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물론 그 이후로 열이 오른 건 처음이었다. 좀처럼 열이 다스려지지 않자 노마는 적잖이 당황했다.
의원과 신관이 찾아와 성력을 들이부어 주어도 열이 내리질 않던 어린 날과 같았다. 한번 오르기 시작한 열을 잠재울 수 없었다.
노마는 열이 오른 모습으로 아이사를 봐도 될지 고민했다. 이래 봬도 그는 절찬리 아내를 꼬시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환청에 시달린 끝에 물에 빠져 열 하나 갈무리하지 못하는 모습.’
제법 신랄하게 자신의 상태를 정의한 노마는 피눈물을 흘리며 일단 제 방에 가는 것을 택했다.
물론 아이사라면 물에 빠져 열이 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가엽게 여길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이유를 필요로 하니, 옆에 있고 싶다면 이 방법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새신랑은 미친 모습보다는 되도록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연민의 대상보다는 연애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노마가 보기에 그녀는 자신을 이미 충분히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열도 열이지만 차림새 역시 아이사를 만나기 적절하지 않았다. 아이사의 벽이 견고한 만큼, 노마는 그녀가 아름다운 것에 맥을 못 추는 점을 파고들기 위해 최근 겉모습에도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
노마는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봤다. 전신이 축축하고 군데군데 진흙이 묻어 있었다.
답은 나와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잠시만 참자. 차림새만 바로 하자. 그사이에 어떻게든 열도 내리는 거야.’
예법에 어긋나는 차림새 핑계를 대며 황급히 자리를 피한 것은 순전히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쁜 이이사가 몸소 마중을 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기도 했다.
물론 노마가 마구간에서 곧장 자신의 방에 가지 않았다면, 아이사가 마중을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쩔 수 없지만 꾀죄죄한 모습으로나마 그녀를 맞이했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방으로 튄 노마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보송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다행히 아까보다 열이 덜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아이사와 가까이 있어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비로소 안심한 노마는 아이사의 집무실에 가기 위해 가뿐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석찬 자리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한다는 적절한 구실이 있었다.
그러나 노마는 아이사의 집무실에 가지 못했다. 아치가 감기 기운이 있어 석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치의 몸이 안 좋은 것이 모두 제 잘못인 것만 같아, 그는 결국 아이의 침실로 향했다.
“고, 고모부!”
엄격한 얀의 처방대로 침대 형을 선고받은 어린이는 쓸쓸하던 차에 고모부가 방문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아치가 세상 행복하게 웃자, 노마는 아이사가 보고 싶다는 마음에 잠시 방향을 고민한 자신이 몹시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아치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하하 호호 떠들길 한참, 순식간에 석찬 시간이 되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잘 가요, 고……모부.”
아쉬운 티가 팍팍 나는 아치를 보고 푸스스 웃은 노마가 아치의 이마에 느릿하게 손을 얹었다.
아치는 열을 재기 위해 다가오는 고모부의 손이 어째 평소보다 둔하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손이 이마에 얹어지고, 눈을 깜빡이던 아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치가 손을 올려 제 이마 위에 있는 노마의 손을 더듬었다.
“그런데요.”
“응.”
“제 이마보다 고모부 손이 훨씬 뜨거운 거 같은데요.”
“응……?”
“이제 보니 볼도 좀 빨갛고 행동도 평소보다 묘하게 느려요. 아파요?”
“아프진, 않은데.”
“기뻐서 그런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아치는 오늘 티타임에서 노마가 장난스럽게 한 말을 기억했다.
‘역시 쉽게 가라앉을 열이 아닌가 보군.’
제법 날카로운 어린이의 지적에 노마는 방긋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얀을 부를까요?”
“……뜨거운 물에 오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오늘은 고모부가 좀 더 옆에 있으마. 이만, 자렴.”
석찬이 시작되면 끝이 날 때까지 아이사의 에스코트는 부군인 노마의 몫이었다. 노마는 석찬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결국 그는 눈물을 삼키며 만찬에 불참했다.
이후 아치의 방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노마의 상태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검기나 성력을 다루는 신체 예민한 사람들이 아닌 이상, 겉보기에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웠다.
다만 그의 피부는 무척 뜨거워, 닿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합방에 들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새 열은 걷잡을 수 없이 올라 노마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노마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최초 각방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사는 합방 횟수를 줄이길 원하기도 했으니 괜찮겠거니 싶었다. 열이 올라 판단력이 흐려진 노마는 그녀가 각방 선언을 두고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
결혼 후 처음 사용하는 개인 침실은 낯설었다. 노마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그러길 한참, 옆방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가주 부부의 개인 침실 사이에는 부부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 침실이 있었다. 당연히 노마의 개인 침실 옆방은 가주 부부의 공용 침실이었다.
옆방의 기척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노마가 멀거니 벽을 바라봤다. 저 벽 너머, 공용 침실에 아이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씻지 말고 그녀부터 볼걸.’
노마는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곧 잠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아무리 열이 올라도 잠들지는 못했다. 수면을 피하는 건 생존 본능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오랜만에 이고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모자라, 평소와 다르게 이고가 배신한 날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 것도 한몫을 했다.
이런 날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열이 오른 안구가 타들어 갈 듯했으나 눈을 감으면 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쉽게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아니야. 역시 이런 모습은 꼴사납다.’
그러니 각방을 선언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노마는 오매불망 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 아이사의 기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롱한 와중에도 노마는 온 신경을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복도로 나가는 것을 보아 그녀의 개인 침실에 가는 듯했다.
