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이럴 줄 알았어.’
노마가 발그레한 볼을 하고 등장했을 때부터 그를 경계하고 있던 폰은 역시나, 하고 고개를 떨궜다.
폰은 노마를 설득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웃는 낯으로 결국엔 뜻을 관철하는 노마의 대쪽 같음에 두 손 두 발을 다 든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한편 갑작스러운 성 밖 외출에 당황한 것은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호수 근처라 해도 도련님을 모시고 계획에 없던 외출을 했다간 시모어 부인이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질책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해리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찾는 아치를 저지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노마가 더 빨랐다.
“폴른 경.”
“예, 경.”
해리는 순한 척 웃는 가주 부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듣기론 동쪽 호수 근처는 맥포이 기사들이 종종 훈련 장소로 쓰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다고 들었다. 맞는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경.”
진실만 말할 수 있는 해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느 때보다 시모어 부인이 보고 싶었다. 말주변 없는 그로선 노마와 아치를 막을 수 있는 기가 막힌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물가는 신성력을 갈고닦기 좋은 장소지. 마침 날도 좋으니 오늘은 연무장을 벗어나 볼까?”
“좋아요!”
아치 빼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결정이었다.
호수 근방은 성 바깥이었으나 엄연히 기사들의 훈련 구역이 맞긴 했다. 호위가 어렵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해리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해리는 남몰래 한숨을 쉬며 두 분이 시장에 가신다고 나서지 않아 다행인가, 하고 생각했다.
폰은 포기하면 편하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선 그런 해리를 측은하게 쳐다봤다.
* * *
답지 않게 걸음 속도를 높인 나를 기다리는 것은, 텅 빈 테이블이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나도 모르게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지고, 발걸음에 맞춰 주책맞게 뛰던 심장도 대번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어린 하녀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몇 차례 저들끼리 쑥덕거린 끝에 그중 용기 있는 하녀가 나섰다.
“말하라.”
“가주님. 두 분께선 오늘 일찍 티타임을 파하셨습니다.”
“그건 나도 보인다. 왜지?”
“오늘은 연무장이 아니라 동쪽 호수 근처에서 훈련을 하신다고 일찍, 자리를 정리하셨습니다.”
정확히는 호수 뒤, 군락 안에 있는 오래된 다리에 가신 것이었지만 하녀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언질 없이 갑자기 티타임에 들이닥친 가주님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급한 일이시면 당장 전령을 보낼까요?”
나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노마 디아시를 당장 봐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여 순간적으로 내가 벌인 짓을 찬찬히 둘러봤다.
아치의 정원은 테이블을 정리하다 말고 갑자기 나타난 가주를 보고 당황한 하녀들, 그리고 내가 주렁주렁 달고 온 기사들과 사용인들로 북적였다.
금 같은 내 시간이 하릴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은 덤이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성 밖까지 가시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가주님께서 한번 움직이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드는지 잘 아시지요.”
내가 얼이 빠진 얼굴로 멈춰 서자 에리카가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내가 호수까지 나가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를 아주 미련한 폭군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벌렸다. 여유를 가장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아무리 미쳤다고 거기까지 가려 했을까.”
“이미 상당히―, 아닙니다.”
에리카는 듣는 귀가 많다는 것을 가까스로 기억했는지 말을 아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다. 이미 상당히 미치신 것 같다, 뭐 이런 말을 하려 했겠지.
‘젠장. 그러니까 하던 일까지 내팽개치고 어젯밤에도 보고, 아침에도 보고, 방금도 본 노마 디아시를 보겠다고 내가, 뛰었다는 거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허, 하고 헛웃음을 뱉을 때였다. 뭔가가 드레스 자락을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숙이자, 검은 솜뭉치 같은 것이 내 치맛단을 물어뜯고 있었다. 의아함의 연속에 나는 재차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얘는 왜 여기 있냐.”
감히 날 물고 늘어진 것은, 오랜만에 보는 앙투아네트였다. 여전히 자그마한 아기 맹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옷감을 퉤, 뱉곤 고르릉 소리를 냈다.
앙투아네트의 마음속 1등은 노마가 분명했지만, 이 아기 맹수는 보통 아치와 붙어 다녔다. 식사 자리와 티타임은 물론 훈련을 할 때도 둘은 언제나 함께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라니 이상하지 않나. 나는 몸소 허리를 굽혀 처음 만났을 때 이후 전혀 크지 못한 조그마한 맹수를 안아 올렸다.
나는 아까 그 용기 있는 하녀에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너, 말해 봐라.”
“앙투아네트 님이 졸린 것인지, 배가 고픈 것인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두 분을 따라나서지 않으려는 것 있지요.”
“그래?”
아기 맹수를 품에 안은 나는 얼결에 빈 테이블에 앉았다. 앙투아네트를 보자 직전의 허망함과 혼란스러움이 잠시 잊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곧장 등을 돌려 서재로 돌아가려던 생각이 슬그머니 휘발됐다.
나는 앙투아네트를 더 안고 있지 못하고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앙투아네트는 조그마해도 나름 맹수라고 은근히 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감 있게 허벅지에 자리 잡은 아기 맹수가 꼬리를 붕붕 흔들며 나를 올려다봤다. 꽤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도 열정적으로 나를 반기는 모습이 퍽 어여뻤다.
