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나는 짧지만 치열한 고민 끝에 상자를 열었다. 상자엔 알록달록한 구슬 모양의 설탕 과자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고심 끝에 노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설탕 과자 한 알을 집어 들었다.
“…….”
순순히 눈을 감고 나를 기다리는 노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별것도 아닌 일에 매번 긴장을 하니 미칠 노릇이다.
‘내가 독이라도 주면 어쩌려고 이렇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입을 벌리고 있담.’
괜스레 퉁명스러운 생각을 하며, 신중한 손동작으로 그의 입에 설탕 과자를 집어넣었다.
달콤함을 느꼈는지 노마가 눈을 반짝 떴다. 한쪽 볼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경험에 의하면 그는 분명 이쯤에서―.
‘역시.’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상승 곡선을 그리는 입매를 확인하자 역시, 그가 바라는 대로 먹여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맛있나. 애도 아니고 이렇게 단걸 좋아하다니.’
나는 도토리를 먹은 다람쥐처럼 부푼 그의 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 큰 성인 남성이 볼 한가득 과자를 물고 있는 모습이 미련스럽지 않고 그저 귀여워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맛있습니다.”
“입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순간 막을 새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노마의 시선이 내 입매에 닿는 게 느껴졌다. 사탕을 문 채 푸스스 웃은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상자는 아이사,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상자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움직이는 그의 입술에 고정됐다.
“제가 여기 올 때마다 당신이 하나씩 제 입에 넣어 주시면.”
놀랍게도 당장 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변태였다니, 조금 절망스러웠다.
노마의 입술이 재차 움직였다. 나는 최대한 난폭하고 잔인한 생각을 하며 파렴치한 충동을 막았다.
“무척 기쁠 거예요.”
“……그게 당신 기쁨이라면, 그래요.”
“당신을 보러 서재에 올 핑계가 생겼네요.”
“…….”
“그럼―.”
다음 순간 노마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가볍게 떨어졌다. 딱히 혀를 섞은 것도 아닌데 단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노마는 내가 그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단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은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노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귓속말을 했다. 안 그래도 바짝 굳어 있던 나는 그 바람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마지막으로 본 건 붉어진 그의 목덜미였다. 눈 한 번 깜빡하니 노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창틀을 꽉 잡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미친. 미쳤구나.”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설을 읊조렸다. 곧 다리에 힘이 풀려 창틀을 붙잡고 주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일단, 성 곳곳에 설탕 과자를 두자. 최고급품으로. 다음엔 저 인간 방을 값비싼 꽃으로 가득 채워 줄까? 어떤 돈지랄로 저걸 깜짝 놀라게 해 줘야―.’
김이 나는 얼굴을 양 손바닥에 파묻고 팽팽 머리를 굴렸다. 설탕 과자 하나로 대단한 반응이 돌아오자 좀처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때 빡―, 발로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가 망상을 깼다.
“헉!”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내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소리 나는 방향을 돌아보니 에리카가 보였다. 그녀가 몹시 싸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다 끝났습니까?”
“뭐, 뭐야. 언제부터 있었나?”
“글쎄요. 가주님께서 안주인 마님께 과자를 먹여 주실 때부터요?”
에리카가 비아냥댔다. 그녀는 뻔히 자신이 왔단 사실을 알면서 기어코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라진 안주인 마님의 패기에 치를 떨었다. 또한 바로 엊그제 시모어 부인에게 한 소리 들은 바, 타인의 애정 행각을 곱게 볼 수가 없었다.
나야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저 노마 디아시에게 과자를 먹여 주고, 훤한 대낮에 신성한 서재에서 입을 맞춘 모습을 들킨 것이 죽도록 민망할 뿐이었다.
“간밤에 내내 붙어 계셨으면 됐지. 그새 서재까지 불러 연애질을 하십니까.”
“연애라니. 그런 게 아니다. 우린 부부인데 어떻게 연애를 해.”
‘아닐 건 뭐지?’
에리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주님은 바보 멍청이, 찌질이 겁쟁이가 분명했다. 표정이나 행동으론 조금도 못 숨기면서 꿋꿋하게 입으로만 뒷걸음을 치는 게 다른 의미로는 대단했다.
그녀는 속에서 불같은 화딱지가 오르는 걸 느꼈다.
“……어머니가 절 보는 기분이 딱 이런 거겠군요.”
“시모어 부인은 또 왜.”
“아무래도 맥포이에 겁쟁이가 많은 것 같은데.”
“뭐야? 지금 나보고 겁쟁이라고 하는 거냐?”
“아니요. 자기소개였습니다.”
나는 에리카가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오늘따라 반쯤 해탈한 사람 같은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게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건 그렇고, 안 일어나십니까? 잡아 드려요?”
에리카의 말에 그제야 내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됐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놓은 설탕 과자 상자를 주섬주섬 챙겨 몸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노마가 서 있던 창가에 눈이 갔다. 그러곤 에리카가 수레째 밀고 들어온 서류의 산을 돌아봤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마의 목소리와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이 왕왕 머릿속에 맴돌았다.
“……에리카.”
나는 홀린 듯이 에리카를 불렀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본능적으로 눈치챈 에리카가 짜증스럽게 수레에서 손을 뗐다.
“한 시간만 쉬자.”
