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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91화 (91/139)

91.

그렇다. 노마 디아시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건 또 뭐람.”

“……안녕.”

그러나 운이 좋을 뿐이지 노마 역시 정말 아이사가 창문을 열고 나올 줄은 몰랐다. 노마는 자기도 모르게 어색하게 튀어 나간 어리숙한 인사가 조금 창피했다.

그녀를 마주친 게 마냥 반갑고 쑥스러웠지만, 아이사의 얼굴은 왜인지 은은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노마는 아이사가 그가 누군가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밥 먹듯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이 많고 은근히 상상력이 풍부한 그녀의 머릿속은 안 봐도 뻔했다.

운명적인 만남에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노마는 놀란 그녀를 달랠 준비를 했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해.’

오랜만에 이른 아침부터 집무를 보는 것에 성공한 나는 서류 무덤 속에 파묻혀 끌끌 웃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내가 종종 음산하게 웃을 때마다 에리카를 비롯한 비서들이 돌았나, 하는 표정으로 흘긋거리긴 했다. 하지만 곧 가주님이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하는 얼굴로 금세 자기 할 일에 집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주님. 창고에서 다음에 보셔야 할 서류를 가져올 테니 잠시 쉬고 계십시오.”

다시 조그만 글자에 집중하길 한참, 에리카가 그렇게 말하며 비서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제야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 동안 의자에 구겨져 있던 신체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래. 이거지. 눈도 좀 뻑뻑하고 다리도 저리고.’

나는 기괴한 만족감을 느끼며 뻐근해진 목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오랜 시간 꽉 막힌 공간에 틀어박힌 탓인지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여름을 향해 가는 날씨가 한몫을 했다.

나는 주변을 한 번 싹 돌아봤다.

‘중요한 서류는 일단 다 창고로 옮겼고……. 에리카가 오기 전에 잠시만 창문을 열까.’

원래 같았으면 사용인들을 불러다 창문을 잠시 열라고 말했을 테지만 간만에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가림막이 덧대어져 있는 창문은 겉보기에도 복잡해 보였다.

여태껏 나는 한 번도 내 손으로 이 서재의 창문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창문이 안에서만 열리도록 설계된 것인지 몰랐으며, 단순히 바깥쪽을 향해 밀면 열린다는 사실도 몰랐다.

나는 별 기대 없이 양손으로 창문을 밀었다. 다음 순간 창문이 덜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의외로 간단히 열린 창문에 놀랄 새도 없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창밖 풍경에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람.”

“……안녕.”

안녕은 무슨.

내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자 상대는 마찬가지로 어딘가 푹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창밖에 서 있던 사람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짧은 사이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노마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힌 채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창문을 열고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서 뭐 합니까?”

“음. 아치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러다?”

“당신이 오늘은 서재에서 정무를 본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그렇게 말한 노마는 나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천진난만한 그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창틀을 잡은 손끝을 움찔 떨었다.

‘일단 아무리 봐도 첩자는 아닌 것 같아.’

그러나 방금 노마가 한 이야기는 말이 안 됐다. 겸사겸사라고 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여름을 맞아 바뀐 티타임 장소와 서재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웬일로 답지 않게 눈에 훤히 보이는 앙큼한 짓이지?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마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핀 끝에 물었다.

“요컨대……. 날 보러 왔다는 겁니까?”

노마가 이걸 맞히다니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가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바로 맞히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감격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매번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렬히 반응해 주니 새삼 민망했다.

그때 노마가 내 등 너머, 서재 안쪽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혹시 당신을 방해했습니까?”

“아니요. 보좌관이 새 일감을 가져오는 동안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신기하네요.”

“뭐가요?”

“음. 세상이 절 돕는 것 같아서.”

퍽 감성적인 말을 한 노마가 소년처럼 웃으며 손을 뻗어 왔다. 경험에 의하면 그는 곧 내 이마부터 귀 뒤까지 쓰다듬을 것이다.

나는 다가오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게 묘하게 안정감이 있어서 나는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역시나 노마는 내 잔머리 부근을 살살 쓸어 넘겼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의 손끝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뿌듯한 표정으로 내 머리칼을 넘겨 주던 노마가 뒤늦게 서재 한편에 쌓인 종이 무덤을 발견했다. 생글 웃던 그가 대번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오늘도 많이 바쁘시군요. 앉아만 있기보단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면 좋을 텐데.”

“오늘은 아마 힘들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해 주시는 건가요. 기쁩니다.”

노마를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뭐가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노마는 참 아무 때나 잘도 웃었다. 그가 웃는 지점은 항상 난해했다. 무엇보다 도무지 뭐 때문에 웃는지 공통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노마가 웃으면, 나는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이상한 안도감은 아마도 평소 내가 노마 디아시를 행복하게 할 100가지 방법을 은근히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나는 종이 무덤이 있는 쪽을 슬쩍 돌아봤다. 그런 뒤에 노마를 쳐다보니, 그는 금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히 죄진 기분을 느끼며 나는 노마에게 오늘도 티타임 불참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머리 위로 그늘이 지더니 난데없이 이마에 말캉한 게 닿았다. 다음 순간 이젠 익숙하기까지 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쪽이라니.’

