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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96화 (96/139)

96.

다리를 건너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선 노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허공을 바라봤다.

“……고모부?”

아치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노마가 그 목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아치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틀었다. 아치는 노마와 분명 눈이 마주쳤으나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다리 한가운데 멈춰 서 있는 노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치는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 소년의 얼굴이 불안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반대편에 있던 폰이 이상을 직감했다. 그가 다리 한가운데를 향해 몸을 날리기 무섭게, 노마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경!”

“고모부!”

경악한 폰이 소리쳤고, 한발 늦게 아치가 노마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폰의 손끝이 노마에게 닿기 전, 간발의 차로 풍덩―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노마가 연못에 빠졌다.

폰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노마의 뒤를 따라 물속에 몸을 던졌다.

‘제길, 방심했다. 어디지? 어디…….!’

폰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눈을 부릅뜨고 득달같이 좌우를 살폈다. 이상하게 노마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연못 안이 생각보다 훨씬 어두컴컴하고 넓기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곧장 쫓아왔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그러나 어두운 것과 별개로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광활한 물속엔 꼭 자신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폰은 대번에 혼란에 빠졌다. 다음으로 장난기 많은 노마가 혹시 자신이 뒤따라 입수한 그 짧은 순간에 물 위로 올라간 건가 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 끝에, 황급히 수면 위로 올라갔다.

“바인스 경, 어째서 혼자야? 고, 고모부는?”

하지만 폰을 기다리는 건 혼비백산한 아치 도련님의 얼굴이었다.

“무슨. 디아시 경, 그러니까 노마 님, 안 올라오셨습니까?”

아치가 고개를 저었다. 일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게 도대체.”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어도 물은 아직 차가웠다. 추위에 창백하게 질린 폰이 공황에 빠졌다. 아치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폰이 황급히 다시 물속에 들어갔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해리가 폰을 따라 물에 뛰어들려는 아치를 재빠르게 붙잡았다.

해리의 품 안에서 아치가 발버둥을 쳤고, 해리는 침착하게 기사들에게 가주 부군을 찾을 것을 명했다.

* * *

“노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노마에겐 가장 익숙한 목소리기도 했다. 오직 이 목소리 하나만 듣고 산 세월이 10년이 넘었다.

“노마. 제발.”

위태로운 음성이 다시 한번 노마를 불렀다. 결국 노마는 오랜만이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습관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죽어 주라.”

절박한 부탁에 노마의 매끈한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동시에 노마는 이고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최근엔 눈을 감고 있을 때조차 이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물론 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저도 모르게 이고의 목소리를 따라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것은 여전하긴 했지만.

노마는 한동안 들리지 않던 이고의 목소리가 왜 하필 지금 들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저 목소리가 ‘진짜’ 이고가 아닌 환청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때 어디선가 ‘고모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고모부라고 부르는 존재는 세상천지에 하나였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노마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자신과 같은 금안에 흑발의 소년이었다.

눈앞에 어린 니콜라스가 있었다.

노마는 숨을 멈췄다. 삽시간 시공간이 이고가 자신을 배신한 그날로 둔갑했다.

오래된 충격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꿈에서라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목을 붙들고 있는 형체는…….

“이고.”

노마는 검은 가루가 뭉쳐져 있는 것만 같은 불분명한 형체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잊고 있던 오래된 친구의 이름을 뱉어 낸 순간, 노마는 몸속에서 심장이 뽑히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껏 이고가 배신한 날이 이토록 선명하게 펼쳐졌던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노마.”

눈앞에 그날이 펼쳐지자 노마는 순간 그날의 그가 되어, 자신을 부르는 이고의 목소리가 환청이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곧 심장이 쿵쿵,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니콜라스에 대한 오랜 죄책감은 그 애를 구해야겠다는 본능을 낳았다.

노마는 무의식중에 니콜라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니콜라스를 향해 손을 뻗고, 다리를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감각을 느꼈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이어 차가운 물속에 있는 것처럼 추위가 몰려왔다.

‘아. 이건 꼭.’

노마는 이 감각이 오랜 시간 봉인되었을 때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고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노마, 죽어 주라. 제발 죽어 줘. 너만 없으면.”

“소중한 친구라고 했잖아. 그러니 나를 위해서 죽어 줘.”

“너만 없으면 그녀가 날 봐 줄 거야.”

“제발 죽어 주라.”

검은 공간을 유영하며 노마는 한동안 가만히 저주와 같은 이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이미 들은 적 있는 것들이었다.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세뇌와 같은 반복이 시작됐다.

모든 것이 봉인되었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노마가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마는 이고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않았다. 그는 가만 눈을 감고 이고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죽어 줘.”

“미안. 이고.”

노마가 처음으로 이고의 부름에 대답했다.

“제발. 나는 네 소중한 친구잖아. 나를 위해서―.”

“너는 소중한 친구지. 전이라면 널 따라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 결국엔 널 따라갔을지도 모르지.”

