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아기 맹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도개교가 보이는 창문을 바라봤다. 내 시선이 반사적으로 앙투아네트가 바라보는 쪽을 향할 때였다.
집무실 문 너머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 문틈으로 어린 하녀가 들어왔다.
순간 나의 온 신경이 어린 하녀에게 쏠렸다.
어린 하녀는 부담스러운 내 시선을 감내하며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그녀가 에리카의 비서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곧, 죽상을 하고 있던 에리카의 비서가 드디어 살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가 화색을 띠고 날 쳐다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왔구나.’
“가주님! 두 분이 돌아오셨답니다!”
에리카의 비서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보면 10년 만에 재회하는 가족의 귀환을 알리는 줄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를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소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가주님!”
등 뒤로 글렌이 식겁한 목소리로 날 불러 댔지만, 나는 이미 복도를 씩씩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치의 정원에 향했을 때처럼 발걸음엔 점점 속도가 붙었다.
마주치는 사용인들마다 바쁘게 걸어가는 날 보고 해괴한 얼굴을 했으나 당장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 땐, 마음 같아선 두 칸씩 뛰어 내려가고 싶었다. 마침내 계단이 끝나고 현관홀 입구에 와글와글 사람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남들보다 작은 아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치는 마른 천을 들고 있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뒤로 각자 마른 천으로 몸을 털고 있는 맥포이 기사들이 보였다.
그러나 내 눈동자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이상하다. 이렇게 안 보일 리가 없는데.’
어딜 가나 튀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눈을 굴려도 저 중에 반짝이는 은발이 없었다.
맥이 탁 풀림과 동시에 앙투아네트 덕분에 멈췄던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는.’
그렇게 복잡하게 고민하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었다. 실은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 종일 노마가 보고 싶었구나.’
나도 모르게 눈으로 노마부터 찾은 순간,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니. 이래서야 꼭.’
머릿속에 시뻘건 경보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젠장할.”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고모?”
깨달음으로 인한 충격은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다. 아치가 날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주변이 낱낱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쫄딱 젖은 아치와 기사들이라든가.
‘젖어?’
느려졌던 걸음에 대번에 속도가 붙었다. 내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가가자 아치를 마른 천으로 둘둘 말던 하녀들이 허리를 굽히고 눈치껏 뒤로 물러났다.
“그 꼴은 또 뭐냐.”
내가 한껏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아치를 추궁했다. 그러나 아치는 쉽게 졸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당당하게 날 마주 보는 아치와 잽싸게 바닥에 이마를 박은 제2기사단을 번갈아 보았다.
“당당한 걸 보니 네가 사고를 친 것 같진 않구나.”
“나 아니야. 고……모부야.”
아치는 다시 생각해도 속상하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고모부라면 환장하는 어린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사고를 친 노마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나는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폴른 경. 부군은 어디 가셨나.”
해리가 고개를 들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내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부군께선 물에 젖은 모습으로 가주님을 뵙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니, 몸가짐을 바로 한 후에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뭔…….”
무슨 핑계가 그렇게 허접스럽지?
기가 막혔다. 분마다 한 번씩 에리카의 비서를 닦달한 만큼, 내가 내려올 거란 사실을 사용인 중 누군가가 당연히 전했을 텐데. 그런 핑계를 대며 사라졌다고?
내 기색이 사나워지자 슬슬 눈치를 보던 아치가 끼어들었다.
“내가 고모한테 이른다고 해서 그럴지도 몰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고모부가 물속에 들어가서 한참을 안 나왔어. 위험한 행동을 했으니까, 내가 고모한테 다 이른다고 했거든.”
고모부 편을 들어 주려고 끼어들었던 아치는 군락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서러워 미간을 잔뜩 구겼다.
물속.
앞뒤 다 자른 아치의 설명은 다분히 어린이의 관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결혼 전, 반쯤 정신이 나간 노마가 내 침실에 들어와 털어놨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제발 죽어 달라, 했습니다. 죽어 줬으면 좋겠다고요.”
노마는 물속에 봉인되어 있는 내내 죽어 달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나조차 이런 기분이 드는데,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떨지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폴른 경. 그대가 보기에 어땠지?”
“보기엔, 평소와 같으셨습니다.”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에 해리가 눈치 좋게 대답했다.
평소와 같다라. 적당히 얼버무린 듯한 말이었지만, 입발림 소리 하나 못 하는 해리 폴른은 날 안심시킨답시고 적당히 둘러댈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잠시간 침묵하자 에리카가 한 발짝 다가와 물었다.
“가주님.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
나는 탐탁잖은 얼굴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기사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잠시 고민을 했을 뿐이지,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눈길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집무 마저 볼 것이다. 폴른 경은 따르라. 자세히 설명해.”
짧은 정적이 흐르고 내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해리를 제외한 기사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동시에 에리카가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나는 그 눈빛을 가볍게 무시했다.
