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가주님과 관련된 큰일이 벌어지면, 맥포이의 유능한 사용인들은 일단 성의 해결사인 ‘시모어’부터 찾았다. 특히 화가 난 가주님엔 냉철한 ‘시모어 보좌관’만 한 사람이 없었다.
겁먹은 사용인들은 일단 에리카를 부르고 봤다.
그 시각, 아직 이 소란을 모르는 에리카는 아직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실은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가 조금 남았지만 그녀는 주군을 일찍 보내 드린 참이었다.
간만에 아침 일찍 집무를 보기 시작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에리카의 주군, 아이사는 남몰래 서재에 찾아온 부군을 본 뒤론 연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역시나 그길로 도련님의 정원까지 행차하는 모습을 보고 에리카는 속으로 욕을 되뇌었다.
그러니 가주님이 부군에게 바람맞은 것은 은근히 쌤통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가주님이 1분에 한 번 꼴로 노마의 행방을 물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두 사람의 티타임을 구경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주 부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가주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뛰다시피 마중을 나갈 땐, ‘이젠 부정할 생각이 없으신 건가?’ 싶어서 내심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역시나 제 주인은 자기만의 선을 착실히 지키기 위해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에리카가 보기엔 아무 소용없는 발악이었지만 말을 아꼈다. 그녀는 대신 아이사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발걸음으로 다시 집무실로 향하는 것을 따르며 ‘그럼 그렇지’ 하고 혀를 찼다.
아이사는 나갔다 돌아와선 귀신처럼 빠르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풀어졌던 마음에 벌을 주듯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습은 과연 에리카가 익히 아는 ‘맥포이 가주’다웠다.
그러면서도 아이사는 기어코 평소보다 일찍 집무를 마치곤 어서 날 보내 달라는 얼굴을 하고 에리카를 쳐다봤다.
‘이게 마지막 맞지?’ 하고 묻는 듯한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아무리 에리카라도 남은 서류를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겨 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능한 보좌관이 어디 있담. 봉급을 올려 달라고 하든가 해야지.’
자신의 능력치를 자화자찬한 에리카는 그렇게 생각보다 오래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것까지 창고로 옮겨 놓고 이만 들어가도록 하렴.”
에리카가 양피지를 둘둘 말아 자신의 비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는, 문득 아까 집무실에 불려 왔던 해리를 생각했다.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였는데.’
맥포이를 보호해야 하는 기사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지 못한 해리 폴른 경과 2기사단은 에리카의 판단에 의해 봉급 삭감 처리되었다.
에리카는 공과 사의 구분이 누구보다 확실했다. 아무리 해리가 그녀의 오래된 연인이라도 봐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대쪽 같은 해리 역시 이런 일로 서운함을 느낄 위인이 아니었다.
가주의 집무실에서 에리카와 해리가 눈을 마주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 잠깐으로 에리카는 해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겉보기엔 표정 변화가 없지만 연인이 된 지 9년 차에 접어든 그녀는 해리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읽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게 생긴 냉미남은, 맥포이에서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글렌 도그만 경이 직접 키워서 그런지 실은 매우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남몰래 자주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에리카와 글렌만 아는 사실이었다.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과 별개로 분명 마음 상한 일이 있는데. 뭔지 감이 안 잡히네.’
에리카는 시계를 봤다. 오늘은 해리가 도련님의 침실 앞에 불침번을 서는 날이었다. 아직 교대하기 전이니 지금 찾아가면 늦지 않게 그를 볼 수 있었다.
아까 본 해리의 표정 때문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으나 곧 그를 볼 생각에 기쁜 마음이 앞섰다.
‘나도 참…… 가주님께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구나.’
집무실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에리카가 집무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다시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였다.
“시모어 보좌관님―! 큰일!”
복도 끝에서부터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실 하녀 아닌가?’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침실 쪽의 온갖 잡일과 심부름을 떠맡고 있는 어린 하녀 중 하나가 분명했다.
“젠장.”
에리카가 드물게 팍 인상을 구기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이 시간에 침실 하녀가 애타게 자신을 부른다면 절대로 좋은 소식일 리가 없었다.
“큰일 났습니다, 시모어 보좌관님. 침실, 가주 부군 침실에 지금―!”
‘안 궁금하다.’
에리카는 침실에서 두 분이 밤마다 뭘 하시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려 하녀가 달려오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바쁘고, 두 분 침실 상황에 관심 없단다.”
“하, 하지만 가주님께서 고성 끝에 얀 님을 부르셨습니다. 정말, 이번엔 정말 큰일이에요!”
에리카가 멀어지자, 하녀가 곧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제 갈 길을 가던 에리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하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시 말해 보렴. 가주님께서 다치셨니?”
뛰다시피 걷는 에리카의 뒤를 따르며 침실 하녀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첫째, 부군께서 갑자기 각방을 선언.
둘째, 그 소식을 들은 가주님께서 노하심.
셋째, 가주님께서 그길로 부군 침실에 난입하시고 곧바로 고성이 이어짐.
넷째, 가주님께서 갑자기 주치의를 부르심.
“그래서 다른 하녀가 얀 님을 모시러 뛰어갔고, 저는 보좌관님을 모시러 온 것이어요.”
