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에리카는 어제부터 달릴 일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드물게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사용인들은 아침부터 롬닥 상단에 일이 터졌나, 했다.
‘아치 도련님이 디아시에서 온 기사를 좋아한 걸로 그렇게 풀이 죽어서야. 불침번 끝나고 어디 처박혀 있을지 뻔하지.’
남몰래 울고 싶을 때 해리가 항상 향하는 곳이 있다. 오갈 길이 없는 연무장 뒤편엔 키가 큰 나무가 있다. 딱, 건장한 기사 하나 가려질 만한 둘레의.
연무장 뒤편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만 에리카는 해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해리.”
“……에리카? 어떻게―.”
에리카의 목소리에 반응한 해리가 나무 뒤에서 홀린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예상대로 불침번이 끝난 해리는 곧바로 숙소로 가지 않고 땅굴을 파고들고 있었다.
해리는 갑작스러운 에리카의 등장에 당황한 눈치였다. 보통 이 시간에 그녀는 가주의 집무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건 말건, 에리카는 말없이 해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수에 젖은 연푸른 호수색 눈은 누가 봐도 이미 눈물을 두세 방울은 흘린 모양새였다.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울고 있던 해리를 처음 발견한 날이 떠올랐다.
‘우는 모습이 제일 예뻐 보이다니. 나도 확실히 성격이 나쁘긴 하네.’
촉촉한 해리를 보자 에리카는 뜀박질 때문에 호흡이 가쁜 것과 별개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천천히 해리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울고 있는 건 나보고 또 잡아가 달라는 소린가?”
처음 입을 맞췄던 날을 생각하며 에리카가 길거리 노총각처럼 저급한 투로 지껄였다. 단정하고 순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이따금 질 나쁜 양아치인 양 연하의 그를 놀리곤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닌 건 뭐야. 나, 가요?”
에리카가 마음에도 없는 도발을 하자 해리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로 웃음을 참은 에리카가 그에게 물었다.
“도련님께서 디아시에서 온 어린 기사를 아끼는 게 그렇게 서운했어요?”
“…….”
에리카의 물음에 해리는 몹시 슬프고 수치스럽다는 듯이 눈꺼풀을 내렸다.
‘이 인간이 광신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맥포이의 폴른 경이라니.’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는 해리는 저래 봬도 서부 바깥에선 무표정한 얼굴로 얄짤없이 목을 그어 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냉혹한 기사였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해리의 코앞에 선 에리카가 그의 눈꼬리에 대롱대롱 달린 눈물방울을 훑어 냈다.
“나이를 이렇게나 먹고 구석에 처박혀 우는 모습이 마냥 귀여워 보이니.”
귀엽다는 소리에 해리가 복잡한 표정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자신이 에리카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다.
그 표정을 뻔히 읽은 에리카가 마침내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졌지.’
에리카는 마음속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에리카는 해리가 뭘 해도 귀여워 보였다.
다음 순간 에리카가 해리의 뒤통수를 휘어잡고 그에게 박력 넘치게 입을 맞췄다.
‘별수 있나, 서류를 합칠 수밖에. 종이 쪼가리로나마 내 옆에 꽉 묶어 둬야지.’
우습게도 에리카가 결혼을 결심한 것이 바로 이날이었다.
* * *
“아파요, 어린 신관님. 아파. 도와주세요.”
다시 한번, 가여운 노인의 목소리가 어린 신관을 불렀다. 신관은 벌써 몇 시간째 애달픈 목소리의 부름을 받고 있었다.
“신관님, 얘야. 나를 한 번만 도와주렴. 너무 아파. 아프다.”
그렇게 또다시 한참. 말라비틀어진 목소리는 지치지도 않는지 재차 신관을 찾기 시작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동한 신관이 뭔가에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만. 자네는 저걸 버티기엔 부족하네.”
그때 어린 신관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젊은 청년 같았으나 말투는 고상한 노인에 가까웠다.