“넌 이만 쉬거라.”
그러곤 아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한껏 무심한 척을 하며 퇴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이 소란에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또는 변덕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 머릿속은 지금 어느 때보다 요란했다.
아치의 입에서 ‘물속’이 나온 순간 오랜만에 엄지손톱을 물어뜯을 뻔했을 정도였다. 머릿속으론 이미 몇 번이고 노마가 몸을 씻고 있는 욕탕에 난입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빠르게 후퇴하는 이유는 이대로 있다간 정말 이대로 노마를 찾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기어코 노마를 찾아가면 정말 하루 종일 그가 보고 싶어 쫓아다닌 것만 같지 않나.’
노마가 보고 싶었다는 점을 인정하긴 했지만, 이 이상 유난스러운 짓을 했다간 회복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 것 같단 촉이 왔다. 나는 꽤나 이기적인 사람이라 이런 와중에도 내 생각부터 하고 본 것이다.
후퇴! 후퇴!
오래된 본능이 주장하는 대로 나는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후퇴는 후퇴대로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해리가 보기에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어차피 곧 석찬 자리에서 볼 테고.’
마지막으로 자기 합리화까지, 완벽한 찌질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마는 장가를 잘못 온 것 같았다.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은 유독 멀게 느껴졌다.
내 평생 밥시간을 이렇게 고대한 적이 있을까.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오늘의 석찬은 인생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저녁 식사가 되었다.
맥포이 가주는 부군과 조카에게 오늘 하루만 벌써 두 번 바람을 맞았다.
“……오늘이 날인가.”
나는 텅 빈 테이블 의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티타임에 이어 석찬까지 바람을 맞자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답지 않게 석찬을 기다린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사이 짬짬이 노마가 멀쩡하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그의 상태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난스럽지 않게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텅 빈 테이블 의자를 노려봤다.
아치가 안 올 것은 알고 있었다. 상당히 무리한 어린이는 역시나 감기 기운이 있었고, 얄짤없는 주치의 얀의 처방대로 내일까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럼 노마는?
그는 만찬 직전, 아치의 병 수발을 자처하며 불참을 선언했다.
아치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은 맞지만 정말 아픈 건 아니었기 때문에 순간 내 머릿속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나는 언제나 가장 최악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경우, 노마가 물에 빠진 충격으로 문득 그놈의 사랑이고 뭐고가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상황이 있다. 어째서 이게 최악이라고 생각했는진 나도 모르겠지만.
한참 노마의 자리를 노려보던 내가 마침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해리에 의하면 아치가 노마 때문에 굉장히 놀랐고, 그 때문에 노마가 무척이나 미안해했다고 했으니. 그래, 석찬을 제치고 병 수발을 들 수 있지.
나는 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참 나, 병 수발 들러 갈 정도면 괜히 신경 썼군. 아주 멀쩡한 모양이야, 하!”
나도 모르게 간간이 혼잣말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진 겉으로나마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신경 줄도 이만하면 팽팽했다.
‘어차피 침실에서 마주칠 텐데, 뭐.’
자연스럽게 노마의 상태를 확인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 후 남은 업무를 처리할 때까지만 해도 내 신경 줄은 팽팽했고 인내심 역시 넉넉했다.
오늘의 집무를 마치고 노마와 함께 쓰는 공용 침실에 도착했을 때, 매일 먼저 와서 날 기다렸던 노마가 보이지 않아도 참을 만했다.
그가 오늘 낮에 남몰래 서재에 찾아와 ‘오늘은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속삭인 주제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니까 장정 다섯은 굴러도 될 것 같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그를 기다릴 때도, 난 참을 수 있었다.
똑똑.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하녀가 무척 송구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말했다.
“가주님. 부군께서 오늘 일찍 잠에 드신다고 개인 침실에서 주무시겠다 하십니다.”
팽팽한 신경 줄이 한순간에 끊어지고 인내심에 가뭄이 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디 계시냐.”
일찍 뭘 들어? 여전히 잠 못 든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 앙큼한 인간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나를 피하는 중인 게 확실했다.
* * *
ㅎㅂㄹㄱ
노마는 결코 혼나는 게 두려워 아이사를 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성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사부터 만나려 했다. 그녀는 언제나 바쁘니 마중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니 당장 집무실이라도 찾아갈 생각이었다.
방해가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노마는 아이사가 간절했다. 한 손이라도 좋으니 당장 한 번만 잡고 싶었다. 이고의 부름에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고, 그녀를 마주 보며 마음속으로나마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웬걸.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마는 아주 오랜만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정말 열일까 싶었지만 말에서 내리자 더욱 확실했다. 미열이었지만 분명 열이 있었다.
타고난 성력 덕분에 앓는 일이 없었던 노마에겐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난생처음 앓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니콜라스를 낳고 얼마 안 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딱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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