나는 한발 늦게 손으로 이마를 가려 봤다. 밤에 그와 더한 일을 하고 있지만, 기습적인 신체 접촉에 매번 깜짝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노마가 창틀을 짚은 내 손등에 제 손을 얹고 상체를 숙여 서재에 불쑥 침범해 있었다.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그를 보니 어젯밤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젠장. 사춘기 소년 같군.’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같은 순간 햇빛을 등진 노마가 미소를 지었다. 밤의 그처럼, 금안이 번뜩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치에겐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번엔 코끝에서 쪽 소리가 났다. 그가 내 코에 입을 맞췄구나, 하고 깨달았을 땐 턱 끝에서 쪽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세 번의 입맞춤을 허용하고 만 나는 눈 뜨고 코 베인 심정을 느꼈으나 이번에도 입만 뻐끔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당신 얼굴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니.”

“…….”

“저는 오늘 운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굳이 티타임 장소와 정반대에 있는 서재까지 찾아온 주제에. 우연은, 아니지 않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네…….”

속으로는 나름 논리정연하게 그의 말에 반박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이번에도 허접스러웠다.

내 중얼거림에 나지막하게 웃은 노마가 또 입술을 들이대려 했다. 나는 가까스로 머리에 힘을 주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데 성공했다.

“그만. 엄연히 정무 보는 중입니다.”

“싫으셨습니까?”

노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의 표정에선 약간의 서운함, 수줍음과 함께 ‘싫을 리가 없을 텐데’라고 말하는 듯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알 수 없는 패기와 박력에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싫은 게 아니라 집무 중에 이러는 것은―.”

쪽. 노마가 기어코 입을 맞췄다. 하여간 그는 은근히 고집불통이었다. 무해한 얼굴을 하고 눈치 보는 척만 하지, 가만 보면 은근슬쩍 하고 싶은 건 다 했다.

문제는 내가 그 행동에 화가 치밀지 않고 아쉬움을 느낀다는 거였다.

노마는 혼란스러움으로 구겨졌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종종 이렇게 사람을 뚫을 것처럼 쳐다볼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뭔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그가 마침내 얼굴을 붉혔다.

“제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주셨으니. 답례입니다.”

시키지도 않은 부끄러운 말은 골라서 하는 주제에 끝내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것 하나는 참 한결같았다. 덕분에 아까부터 달아오른 내 얼굴도 식을 줄을 몰랐다.

‘낮에 나를 보면 좋아하는군.’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성혼식에서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노마를 행복하게 만들 방법 100가지’를 목록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노마가 뭘 좋아하고 어떤 때 기뻐하는지 관찰한 끝에 목록을 다 채우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기쁨을 느끼는 것들은 하나같이 참 소박해서 목록을 채우는 일이 쉽기도 했다.

목록엔 그가 흰색과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것이나, 장터처럼 시끄러운 곳을 은근히 좋아하는 것, 테렛사를 좋아한다는 내용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록 중 하나가 바로 노마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별것도 아닌 걸 선물이라고 좋아하는 그에게 줄 만한 것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잠시만 있어 봐요.”

내 말에 노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책상 구석에 놓인 작은 보석함처럼 생긴 상자를 들고 그에게 돌아왔다. 언젠가 아치가 오면 한 알씩 주려고 둔 설탕 과자를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맨날 보는 내 얼굴이 뭐가 선물이라고. 이런 게 선물이지.’

나는 내 순발력을 자화자찬하며 보석이 알알이 박힌 상자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노마가 순수하게 놀란 표정을 하며 상자를 바라봤다.

“이게 뭔가요?”

“설탕 과자입니다. 단것을 좋아하잖아요.”

한껏 의기양양한 얼굴로 노마를 보자 역시나 그가 얼굴에 빗금을 그어 가며 웃었다. 기대한 반응이 나오자 가슴께부터 만족감이 퍼졌다. 나도 모르게 올라갈 뻔한 입꼬리에 힘을 주며 노마가 상자를 받아 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노마가 대뜸 곱게 눈을 감고 허리를 숙였다. 나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여기까진 예상하지 못한 나는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그러나 곧 저 행동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마 덕분에 낯부끄러운 일에 빠삭해졌기 때문이다.

‘먹여 달라는 거구나.’

그렇다고 그 행동에 면역이 생긴 건 아니었다. 나는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췄고, 인내심 많은 노마는 같은 자세로 기다렸다.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머릿속에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뭐 어때. 그냥, 넣어 주는 건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그라드는 일도 아니라고. 그는 내게 잘만 먹여 주잖아?’

무엇보다 노마가 먼저 먹여 달라고 입을 벌리지 않았나.

그게 그가 원하는 거라면 답은 이미 나왔다.

나는, 그가 웃는 걸 다시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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