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노마는 어린아이를 좋아했다. 니콜라스가 딱 지금의 아치 정도의 나이일 때 헤어진 탓인지 그는 동생에게 다 못 준 애정을 고스란히 아치에게 쏟아붓고 있기도 했다.
아치의 경우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에 약한 맥포이였다. 무엇보다 아치는 노마가 제국 건국 이래 최고의 성기사로 뽑히는 ‘랭터스 경’의 환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노마 디아시는 전설적인 성기사 랭터스 디아시의 외관 묘사와 똑 닮았기 때문이다. 햇빛 아래 눈부시게 부서지는 은발과 디아시 특유의 금안을 가진 개안할 미모에, 성기사단장에 오를 수 있는 실력까지.
어린이가 보기에 그는 랭터스 경의 환생이 분명했다!
그렇게 아치는 오늘도 제 고모부가 된 노마에게 홀딱 빠져 차가 다 식어 갈 때까지 찻잔에 입술도 못 댔다.
‘장난 아니다. 랭터스, 아니, 고모부도 맥포이라니. 이걸 어디다 자랑한담.’
아치는 노마를 마주할 때마다 끝없이 고양되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친구가 없어 자랑할 곳이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짧은 손가락을 움직여 수를 셌다.
‘하나, 둘.’
앙투아네트까지 하면 순식간에 가족이 둘이나 생겼다. 가족이라곤 달랑 고모 한 명이었는데, 엄청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노마는 대화를 하다 말고 습관적으로 제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는 아치가 마냥 귀여웠다. 아치의 행동은 아이사와 닮은 점이 많았다. 다시 한번, 노마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노마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뭘 세는 거니?”
“네? 아니요. 고모, 고모부. 아무것도 아니에요.”
꿈 같은 현실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딴생각을 하고 있던 아치는 재빠르게 손을 뒤로 숨기며 붕붕 고개를 저었다.
다급한 어린이의 모습에 노마는 그저 작게 웃었다. 곧 그가 눈썹을 모로 휘며 말했다.
“고모를 자주 만나고 싶을 텐데. 내가 매번 그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구나.”
‘우리 고모는 딱히…….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봐서 상관없는데.’
그렇다고 고모부에게 ‘별로, 전 고모부만 봐도 되는데요’라고 할 수 없어 아치는 잠시 눈동자를 데룩 굴렸다.
본래 맥포이는 재작년에 제조한 멧 통을 개봉하는 등, 여름에 가장 바쁘기도 했다. 맥포이의 주인은 이 시기엔 집무실, 서재 아니면 알현실에 처박혀 티타임은커녕 식사 시간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작은 주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아치는 고모를 몹시 사랑하긴 하지만 아이사와 있는 시간이 마냥 좋지도 않았다. 아치가 느끼기에 고모는 영 섬세하지 못하고 괴팍했다.
아치와 아이사의 대화는 10분 이상 가지 못하기도 했다. 높은 확률로 아이사가 아치에게 사랑의 잔소리를 시작하고 고성이 오가다 대화가 끝났다.
그렇다고 둘이 술래잡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치도 고모와 얘기하다 보면 답답했다.
“……전 괜찮아요. 고모, 부가 매일 훈련도 도와주고 이렇게 맛있는 과자도 같이 먹어 주니까요. 그리고―.”
중얼중얼 말하던 아치가 퍼뜩 의젓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우쭐하기까지 한 그 표정에, 노마는 또다시 어금니를 꽉 물어 웃음을 참았다.
“가주 부부의 의무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이제 열두 살이니, 그런 것 정도는 알아요!”
그렇게 말한 아치가 퍽 뿌듯한 눈빛을 하고 노마를 바라봤다.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는 어서 칭찬해 보라는 듯했다.
“…….”
눈을 몇 번 깜빡인 노마가 아치 뒤에 서 있던 해리를 쳐다봤다. 해리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끝에 난감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풉.”
“……왜 웃어요? 아니에요?”
상황을 파악한 노마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노마가 웃자 아치는 이게 아닌가 싶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이 다 맞다. 너무 똑똑해서, 놀라서 웃은 거야. 맥포이의 미래가 밝다.”
혼신의 힘으로 웃음을 참은 노마가 아치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아치의 구겨진 미간이 슬며시 펴졌다. 매사 진지한 맥포이는 제 말에 누가 웃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이 예쁜 사람에겐 또 관대한 편이었다.
격한 칭찬에 순식간에 기가 산 아치는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는 달달한 과자를 씹으며 습관처럼 고모부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아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고모부 얼굴이 붉고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멍하지 않나? 이거…….’
“우리 고모가 괴롭혔구나!”
아치가 확신에 차 외쳤다. 평소와 다르게 열이 난 듯 붉은 얼굴, 어딘가 아련한 표정. 어린이의 눈에 노마는 퍽 근심스러워 보였다.
또한 아치는 최근 온 성을 떠들썩하게 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법석을 떠니 모를 수가 없었다.
“가주 부군께서는 우리 가주님을 좋아하셔.”
“불쌍한 노마 님. 우리 가주님이 눈치가 없으셔서 마음고생이 많으시지.”
주워들은 것에 따르면 이랬고, 이 둘을 조합해 보면…….
‘눈치 없는 우리 고모가 마음씨 고운 고모부를 슬프게 하고 있구나!’
아치는 고모의 눈치가 바닥이라 섭섭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제 걱정을 몰라주고 고집만 부리는 고모를 마주했을 때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눈앞의 고모부가 애잔했다.
