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95화 (95/139)

95.

감탄사에 가까운 폰의 중얼거림에 아치가 물었다.

“디아시엔 이런 연못이 많아?”

“네. 디아시의 정원은 좀 특이합니다. 원래도 지형상 연못이나 줄기가 가는 하천이 많은데, 인위적인 것을 싫어한 선조들이 그것들을 메우지 않고 전부 남겨 두셨거든요. 요정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죠.”

폰은 거대한 나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람 손이 잘 닿지 않아서 그런지 디아시 영지보다 오히려 이곳이 좀 더…….”

“좀 더?”

“진짜 소원을 이루어 줄 것처럼 생기긴 했네요.”

폰이 멍한 얼굴로 덧붙이자, 그걸 듣고 있던 아치가 한발 늦게 숨이 넘어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바보 취급이라 폰이 살풋 미간을 구겼다.

“바인스 경도 참……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진짜 소원이 이루어질 리 없잖아?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

세속적인 발언을 한 열두 살의 표정은 새삼 악당 같았다.

폰은 아치와 놀 때 잃어버린 적도 없는 동생을 찾은 기분을 느꼈지만,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지역 차이를 느끼곤 했다.

“오래된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야. 여신에게 원하는 게 있으면 신전에 돈을 주는 편이 더 빠를걸.”

“아, 예. 그럼 똑똑한 도련님께선 아무 소원도 빌지 않으실 건가 보죠?”

그 말에 아치가 슬쩍 주변을 돌아보더니 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왕 왔으니 기분은 내야지. 오늘은, 고모부를 즐겁게 해 주려고 온 거니까.”

아치는 ‘고모부를 즐겁게 해 주자’라는 혼자만의 첩보 작전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간만에 성 밖에 나와 들뜬 표정까진 미처 숨기지 못했다.

‘어련하시겠어요.’

간간이 커지는 어린이의 코 평수에 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두 사람을 불렀다.

“위험하니 물가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라.”

“고, 고모부!”

아치는 노마와 고작 몇 초 떨어져 있었지만 며칠 떨어져 있던 것처럼 격하게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열렬한 반응이었으나 아직도 ‘고모부’가 입에 붙지 않아 꽤나 어색했다.

“자, 올라오렴.”

노마가 빙그레 웃으며 바위 아래에 있는 아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아치는 노마의 손을 좋아했다. 커다랗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노마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손에서 나오는 하얀빛이 책에 서술된 랭터스 경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간, 고모부처럼 손이 커지고 강해지겠지?’

노마의 손은 아치에게 눈에 보이는 성장의 척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아치는 아직 고모부라는 호칭은 어색해도, 그의 손만큼은 덥석덥석 잘도 잡았다.

아치가 눈앞의 커다란 손을 잡기 위해 냅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참 쭈그려 앉아 있던 탓에 아치의 하체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없는 망아지처럼, 아치의 몸뚱이가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엥?”

“도련님!”

동시에 기사들의 극성맞은 비명이 터지고, 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도련님을 잡기 위해 폰과 해리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아치는 물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곧 물에 빠지는 것 대신 몸이 붕 들리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고 했지. 정말 눈을 뗄 수 없구나.”

아치는 바위 위에 있던 노마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린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넘어가는 아치를 낚아챈 것은 노마였다. 해리는 뻗어진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안도했다.

‘도대체 언제?’

아치의 바로 옆에 있던 폰은 손을 뻗은 모습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심장이 두근두근했기 때문이었다.

“고, 고모부!”

아치가 뒤늦게 소리쳤다. 공주님 안기까진 아니었으나, 한 팔에 안긴 것은 애어른을 자처하는 아치에게 퍽 수치스러운 자세였다.

“내, 내려 주세요!”

“저래 봬도 연못이 꽤 깊단다. 네 키의 세 배는 될걸. 아치는 아직 너무 조그마해.”

그 말에 아치가 더욱 기겁을 하자 노마는 아하하, 웃으며 바위 위에 소년을 올려 주었다. 이내 자신도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폰은 조금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을 느꼈으나 군말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 올라왔다.

아치가 슬쩍 연못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겨우 제 무릎에 찰 것 같은데요.”

“보기엔 그래도 생각보다 수심이 깊어. 이제 내 손 잡자.”

노마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치에게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아치는 냉큼 노마의 손을 꽉 붙잡았다.

도련님을 말 그대로 물가에 내버려 둔 채 지켜봐야 했던 해리는 그제야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고작 내 무릎에 찰 것 같은데, 고모부 키보다 깊다는 거지? 고모부는 엄청 키가 큰데. 볼수록 신기하네.’

직전에 연못에 빠질 뻔했지만 신비로운 풍경에 홀린 아치의 눈동자는 여전히 바빴다. 아치는 저도 모르게 뭘 두고 온 사람처럼 고개를 쭈욱 빼 연못을 내려다봤다. 마냥 얕아 보이는 가장자리 부근에 비해 시커먼 중심부를 보면 확실히 깊어 보이긴 했다.

노마는 한참 아래 있는 자그마한 머리통이 연신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새를 조용히 지켜봤다. 그는 호기심 많은 강아지 같은 아치가 그저 신기하고 귀여웠다.

아치와 손을 잡고 걸으니 자연스럽게 딱 이만했던 니콜라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니콜라스는 아주 얌전한 어린이였기 때문에 1초에 한 번씩 들썩이는 아치와 딴판이었다.