불시에 들린 목소리에 신관이 미처 놀라기도 전에 딱―, 하고 호두 껍데기가 쪼개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아악!”
그와 동시에 어린 신관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이마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돌바닥을 굴렀다.
“쯧쯧.”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천으로 꾸며진 한 남자가 어린 신관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그의 이마를 가격한 은막대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남자의 뒤에 시종처럼 붙어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잽싸게 막대를 받아 냈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못 느끼다니. 까딱하면 골로 갔겠군그래.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고위 신관 아무나 붙잡고 정화해 달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고.”
남자는 여태 엄살을 떠는 어린 신관을 지나치며 무심하게 말했다.
어딘가에 단단히 홀려 있던 어린 신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상체를 일으키며 남자를 쳐다봤다.
늙은이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젊은 남자의 뒷모습과, 고위 신관복을 입은 세 명의 사람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보였다.
마침 남자가 머리에 쓴 반투명한 천을 벗었다. 스르륵,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등불 두 개에 의존하고 있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기다란 밀색 머리칼이 드러났다.
“헤, 헤이롯 님.”
어린 신관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반쯤 뒤를 돈 그가 비딱한 자세로 서서 어린 신관을 바라봤다.
백색에 가까운 독특한 홍채는 마치 그걸 지금 알았냐고 말하는 듯했다. 사나운 눈빛에 어린 신관이 몸을 움츠렸다.
공기가 조여드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쯤, 헤이롯이 씨익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곤 그가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요즘엔 통 괜찮은 인재가 없는 것 같군. 저렇게 나약해서야.”
그러나 어린 신관은, 마찬가지로 어린 대신관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숨을 죽였다. 어딘가 작위적이고 가벼운 말투는 절대 대신관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미소도 잠시, 헤이롯이 차갑게 등을 돌렸다.
“죽기 싫으면 다음부턴 아무리 ‘그것’이 불쌍한 목소리로 떠들어도 돌아볼 생각 마시게.”
퍽 자상한 투로 조언을 남긴 그가 동굴 안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고위 신관은 신실한 종자처럼 고개를 숙인 채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아―. 저런 정신력으론 다음번은 없겠군. 저런 건 누가 데려왔나?”
몇 걸음 옮긴 헤이롯이 이번엔 정색을 하며 물었다. 휙휙 변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이중인격자 같았다.
“접니다, 헤이롯 님.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고위 신관이 부족해 어린 신관 중 가장 뛰어난 자를 몇 데려온 것인데 면목 없습니다.”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헤이롯의 언행은 그를 따르는 고위 신관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그들은 헤이롯이 인간의 그릇으로 고강한 성력을 담고 있는 탓에 반쯤 미쳐 버렸다고 여겼다.
“저 신관은 대신전으로 돌려보내시게. 여기 있다간 일을 그르치겠군.”
“예, 헤이롯 님.”
짧은 대화 끝에 무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 그럼.”
헤이롯은 이제 지긋지긋하기까지 공간을 빙 둘러봤다.
천장이 뻥 뚫린 이 공간엔 밤이 되면 달빛이 차오른다. 빛은 공간 가운데에 있는 지하수를 비추었고,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수면의 가운데에는.
“오랜만이네, 닉스. 이제 하루라도 안 보면 아쉬워. 자네도 그런가?”
신관들이 한 땀 한 땀 짠 무명천에 몸이 둘둘 말려, 턱 끝까지 물속에 처박혀 있는 닉스가 있었다.
헤이롯이 실눈으로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래서, 잘 있었는가? 어제는 니콜라스 차례라 아무래도 재미가 없었지? 내 잘 알지. 숨이 다 막혔겠어.”
물속에 처박힌 닉스와 눈높이를 맞춘 헤이롯이 퍽 반가운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닉스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언어를 잊은 것처럼 알 수 없는 음절의 조합이었다.
끔찍한 비명에 헤이롯의 미소는 길게 가지 않았다. 그는 닉스가 날뛰면서 얼굴에 튀긴 물방울을 훑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자꾸만 신관들을 괴롭히나.”