이렇게만 들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에리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걸음 속도를 높였다.
에리카가 더럽게 넓은 성을 욕하며 마침내 가주 부군의 침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얀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침실 앞에 모여 애꿎은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얀 님, 어째서 나와 계십니까? 가주님은 어떠신가요?”
“보좌관님, 그게…….”
얀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연 순간, 뜬금없는 웃음소리가 두꺼운 침실 문을 뚫고 들려왔다.
까르르라니.
에리카는 설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에리카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데려온 어린 하녀를 돌아봤다. 그러나 하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 많은 하녀가 조심스럽게 에리카에게 말했다.
“시모어 보좌관님. 그게…… 가주님께서 무서운 목소리로 얀 님을 부르시기에, 필시 사달이 난 줄 알았는데,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서……. 아무래도 두 분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이군.”
“……예.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두 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으니 벌을 내리셔도 할 말이 없어요.”
사용인들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무래도 두 분이 굉장히…….”
살벌하게 문을 노려보던 에리카가 잠시 심호흡하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이가 좋으신 모양이니, 다시는. 두 분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로 날 부르지 말도록.”
그러면서 그녀는 활짝 웃으며 사용인들을 돌아봤다.
얀을 비롯해 침실 사용인들은 에리카가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무서운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언제 웃었냐는 듯이 정색을 했다.
“자네들도 웬만하면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엔 그러려니 해. 두 분이 얼마 전 침대 머리를 부수신 걸 잊었나?”
세상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그녀가 그대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에리카는 그길로 서둘러 해리를 만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주의 침실과 기사들의 숙소는 터무니없이 멀었다.
안타깝게도 에리카가 언제나 해리를 기다리던 길목에 도착했을 땐, 간발의 차로 그가 그곳을 지나간 후였다.
“……X발! 못 해 먹겠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 아래에서 에리카는 아주 오랜만에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 * *
딱히 갚아 주려는 건 아니었지만, 에리카는 다음 날 일찍 가주 부군의 침실 문 앞에 섰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가주님―. 일어나십시오―!”
이른 아침, 에리카가 거침없이 가주 부군의 침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다소 무례해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일 많은 맥포이 가주의 보좌관은 종종 이렇게 직접 문을 두드려 가주님을 깨웠다. 하지만 오늘은 특히 심술이 가득했다.
에리카가 재차 소리를 지르려는데 불시에 무거운 침실 문이 끼이익 열렸다. 빼꼼 열린 문 사이로 가운만 걸친 노마가 보였다.
“시모어가 맥포이의 주인을 뵙습니다. 어젯밤 몸이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에리카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그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완전히 열이 내린 노마는 새벽녘에 잠시 침실을 빠져나와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 과정에서 사용인들 사이엔 어젯밤 그가 몸이 좋지 않아 그 난리가 났었다는 이야기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에구머니나! 그렇다면, 드디어 사랑싸움을 하신 건가?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딱이군!’
매일 밤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니, 그들은 두 분의 소란스러운 신혼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이제 괜찮다. 다만 가주님께서 어젯밤 날 간호하시느라 피곤하실 거야. 조금 이따 오겠나?”
노마는 그러면서 꿀이 떨어지는 눈을 하고 등 뒤를 돌아봤다.
에리카는 무의식적으로 노마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 끝엔 새하얀 이불에 둘둘 말려 형체도 보이지 않는 가주님이 있었다.
‘뭐가 보인다고 저렇게 웃는 거지? 발만 보이는데.’
정확히는 이불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가주님의 발만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소리 없이 자는지 모르겠어.”
이번엔 노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에리카는 덕분에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종종 악몽에 시달리는 가주님이 완전 숙면을 취하고 있다니 어딘가 맥이 탁 풀렸다. 그런데 단단히 사랑에 빠진 눈알을 하고 눈앞의 사람을 순식간에 없는 취급을 하는 노마는 그보다 더했다.
심술을 부릴 생각으로 가주님을 직접 깨우러 왔던 에리카는 도리어 제 기분이 잡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노마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만개한 미소를 띠었다. 기습적인 얼굴 공격에 에리카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이사 님은 내가 곧 깨울 테니 그사이 보좌관은 폴른 경을 보고 오면 되겠다.”
얼굴에 놀란 것도 잠시, 에리카는 벼락을 맞은 기분을 느끼며 노마를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해리 폴른이 왜 나와? 내가 저분에게 해리와 교제한다고 말했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가주님인가?’
그럴 리가. 에리카의 주인은 몹시 자기중심적이라 남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에리카는 가까스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시치미를 뗐다.
“아무래도 아치가 바인스 경에게 쉽게 마음을 줘서 속상한 모양이던데 자네가 한번 봐 줘야 할 것 같아.”
그러나 노마는 폭탄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낭랑한 목소리가 에리카의 귀를 때렸다.
“…….”
“누가 말해 준 것이 아니라 그저 눈에 보였을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
에리카가 눈썹을 까딱였다. 가주 부군은 마냥 순하지 않았다. 무해해 보이는 흰둥이의 탈을 쓴, 눈치 빠른 여우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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