퍽 다른 두 어린이를 떠올리자, 노마는 결국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정말 한시도 눈을 못 떼겠어.”

순간 아치는 ‘아차,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았나?’ 싶었다. 어린이가 정색을 하고 다급하게 대꾸했다.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응. 안다.”

노마의 짧은 대답에 아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이다 팽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노마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알지, 알지. 저 기분. 놀림을 당한 것이 분명한데 지적하기엔 또 애매한.’

그걸 지켜보던 폰은 애잔한 눈으로 아치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는 누구보다 조그만 도련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멋쩍은 마음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앞만 보며 걷던 아치는 얼마 안 가 저도 모르게 슬쩍 노마를 올려다봤다. 고모부 얼굴을 구경하는 것은 아치의 새로운 취미였기 때문이다.

‘……방금 어딜 보고 계셨던 거지?’

그때 찰나였지만, 고모부에게 관심이 많은 어린이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아치는 처음엔 노마가 그저 풍경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마의 시선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분명 허공이었다.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본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치는 노마가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을 처음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저 표정은 아마도 슬픈 게 맞지? 말로는 기쁘다고 하셨지만, 역시 속상한 걸 못 숨기시는 거구나.’

나름대로 예리한 어린이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서 더 재밌는 걸 보여 드려야…….’

노마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던 아치는 서둘러 다리를 찾기 위해 정신 사납게 고개를 돌려 댔다. 마침 숲에 들어와 본 것 중 가장 큰 연못과 그 연못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치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다리다! 저 다리인가 봐요.”

“첫 번째 다리구나.”

다리는 성인 남자 걸음으로 서른 걸음 정도의 길이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연못은 수심이 깊은 편이었으니, 신체 능력 평범한 사람이 두 눈을 감고 건너기 쉽지 않아 보였다. 담력이 있는 사람만 도전할 수 있는 전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치 맥포이 공자는 두려움을 몰랐다.

“제가 먼저 건너 볼게요!”

“조심해야 한다. 초여름이라도 물에 젖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노마가 흔쾌히 손 인사를 하며 말했다.

노마 디아시는 양육 대상자를 품 안에 싸고도는 양육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방목과 도전 정신이 그의 양육 비법이라 할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이미 등을 보이며 뛰어가던 아치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또다시 해리만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쏜살같이 뛰어나간 도련님을 허겁지겁 쫓았다.

과보호가 습관인 맥포이의 기사들은 아치가 다리를 건널 때 심장이 쪼그라드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그들의 도련님은 눈을 감고 잘도 일직선으로 걸었다. 그들은 그제야 제 도련님이 검기와 성력을 다룬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오! 대단하십니다, 아치 도련님!”

폰이 순수하게 감탄사를 내뱉자, 반대편에 도착한 아치가 노마와 폰 쪽을 돌아보며 한껏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모부 차례예요!”

노마가 반대편에 있는 아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천천히 다리 앞에 섰다.

‘잠시만, 눈을 감고 물 위를 건너는 건.’

폰은 수심 깊은 물을 마주하고 선 노마의 뒷모습을 보자 어쩐지 미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저주에서 살아 돌아온 노마가 이따금 허공을 본다는 것, 밤잠을 못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근에야 노마는 허공을 거의 보지 않긴 했다. 그러나 폰이 알기로 노마는 여전히 잠을 잘 못 잤다.

‘심지어 디아시 경이 그 긴 세월 물속에 봉인되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폰은 그런 노마가 눈을 감고 물 위를 건넌다는 것 자체가 영 꺼림칙했다. 폰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 괜찮으시겠습니까?”

노마가 살짝 고개를 돌려 폰과 눈을 마주쳤다.

“글쎄.”

산뜻하지만 애매한 대답에 폰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음 순간, 폰의 얼굴이 와작 구겨진 동시에 눈을 감은 노마가 다리에 위에 발을 디뎠다.

“노마 님, 잠―.”

“저렇게 날 기다리는데, 그럼.”

노마는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별수가 있나. 어서 건너가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노마가 눈을 감고 성큼성큼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내딛는 그의 걸음은 몹시 가뿐해 보였다.

‘기우였나. 하긴, 결혼 후엔 정말 괜찮아 보이시니까.’

폰은 빠르게 멀어지는 노마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곧 눈 깜짝할 새 건너편에 도착한 노마가 아치와 양손을 짝짝 맞추며 깔깔 웃는 것을 보고, 그는 완전히 긴장을 풀었다.

점점 대담해지는 맥포이 공자의 발걸음에 모두가 마음을 졸이긴 했지만 두 번째 다리를 건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침내 세 번째 다리 앞. 이번에도 선두는 아치였다.

“잘한다! 우리 도련님! 멋지다!”

기사들은 도련님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재차 열띤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와중에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폰 바인스였다.

기사들의 호응에 응답하듯, 아치가 묘기를 부리듯 빠르게 세 번째 다리를 건넜다.

아치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잊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연못에 금화 한 닢을 던져 넣었다. 그러곤, 폰에게 냉소적으로 군 것이 무색하게 꽤 오랫동안 소원을 빌었다.

소원을 다 빈 아치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그가 노마를 향해 양팔을 휘저었다.

노마가 세 번째 다리 앞에 섰다.

다른 다리를 건널 때와 다를 것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노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리 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가 다리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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