“죽어. 죽어 줘.”

“넌 내게 소중한 친구고, 소중한 네 부탁을 못 들어줄 것도 없었을 테니까.”

“부탁해.”

“하지만 이젠 안 돼. 나는 아이사 옆에 있고 싶다. 그녀가 살고 싶다고 하셨으니 나 역시 살아야지 않겠어.”

“노마. 죽어 줘.”

“난 죽을 수 없어. 죽기 싫다.”

“죽어.”

“……결국 나는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들어주지 못하겠구나. 네 말대로 나는, 네게 한 순간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나 봐.”

“죽어. 죽어 주라. 나를 위해서―.”

“네겐 미안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노마.”

“하지만 이고, 내 세상은 이제 이곳인걸.”

그 말을 끝으로 노마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난 단순히 연못에 빠진 것이지. 네게 묶여 있던 시간은 모두 지난 일이라는 걸 안다.”

동시에 철판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는 듯,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끔찍한 소리는 이내 기다란 이명이 되었지만 노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드디어 어렴풋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응시했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물속이 분명했고, 수면 위로 미약한 빛이 어른거렸다.

‘어서 돌아가야지.’

수면 밑바닥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고를 두고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노마는 망설임 없이 수면 위를 향해 물을 갈랐다.

더는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 아이사가 보고 싶었다.

10분 남짓 노마가 사라진 연못 속을 헤매던 폰은 급기야 눈물이 났다.

‘기사 실격이다. 아무리 최근에 괜찮아 보였다고 해도 그렇지. 정신이 온전치 않은 호위 대상을 두고 방심하다니. 멍청한 놈, 일을 어쩌면 좋아.’

와중에 또 점점 산소가 부족했다. 폰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재차 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마가 서 있던 다리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며 자괴감을 느꼈다. 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눈앞이 흐렸다.

“바인스 경, 정신 차리십시오. 이만 교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머리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해리 폴른이 기다란 로브를 벗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리는 좀처럼 다리 위를 떠나지 못하는 도련님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해진 만큼 그의 표정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누구보다 침착했다.

하지만 폰은 선뜻 물속에서 나올 생각을 못 했다. 그가 울상을 하고 수면을 노려봤다.

바다도 아니고 연못에서 사람이 사라지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좀처럼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이 연못은 실제로 성력이 깃들어 있지 않으며,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 역시 들어 보질 못했습니다. 가주 부군께선 분명 연못 속에 계실 것입니다. 제가 찾아볼 테니, 도련님을 잠시 부탁합니다.”

해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물이 잔뜩 고인 눈을 거칠게 비볐다. 감정이 아닌 효율을 따져야 할 때였고, 울고 있을 때는 더더욱 아니었다.

심지어 해리의 옆에 돌상처럼 묵묵히 서 있는 저 조그마한 도련님도 울고 있지 않았다.

아치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시커먼 물 위를 노려볼 뿐이었다. 물론 그 모습은 침착해 보이기보단 너무 놀라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굳은 것에 가깝긴 했다.

‘그래, 정신 차리자. 폰 바인스. 내가 여기서 울면 어떡해. 디아시 경은 ‘디아시’다. 물속에 몇 분 있는 걸로 돌아가실 리 없어.’

폰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입수 준비를 마친 해리가 허리를 굽혀 폰에게 손을 내밀다.

“감사합니다, 경.”

매너가 넘치는 해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폰이 그의 도움을 받아 다리 위로 오르려 할 때였다.

“부군…….”

“예?”

폰의 손을 잡아 주던 해리가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은 꼭 귀신을 본 사람 같았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얼굴이 얼빠진 사람처럼 풀어지자, 폰은 해리가 왜 저러나 싶었다.

해리의 시선은 폰의 등 너머에 있었다. 평소에 표정 하나 없는 양반이 도대체 뭘 보고 저렇게 놀랐나 싶어 폰은 뒤늦게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놀란 해리의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이 먼저였다.

“뭔, 억!”

해리의 손에 의지하던 폰이 빠르게 중심을 잃고 순식간에 뒤로 나자빠졌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풍덩―! 하는 요란한 소리가 폰의 입수를 알렸다. 불시에 물에 빠진 꼴이 된 폰이 볼썽사납게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그때 누군가 불쑥 손을 뻗어 간절하게 퍼덕이는 폰의 팔을 잡아 물 바깥으로 끌어 올렸다. 물에 빠진 건장한 기사를 한 팔로 들어 올리는 상대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어흑, 콜록……! 콜록!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짧은 사이 연못 물을 왕창 먹은 폰은 쉽게 정신을 못 차렸다. 그가 연신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며 기침을 했다.

폰은 제 팔을 잡아 준 사람이 맥포이 기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예의 바른 신입 기사는 은인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생각보다 깊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딘가 푹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폰은 귀를 의심하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봤다. 평소와 다르게 묘하게 나른했지만 이 목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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