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니콜라스 디아시.’
나는 <오필리아와 밤>에서 이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남자주인공 니콜라스 디아시는 이고의 저주로 노마가 사라진 후 여러 후유증을 겪는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고질적인 불면과 이따금씩 이유를 알 수 없는 열에 시달렸다.
어떤 약을 먹어도 아무리 고강한 성력을 들이부어도, 니콜라스의 열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이 떨어지곤 했다.
<오필리아와 밤>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니콜라스가 열이 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하나, 서술에 의하면 그 열은 결국 심리적인 문제, 뭐 그런 거였다.
노마 역시 저주와 봉인의 후유증으로 불면을 앓는 중이었으니, 오늘 갑자기 열이 오른 것도 그 후유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마는 오랜 시간 물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니 물에 빠지면서 과거의 정신적 충격이 되살아났다고 해도 놀라울 게 없었다.
노마가 겪을 일, 겪고 있는 일은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감기처럼 나을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단, 죽을병은 아니라는 것이군. 별 개같은 소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망할 소설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고마운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노마가 죽을병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고강한 성력을 타고난 것은 압도적인 회복력과 치유력을 가진 것과 같았다. 즉, 모든 질병에 면역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별안간 펄펄 끓는 노마의 손을 만졌을 때 나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주물럭거리던 노마가 불쑥 입을 열었다.
“피한 건, 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신께 열 하나 갈무리 못 하는 모자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뿐이니―.”
“…….”
“착각이라느니, 그런 말씀은 마세요. 속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마의 얼굴은 몹시 원통하고 서글퍼 보였다.
순식간에 대역죄인의 마음이 된 나는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서 ‘착각이라고는 안 했는데’라고 딴지를 걸면 정말 그를 울릴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노마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부족해서 당신께 아직 믿음을 드리지 못한 탓이지만 그래도―.”
급기야 그의 영롱한 금안에 눈물이 아롱아롱 맺히더니.
“마음이 아파요.”
‘오, 안 돼.’
“제 마음을 계속 이렇게 모른 척하셔도 좋습니다.”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예 없는 취급은 하지 마세요. 착각이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노마의 손이 한층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억울한 모양이었다. 열 오른 그는 평소보다 더 솔직했고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정말 개쓰레기인가 보다.’
동시에 나는 굉장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건 내가, 내가 잘못했소. 미안합니다. 그러니…….”
내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노마의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내 손엔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주가 된 이래로 딱히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 본 일이 없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색하기만 했다.
무엇을 부정하는지는 몰라도 노마가 말없이 도리질을 쳤다.
나는 그 반응에 아찔함을 느꼈지만 일단 이 뜨거운 인간을 눕히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서 있지 말고 눕는 게 좋겠어요.”
버티고 서 있는 것이 힘들긴 했는지 노마는 도리질을 치면서도 얌전히 내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웠다.
그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나를 올려다봤다.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또다시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의외로 노마가 먼저 정적을 깼다.
“아이사. 감기는 아닌 듯하지만, 혹시 모릅니다. 당신은 이만 개인 침실로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
“그러니 날 매정한 부인으로 만들 생각 마시고 가만히 누워 있으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노마는 두 번 권유하지 않았다. 그가 지쳤는지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완전히 눈을 감지 못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열을 잴 요량으로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내 손이 닿자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여전히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에 인상을 쓰며 물었다.
“소리는.”
“지금은 안 들립니다.”
아까보다 조금 머뭇거린 끝에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
“……그게 당신더러 또 죽어 달라고 했습니까?”
“네. 하지만 무시했습니다. 전 평생 아이사 옆에 있기로 맹세했으니까.”
“……잘하셨습니다.”
“네.”
“잠은. 못 들겠습니까?”
“……네.”
노마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나직하게 대답했다.
‘역시 나는 그런 건 안 되나 보군.’
<오필리아와 밤>을 보면 니콜라스는 오필리아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금방 열도 내리고 잘만 잠에 들고 그러던데.
역시 그런 기적 같은 일은 낭만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듯했다.
펄펄 끓는 노마 디아시는 잠에 들기는커녕 말 몇 마디 나누자 어느새 말똥하게 눈을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째 점점 초롱초롱해지는 것이, 꼭 몸이 아픈데도 잠자기 싫은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역시 의원을 한번 보는 게 어때요.”
“소용없을 겁니다. 그리고 전 당신이 이렇게 옆에 있어 주시는 편이 더 좋은걸요.”
노마가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말했다.
오늘의 죄인인 나는, 이 순간 그의 발닦개를 자처하고 있으므로 순순히 그에게 맞춰 줬다. 노마의 열이 <오필리아와 밤> 속 니콜라스의 경우와 같다면 실제로 별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그럼 물수건이라도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그보다 손을 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
“당신 손은 시원하니까 잡아 주시면 열이 내릴 것 같아요.”