먼저 각방을 선언했지만, 곧 그녀와의 거리가 벽 두 개가 된다는 사실에 노마는 퍽 서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사의 기척이 노마의 침실 방문 앞에서 멈췄다. 숨을 죽인 노마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방문을 바라봤다.
“납니다. 안 자는 거 아니까 문 열어 보세요.”
그 순간 그녀를 본다는 기대감이 모든 잡생각을 이겼다. 노마는 앙투아네트보다 재빠르게 방문 앞으로 날아갔다.
성질 급한 나는 재차 입을 벌렸다.
“내가 열고 들어가―.”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얼굴만 겨우 보일 정도로 감질나게 문틈이 벌어진 것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 좁은 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물기 어린 금안, 식은땀으로 이마에 눌러 붙은 머리칼.
식겁한 나는 급한 대로 문틈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그대로 억지로 몸을 밀고 방에 들어가자, 노마는 와중에 무거운 문을 받쳐 주며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겨우 문을 박차고 그의 침실에 들어왔으나 촛불 하나 없는 방 안은 어두웠다. 덕분에 그새 멀리도 도망간 노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노마가 선수를 쳤다.
내가 발을 떼기 무섭게 그가 내게서 팩,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일순 나는 피가 거꾸로 솟고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노마가 저런 식으로 등을 보인 적이 있었나? 저대로 날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잠시만, 거기 멈춰 주세요.”
그의 거부는 내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최악의 가정은 순식간에 가장 높은 확률의 가정이 되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역시 말로만 피난처 삼은 게 아니라고 했을 뿐인가?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날 따라오면 후유증이든 뭐든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물에 빠져 보니 그렇지 않아서 실망이라도 한 건가?
짧은 사이에 최악의 가정은 한층 구체적인 형체를 갖췄다.
“왜 나를 피하지?”
“아이사, 제가 지금―.”
“피난처 삼은 게 아니라며.”
할 말이 많은 나는 노마의 말을 멋대로 잘라먹고 말았다.
그가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지금 내 눈엔 그런 게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속사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꺼지라고 해도 옆에 붙어 있겠다더니, 눈앞에서 등을 돌리는 건 뭐지? 결혼한 지 한 달 좀 지나니까 정신이 좀 들었나? 슬슬 후회가 돼? 하지만 난 말해 줬어. 이건 당신이 선택한 거라고.”
마침내 나와 그 사이는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가 되었다. 거리가 좁아 들자 그의 표정 따위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곧 길 잃은 강아지라도 된 양 서러움이 가득한 금안과 마주쳤다.
그의 애처로운 눈빛에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짐짓 엄한 얼굴로 그에게 경고를 보냈다. 진짜 서러운 쪽은 나였다.
“그런 얼굴을 해 봤자 안 통합니다.”
“아이사. 먼저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게 뭐든 다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나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도 그럴 게, 보라. 이쯤 되면 손이라도 잡아 올 법한데 지금의 그는 가만히 있지 않나.
노마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날 피한 것을 모를 줄 압니까? 등까지 돌렸으면 꼴 보기 싫다는 뜻 아닌가.”
다소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으나, 머뭇거리는 그의 손을 보자 나도 모르게 비아냥이 와다다 튀어 나갔다.
와중에 노마가 목석처럼 가만 서 있는 것이 거슬려 시선은 자꾸만 그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손마저 내게 등을 돌린 것만 같아 눈이 돌았다.
‘계속 착각에 빠져 살지 그랬나. 그런 얼굴을 한다고 내가 집에 보내 줄 줄 알아? 웃기지 마, 내가 누군지 알고. 이제 당신은 어디도 못 가.’
“아이사,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제가 지금 열―.”
“이미 늦었어.”
멋대로 손이 움직였고, 나는 충동적으로 노마의 손을 낚아챘다.
“……?”
순간, 사람 손을 잡은 것인지 불덩이를 잡은 것인지 헷갈려 퍼뜩 시선을 내렸다. 뜨끈함을 넘어 뜨거운 것은 분명 노마의 손이 맞았다.
그의 손을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망연하게 입술을 벌린 노마의 얼굴이 보였다.
“……열이 납니다.”
노마가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 위로 푸시시 김이 나는 듯했다. 그 모습은 언뜻 수치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왜…… 당신이 어떻게 열이 날 수 있지? 성력은 뒀다가 어디다 쓰는 겁니까.”
상상도 못 한 상황에 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나 당황도 잠시, 식겁해서 노마의 볼을 더듬기 시작했다. 여기도, 저기도 불덩이였다.
‘이 정도까지 열이 오른 걸 왜 아무도 몰랐지?’
자세히 보니 몸이 전체적으로 붉은 것 같았다. 그가 등을 돌렸을 때보다 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얀―!!”
“감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 한 번 이런 적이 있는데 그때도 성력이나 약으로 해결되지 않았어요.”
내가 사자후로 냅다 주치의의 이름을 부르고 보자, 노마가 다급하게 내 양손을 그러모으고 기도하듯이 속삭였다. 어쩐지 그가 평소보다 느릿하게 말하는 것만 같은 것은 내 착각이 아닌 듯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아마 내일이면, 그때도 그랬어요.”
“그게 무슨…….”
나는 그게 무슨 죽을병 같은 발언이냐고 물으려다 말끝을 흐렸다. 정체 모를 열이 나는 이유가 뭐 때문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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