는 노마가 눈물을 도르륵 흘리는 것에 당황해 자신의 마음을 착각이라고 하지 말라던 그의 말을 대충 흘려 넘겼었다.
그런데 이게 또 곱씹을수록 파급력이 엄청났다.
착각이 아니라는 말은즉슨.
‘그가 나를 진짜 사, 사랑한다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다시 그놈의 ‘사랑해요’가 귓가에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귓바퀴부터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선 축축한 망상이 넓게 펼쳐졌다. 경험에 기반한 상상은 무척이나 구체적이라 결국 한 손으로 열 오른 이마를 짚곤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난리 났군. 사춘기냐.’
노마의 마음을 서툴게나마 인정하기 시작한 뒤로 어째 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마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니 긴장은 끝도 없었다. 덕분에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일조차 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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