“오랜만이군. 졸리진 않아 보이는데. 배가 고픈 것인가?”
맹수가 정말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나도 모르게 앙투아네트에게 말을 걸었다. 앙투아네트는 확실히 다른 짐승과는 다르게 매우 똑똑했고 가끔 사람 말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앙투아네트가 새파란 눈을 깜빡이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불만스럽게 꼬리를 탁탁 내리쳤다.
꼭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정말 다 알아듣는 게 아닐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뭐, 혼자서 날 기다리기라도 한 거냐?”
무엇보다 아기 맹수가 하는 짓이 퍽 귀여워,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였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한 헛소리에 이번엔 앙투아네트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꼬리를 세웠다. 이내 질문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내게 얼굴을 비비는 것 아닌가.
꼭 기다린 게 맞다고 하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노망난 사람처럼 아기 맹수를 마주 보고 연신 히죽거리다 말을 걸기를 반복했다.
“네가 내가 올 줄 어떻게 알았겠나. 나도 미친 소리를 하는군. 그렇지?”
앙투아네트가 아치와 노마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라도 결과적으로 혼자 날 기다리지 않았나. 내 새끼가 천재라는 마음이 이런 걸까 싶어 조그만 짐승이 그저 기특했다.
“아니, 그런데 넌 왜 전혀 크질 않냐. 나름 표범이라며.”
열과 성을 다해 앙투아네트를 쓰다듬던 나는 문득 아기가 여전히 작단 사실이 신경 쓰였다. 내가 묻자, 앙투아네트는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다 품에 파고들기만 했다.
“얜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나는 급기야 앙투아네트의 몸통을 붙잡아 요리조리 살펴봤다. 내가 맹수 전문가도 아니고, 그래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앙투아네트가 귀찮은지 발버둥 쳤다.
한편, 사용인들은 그들의 가주님이 누그러지다 못해 급기야 아기 맹수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나라 잃은 얼굴로 티 테이블을 볼 때는 언제고 아기 맹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했다.
슬슬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은 순간 경계가 허물어진 맥포이 가주를 보며 눈을 빛냈다. 소문으로 듣던 ‘말랑한 가주님’을 모실 절호의 기회가 분명했다. 그들은 맥포이 가주를 이대로 붙잡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가주님. 모처럼 오셨는데, 잠깐이라도 차를 즐기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다과는 금방 다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하녀가 다시 나섰다.
그 말에 아기 맹수를 쓰다듬던 아이사가 티 테이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빛은 퍽 미련이 넘쳐 사용인들은 순간 기대에 부풀었다.
“아니. 돌아가겠다. 얘는 내가 데려가지.”
그러나 아이사는 앙투아네트를 안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사용인들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맥포이 가주에게 한 번 더 권유할 수 있는 강심장은 없었다.
아기 맹수를 안은 맥포이 가주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르는 1기사단과 사용인 수십 명이 줄줄이 맥포이 공자의 정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에리카가 웬일로 아이사 바로 뒤에 붙지 않고 행렬 맨 끝으로 빠졌다. 그녀가 하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두 분은 정확히 어디로 가셨니?”
“동쪽 호수 뒤에 있는 소원 다리에 가신다 했습니다, 시모어 보좌관님.”
“…….”
도대체 언제 적 소원 다리인지. 에리카는 하녀의 입에서 자신의 조모가 소녀였던 시절에도 고리타분한 전설 취급받던 오래된 이야기가 나오자 혀를 내둘렀다. 훈련을 빙자한 나들이가 분명했다.
에리카는 나들이를 떠난 이들의 조합을 떠올렸다. 망아지 같은 디아시의 기사와 그와 죽이 잘 맞는 도련님, 거기에 은근히 과감하게 일을 저질러 버리는 가주 부군까지.
‘이거…… 해리가 이래저래 고생하겠는데.’
에리카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 *
버드나뭇과의 군락으로 이루어진 작은 숲속에 아주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울창한 나무가 하늘을 빼곡히 가려 해가 긴 초여름 날이었음에도 숲속은 어두웠다. 족히 몇백 년은 산 숲속의 나무들은 여느 성벽처럼 높고, 둘레는 성인 남성 세 명이 모여 넓게 팔을 벌려 안아야 할 만큼 두꺼웠다.
오래전 숲을 지름길로 쓰기 위해 그 안에 다리를 만들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곳곳엔 새로운 도로가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숲 지름길은 통행로로 쓰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실제로 맥포이 기사들이 기마 훈련이나 신성력 훈련을 할 때 호숫가를 에워싼 평지대를 사용하긴 했다. 하지만 이 숲은 아니었다. 누군가 숲에 들어가는 건 주에 한 번, 5인조로 외성 경비를 서는 기사들 뿐이었다.
폰과 아치가 사이좋게 연못가에 쭈그려 앉아 맑은 수면을 내려다보다, 나뭇잎이 가린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반복했다.
“우와. 나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
아치의 경우 이런 풍경은 또 난생처음이라 마구 눈이 돌아간 것이라면.
“여긴 꼭, 디아시 본성 같네요.”
폰의 경우엔 고향이 생각나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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