한편 노마는 얌전히 과자를 먹던 아치가 대뜸 그렇게 외치니 그저 의아했다. 그는 아치가 생각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것마저 아이사와 똑 닮았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음,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니.”
“하지만, 오늘따라 고모부 얼굴이 빨개요.”
“……내 얼굴이 지금도 빨간가 보구나.”
“네. 정말 빨간걸요.”
노마는 아치가 ‘정말’이라고 강조하자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나나 싶어 순수하게 민망함을 느꼈다. 노마가 손등으로 볼을 식히며 말했다.
“얼굴이 빨간 건 아이사 님 때문이 맞겠다.”
“역시!”
“하지만 괴롭히신 건 아니야. 물론―.”
다른 의미로 괴롭긴 하지만. 노마는 수위 조절을 위해 뒷말을 삼켰다.
노마가 어쩐지 더 멍한 표정을 하자, 아치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럼 슬픈 건 아니라는 거예요?”
“응. 슬픈 게 아니야. 이건.”
그렇게 말한 노마는 장난기가 발동해 씨익 한 번 웃곤 난감한 척 눈썹을 휘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치, 귀.”
노마는 그렇게 말하곤 테이블 건너에 있는 아치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곤 아치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건 슬픈 게 아니라, 아이사 님을 보면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거야. 꼭 너만 알고 있으렴.”
노마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인 끝에 아치와 눈을 맞추며 은밀하게 웃었다.
“비밀이야.”
비밀은 무슨, 내성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고 다분히 어린이를 놀리려는 의도가 만만했다.
그러나 노마가 퍽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치는 대단한 첩보 작전이 시작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치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마는 깔깔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든 말든 아치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런 얼굴로 기쁘다고만 하다니. 하여튼 고모는 바보야. 이렇게 마음씨 예쁜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람?’
빠르게 노마 편이 된 아치는 눈치 없는 고모 대신 자신이라도 고모부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이대론 안 되겠어. 나라도 고모부를 즐겁게 만들어 줘야지. 맥포이에 재밌는 게 뭐가 있지? 일단 술래잡긴 아니야.’
다 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치는 놀랍게도 술래잡기가 유치하다는 자각이 있었다.
조그만 머리를 팽팽 굴린 끝에, 아치는 며칠 전 역사 선생이 막간을 이용해 알려 줬던 맥포이의 전설 하나를 생각해 냈다.
“고모부, 귀요!”
화색을 띤 아치가 노마에게 귀를 내달라고 손짓했다. 굳이 귓속말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노마가 은밀한 척하는 바람에 첩보원이 된 기분에 한껏 취해 있었다.
“동쪽 탑에서 보이는 호수 있잖아요.”
노마는 동쪽 탑에서 보이는 커다란 호수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사의 망한 청혼의 배경이 바로 그 호수였기 때문이다. 수순처럼 청혼 날의 충격을 떠올린 그는 조금 씁쓸함을 느꼈다.
“그 호수 뒤에 숲이 있거든요? 정확힌, 숲이라고 하긴 뭐한 적당한 크기의 군락 같은 거요. 거기는 예전에 영지를 빠져나가는 지름길로 썼는데―.”
아치가 재차 속닥거렸다.
“곳곳에 큰 연못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 안에 다리를 만들었대요. 세 개나!”
“세 개나?”
노마는 은밀하게 속삭이는 아치가 귀여워서 열심히 분위기를 맞춰 줬다.
“네, 보기와 다르게 엄청 깊대요! 아무튼, 그 다리 세 개를 눈을 감고 건넌 다음, 마지막 다리를 건넜을 때 보이는 연못에 금화 한 닢을 던지면 여신이 소원을 이뤄 준댔어요.”
아치가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려 봤자 주변엔 신체 감각이 뛰어난 기사들투성이였다. 그들은 오래된 전설을 대단한 비밀인 양 말하는 작은 주인이 귀여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은 서부가 여신의 힘이 닿지 않은 땅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그 연못이 제일 유명한 성지였대요.”
아치는 이제 막 맥포이가 된 노마에게 깨알같이 영지 자랑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노마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척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거기에 부응하듯이 아치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어쨌건 다음이 제일 중요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곳에 사랑을 이루어 달라고 소원을 빌었대요.”
“사랑을 이루어 주는 연못이구나.”
제국에서 메헤라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로 통했다. 때문에 그녀가 전해 준 신성력을 무한한 생명력으로 보기도 했다.
이때 제국민들은 물에서 모든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자연스럽게 여신과 관련된 오래된 전설과 온갖 신비로운 일은 보통 물과 연결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염원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숲속에 있다는 연못이 가진 전설은 특이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아치가 어때요? 궁금하지 않아요? 완전 가고 싶죠? 하고 말하는 듯한 눈을 하고 노마를 바라봤다.
무엇보다 마침 시모어 부인도 없겠다, 아치는 성 밖에 나가고 싶은 티가 너무 났다.
‘많이 나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치는 시모어 부인에게 노마와 성 밖에 나가 보고 싶다고 매일같이 떼를 쓴 전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시모어 부인은 단호하게 불허했고 아치는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시가지는 확실히 위험하지만, 호수 쪽에 가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노마는 자신을 걱정해 즐겁게 해 주려는 아치가 마냥 귀여워 노림수가 섞인 것을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실은 기대감 어린 보라색 눈동자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컸다. 노마는 그 눈동자를 배신할 수 없었다.
“난 길을 잘 모르니까 아치가 데려가 줘야겠다.”
그 말에 아치가 화색을 띠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노마가 말을 바꿀까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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