그 순간엔 오늘은 티타임에 무조건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모든 의무와 책임, 부끄러움을 이겼다.
* * *
ㅎㅂㄹㄱ.공금
“아치 도련님―! 다 숨으셨습니까!!”
맥포이 공자의 정원에 폰 바인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다 숨으셨죠! 그럼! 찾겠습니다아!”
폰은 고향을 떠나 맥포이에 가기 싫다며 발버둥 쳤던 것이 무색하게 서부와 잘 맞았다. 그는 서부에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이 동부에 잘못 태어났던 것처럼 빠르게 서부에 적응했다.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엄격한 예법이 적용되는 동부와 다르게 서부는 자유롭고 거칠며 역동적이었다. 잔소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폰은 처음 잔디를 밟은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안살림을 돌봐야 하는 노마 대신 몇 번 아치를 놀아 준 폰은, 물론 기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기사인가 보모인가 골몰하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편이었다.
그렇게 방년 21세 폰은 12세 맥포이 공자를 놀아 주며 어린 시절에 마음껏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지 못했던 한을 풀기 시작했다.
또한 어린 시절 혼자서 잘도 고요한 디아시를 뒤집어 놓았던 폰 바인스는 남달랐다. 그는 10대 초반의 어린이를 놀아 주는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맥포이 공자, 아치의 경우 온 힘을 다해 놀아 주는 폰 바인스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도련님이 어디 숨었는지 알면서 적당히 찾는 척하다 적당히 찾아내고, 도련님이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에 대강 숨던 맥포이 기사들과 달랐다.
폰 바인스는 조그마한 아치를 상대로 열과 성을 다해 술래잡기를 했다. 그는 악착같이 도련님을 찾아내고 기를 쓰고 숨었다.
아치가 하루 종일 폰을 못 찾은 날도 많았다. 난생처음 무자비한 승부의 세계를 겪은 도련님은 울면서 잠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승부욕이 있는 어린이는 분한 만큼 즐거웠다.
무아지경으로 뛰어다니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맥포이 기사들은 디아시의 기사가 도련님을 놀아 주는 것이지, 도련님이 그를 놀아 주는 것인지 헷갈렸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제법 성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 아치는 최근 꼭꼭 숨은 폰을 찾는 데 나름 노하우가 생겼다. 수련을 빙자한 술래잡기는 점점 둘만의 승부가 되었다.
“아학! 아하하학!”
숨넘어가는 어린이의 웃음소리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옆을 지키는 기사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어쨌건 깜찍하고 조그마한 작은 주인의 기쁨은 그들의 행복이었다.
단 한 사람,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우직하게 아치의 곁을 지키던 해리 폴른 경만이 그 웃음소리에 온 마음으로 기뻐하지 못했다.
조각 같은 해리 폴른에겐 최근 고민이 있다. 몇 년을 모신 제 작은 주인이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외지인 기사를 자신보다 더 신뢰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련님이 숨넘어가게 웃을 때마다 아름다운 조각상의 얼굴엔 때때로 근심이 어렸다.
“경이 최고다! 역시 그대와 노는, 아니, 수련하는 게 제일 즐겁구나!”
한참을 뛰어놀다 잠시 목을 축이던 아치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폰 바인스가 최고’라고 말한 순간, 해리는 결국 눈 밑을 씰룩이고 말았다.
‘아이고 저런.’
유치한 구석이 있긴 해도 폰 바인스는 나름대로 알아주는 신출내기 기사였다. 그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조각처럼 잘생긴 맥포이 기사가 남몰래 눈물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러다 진짜 우는 거 아니야?’
온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 도련님은 과연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났다. 폰도 조그마한 주제에 솔직 당당한 맥포이 공자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청순한 얼굴을 한 기사가 남몰래 청승을 떨고 있으니 마냥 유쾌하게 웃고 넘어갈 수 없었다.
미묘한 삼각관계에 폰이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아치.”
때마침 노마가 정원에 도착했다. 구세주의 등장에 폰이 반색을 하고 그를 돌아봤다.
그런데 노마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발그레했다. 반색한 것이 무색하게 폰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또 몰래 맥포이 가주를 보고 오셨나 보군. 어째 평소보다 더 빨간데?’
폰은 이제 저 얼굴이 무슨 얼굴인지 알았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볼 빨간 노마는 돌발 행동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한편 노마의 목소리에 화색을 띠는 건 폰뿐만이 아니었다. 아치와 앙투아네트가 그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했다.
“고모, 부!”
아치는 아직 노마를 고모부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꼭 한 번씩 말을 더듬곤 했다.
어린이가 고모부를 보자마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렸다. 뒷짐을 진 점잖은 상체와 그렇지 못한 하체는 영락없이 주인을 만난 강아지였다.
아치보다 빠른 건 앙투아네트였다. 그늘에서 하품을 하며 졸던 앙투아네트가 펄쩍펄쩍 노마에게 뛰어갔다.
노마는 제 가슴팍을 향해 몸을 날린 앙투아네트를 익숙하게 품에 안았다. 에취, 하고 잔기침을 한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논 것이 분명한 아치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땀이 많이 났구나.”
그러곤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아치의 이마를 쓸었다. 축축한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안주인 마님과 도련님, 둘만의 세계가 시작되자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또다시 흐뭇한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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