권태로운 표정으로 기다란 머리칼을 쓸어 넘긴 헤이롯이 무생물을 보듯이 닉스를 내려다봤다. 또는 오랜 골칫거리를 보는 듯했다.
닉스는 정말 다루기 어려웠다.
입을 막으면 머릿속에 침범하려 들어 차라리 이렇게 소리를 지르게 하는 편이 나았다.
당연히 죽일 수도 없었다. 팔다리를 잘라도 다시 자라고, 불에 태워도 죽지 않고 꾸물꾸물 몸뚱이가 재생됐다.
헤이롯은 처음엔 닉스가 알포에게 바친 맥포이의 수만큼 그가 되살아난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닉스를 바그다트로 끌고 와 이미 수천수만 번은 죽였다.
맥포이를 잡아먹은 닉스는 말 그대로 ‘반신’과 같았다. 평범한 힘으로는 도무지 죽일 방도가 없어 보였다.
같은 사람을 셀 수 없이 죽인 끝에 미친 자로 유명한 헤이롯도 포기를 선언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대신관이라도 결국엔 이런 어설픈 봉인으로 닉스를 묶어 두는 방법밖엔 없었다.
‘아―. 귀찮아. 지긋지긋해.’
헤이롯은 뿌득 이를 갈며 손을 들었다. 일순 그를 중심으로 돌풍이 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저것의 힘을 누르고 이곳에 묶어 둘 수 있을지…….’
그의 손끝에서부터 퍼져 나온 금빛이 곧 동굴을 채우고,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밤하늘을 꿰뚫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군.’
그와 동시에 닉스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헤이롯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런 닉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헤이롯의 등 뒤를 지키던 고위 신관, 클로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오싹해질 정도로 끔찍한 비명은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됐다.
메헤라의 힘에 의해 모든 사술이 풀린 닉스는 쉰을 훌쩍 넘는 본래의 외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명천을 꼬아 깡마른 노인을 속박하고, 그를 물에 처박아 놓은 모습은 겉보기에 인도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심지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비명을 지르는 닉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꼭 힘없는 노인을 심하게 고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앞에 선 헤이롯은 흡사 악당 같았다.
대신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단순했다. 당대 최고의 성력을 가진 신관이 대신관 자리에 오른다. 메헤라의 힘 앞에서 출신, 성별은 평등했다. 인품과 명성도 필요 없었다.
출신 불명, 이중인격에 반쯤 미친놈 같은 헤이롯이 대신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압도적인 성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알 사람은 알고 있었다.
놀라운 성력을 가진 헤이롯도 그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짜 ‘반신’과 같은, 신에 가까운 여자가 서부에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지긋지긋한 굴레를 끊으려면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백색에 가까운 홍채가 번뜩이며 헤이롯의 동공이 잔뜩 수축됐다.
더 보고 있다가는 이대로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클로이는 속으로 메헤라를 부르며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시작된 봉인은 다음 날 해가 미처 뜨지 못한 어둑한 새벽녘에 끝났다.
성력을 바닥까지 끌어다 쓴 헤이롯은 오늘도 자신이 부리는 고위 신관 클로이의 등에 업혀 나왔다. 그녀의 등에 업힌 헤이롯은 죽은 사람처럼 얌전했다.
늘어진 헤이롯을 업고 동굴을 빠져나오던 클로이가 멈칫했다. 동굴 앞에 흰 로브를 두른 남자가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로이가 어색하게 발걸음을 멈추자 기절한 줄 알았던 헤이롯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등을 돌린 남자를 바라봤다.
“자네가 날 마중 나온 건 아닐 테고. 어쩐 일이지?”
헤이롯이 말라비틀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지?”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보랏빛 풍경 속에서 니콜라스 디아시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제 할 말만 하는 버릇이 있었고, 가볍게 무시당한 헤이롯은 팍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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