뻔한 개수작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마를 내려다보자, 그가 잽싸게 덧붙였다.
“……내가 남들보다 체온이 낮은 편이긴 하지.”
개수작이 뻔했지만 상대는 아픈 사람이었으니 나는 모른 척 노마의 손을 잡아 주었다.
와중에 손을 잡은 것만으로 날 바라보는 노마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반짝거리는 듯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뻔했다.
그렇게 내 손을 만지작거리길 한참, 노마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정확히는 원하는 게 있는 눈빛이었다.
“말하세요.”
“……음. 안아 주실 수도 있나요?”
노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결국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세상에서 가장 원망스러운 눈으로 볼 땐 언제고, 눈물 흘리게 한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참 소박하지 않나. 기가 찼다.
“아픈 거 맞습니까?”
“네. 너무 어지럽습니다. 안아 주시면 조금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내가 낄낄거리며 묻자, 노마는 한껏 아픈 척을 하며 속눈썹을 떨었다. 그의 일품 연기에 다시 한번 막을 새 없이 웃음이 나왔다.
“……어지러우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여태 가련을 떨고 있는 노마를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곤 느릿하게 상체를 숙여, 양팔을 벌린 그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합방 효과인지는 몰라도 그와 마주 안기까지의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가 안아 달라고 했으니 그러려고 했지만, 새삼 거대한 그를 안아 주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노마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다.
나는 놀랍게도 안아 달라는 낯부끄러운 주문에 아무런 거부감을 못 느꼈다. 하지만 이때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그와 마주 안고 한 침대에 눕는 것이 익숙한 것을 넘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결혼한 후엔 늘 이렇게 껴안고 자서 그런지 곧 수마가 몰려왔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잠에 들기 전,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물에 빠져 열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니.”
“네. 맞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당신껜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습니다.”
“……지금도 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과 마주 안고 있으니 알겠습니다. 역시 당신부터 볼 것을 괜히 욕탕부터 갔습니다.”
그 말에 심장이 철없이 속도를 높였다. 두근두근. 평소보다 높은 심장 박동을 유지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내가 막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기 직전, 노마가 불시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 당신이 그사이 혼자서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련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쩐지 그의 가슴팍에 팍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아, 나는 허겁지겁 상체를 일으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구슬픈 목소리와 다르게 방글방글 웃고 있는 노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허. 장난치지 말고 눈이라도 감으세요.”
“네.”
내가 왼 눈썹을 까딱이자, 노마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꼭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러곤 커다란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 왔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그의 가슴팍에 누웠다.
다시 잠에 들기 전, 이번엔 내가 불시에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
“저도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뭘요.”
“등 돌린 거요.”
“……그래. 그게 생각보다 기분이 안 좋더군.”
노마가 날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나는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어쨌건 맥포이가 되어서 맹세를 어길 순 없지. 한 번 당신을 울렸으니 이 일은 두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완전히 잠에 빠지기 전, 나는 잠결에 온갖 멋진 척을 하며 그에게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대사를 날렸다. 여전히 열이 펄펄 끓는 주제에 노마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날은 맥포이 가주 부부가 처음 손만 잡고, 아니, 껴안고만 잔 역사적인 날이었다.
* * *
한편 별것 아닌 일로 날뛴 신혼부부가 얼마 안 가 시시덕거리며 잠들쯤, 바깥은 여전히 초긴장 상태였다.
가주 부군께서 처음 각방을 선언했을 때, 사용인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한데 모여 의논한 끝에 결국 뽑기에서 장렬하게 패배한 하녀가 가주님께 부군의 각방 선언을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하녀는 눈을 질끈 감기 전, 가주님의 낯이 와작 일그러지던 모습을 보고 보통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곧 세상 살벌한 표정을 한 가주님이 그길로 공용 침실을 박차고 나갔을 땐, 그녀는 마음속으로 파국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사가 노마의 개인 침실에 난입한 직후, 격앙된 그녀의 목소리가 두꺼운 문을 뚫고 나왔다. 하나같이 다닥다닥 문에 들러붙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용인들은 점차 사색이 되었다.
얼마 안 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가주님의 사자후가 복도를 울렸다.
지레 놀란 사용인들이 후드득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주치의 얀을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안에서 큰 사달이 났구나 싶었다. 가장 어린 하녀가 얀을 데려오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모어 보좌관님! 너는 시모어 보좌관님을 당장 모셔 와라!”
동시에, 가장 연배 있는 하녀가 맨 끝에 서 있던 하녀에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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