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에리카는 신속하게 마차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마차 문이 닫히기 전, 시모어 부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속사포로 쏘아붙였다.
“내 보기엔 너도 가주님과 다를 바 없어. 이게 편하다느니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이 두려워 피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부인.”
“당연히 뒷일도 생각하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수많은 가정 중 하나에 묶이면 아무것도 못 해.”
“아―. 어머니.”
“시모어는 겁쟁이를 쳐주지 않아.”
“…….”
“그럼 일주일 후에 보자꾸나. 가주님 잘 모시고 있어라.”
“……예, 부인. 조심히 다녀―.”
형식적인 인사는 받지 않겠다는 듯이 탁― 하고 마차 문이 닫혔다.
그대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에리카가 허,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짧은 시간에 말 그대로 뼛속까지 탈탈 털린 기분을 느꼈다.
에리카는 아이사의 심술 덕분에 해리 폴른과 8년 연애한 사실을 어머니, 시모어 부인에게 들킨 바 있다. 그 뒤로 내내 이런 식이었다. 어떤 대화를 해도 마지막엔 언제나 해리 폴른으로 끝났다.
귀축이라고 불리는 에리카도 그 잔소리를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녀는 급기야 며칠째 민첩하게 시모어 부인을 피해 다녔지만, 하나 남은 자식 입장에서 오늘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시모어 부인은 속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에리카는 그녀가 저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그날에 묶여 있을 필요 없다. 누릴 건 누리자.
분명 시모어 부인의 말엔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에리카 역시 머리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에리카는 결혼만큼은 꺼려졌다. 정확히는 옆에 있다 사라질 사람이 늘어나는 게 두려운 것이 맞았다.
다시 한번, 시모어 부인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하여간 귀축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야.’
우연히 살아남은 서부 사람들은 대부분 묘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갔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단 죽어 나간 사람들의 복수가 삶의 이유였다.
그땐 그래야 그나마 살 수 있었고, 지금은 그게 습관이었다.
즐거우면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행복하면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행복을 주는 것을 멀리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듯이 상단을 키운 것은 아이사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시간이 꽤 지난 지금,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도 많이 옅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시간이 지난다고 그날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해리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계기를 떠올렸다. 계기는 정말 별거 없고 아름답고 풋풋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모두의 복수심이 절정을 달리고 있던 때에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복수심은 좋은 원동력이었으나 정신이 마모되기 좋았다.
에리카는 쌓일 대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마침 눈에 보이는 게 갓 성년을 넘긴 미남자 해리 폴른이었다. 그뿐이었다.
“보, 보좌관님…….”
평소 표정 변화 하나 없는 해리 폴른은 뭐가 그렇게 슬픈지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울고 있었다.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한 에리카는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미남의 우는 얼굴은 말도 못 하게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눈물 가득한 해리 폴른 경의 눈은 호수요, 꼴은 비 맞은 강아지였다. 또 마침 에리카는 맥포이의 가신답게 미인에 약한 편이었다.
술기운이 오른 에리카가 그대로 해리에게 입술 박치기를 한 것이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보좌관, 아니, 에리카 님. 안 됩니다!”
당시 매우 순진했던 해리 폴른 경은 속수무책으로 연상의 에리카에게 휘둘렸다. 가벼운 불장난으로 시작한 만남은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었다.
“에리카, 안 됩―!”
정신 차리고 보니 1년이 8년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리카는 순진한 총각을 가지고 논 쓰레기라는 질타를 전면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엔 잘생긴 남자와 한번 놀아 보려는 심보로 접근한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 에리카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해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녀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해리 폴른은 에리카 시모어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 지 한참이었다.
에리카는 아이사보다 철두철미한 계획형 인간이었다. 가볍게 만나기 시작한 해리가 이렇게까지 소중한 사람이 된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라 실은 그녀도 매우 당황스러웠다.
결혼은 무슨, 에리카는 애초에 더는 소중한 사람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잃을 것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뭐,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에리카는 해리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꽤 쿨하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렇다 보니 결혼은 에리카의 마지노선,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제길. 결혼까지 한다고 치자. 해리가 가족이 됐다고 해. 그런 다음에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해리를 잃게 되면 또 나만―.’
소식을 듣고 성년식을 채 치르지도 못한 채 시모어 부인과 다시 맥포이로 돌아왔을 때. 에리카가 마주한 것은 셀 수 없는 시신이었다. 그 사이에서 가족의 시신을 온전히 묻기는 어려웠다. 세월이 흘렀다고 잊을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에리카는 멈칫했다. 그녀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미친 생각이지. 이러는 게 내 손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시모어 부인이 말한 ‘혹시 모를 미래가 두려워 피하는 겁쟁이’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시모어 부인 입으로 듣자 에리카는 더욱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X 같은 닉스 새끼. 비실거리는 낯짝으로 잘도 사람을 10년 넘게 괴롭히는군.”
아이사가 노마 디아시에게 끌리면서 기를 쓰고 아닌 척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에리카는 제 주인이 어리숙한 여덟 살짜리 같다고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본인 마음을 거부할 필요가 있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주님이 이런 기분이셨겠군. 그만 갈궈야지.”
그러나 막상 남 일 같던 결혼이 제 문제가 되자, 새로운 사람을 옆에 두는 일이 더럽게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오늘도 평화로운 맥포이의 본성. 본성 중앙부 깊숙이엔 맥포이 가주가 종종 집무를 볼 때 사용하는 서재가 있었다.
서재로 치면 뒤편, 화단 쪽 경비를 선 기사 두 명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들은 나름 한직으로, 교대 시간까진 얼마 남지 않아 슬슬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기척을 숨기고 코앞까지 다가온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조는 건가?”
“헉! 예? 아니―!”
노마가 목소리를 높인 기사의 입을 턱 막았다.
입이 막힌 기사는 혼비백산한 와중에 눈앞에 있는 남자의 청량한 체향과 아름다운 얼굴에 넋을 잃었다.
그건 바로 그 옆에 서 있던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행히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노마가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며 어벙한 기사들과 한 명씩 눈을 맞췄다. 퍽 은밀해 보이는 그의 행동은 여러 사람 홀리는 것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
“목소리를 낮추게.”
노마가 속삭이자, 두 기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마는 그제야 빙긋 웃으며 기사의 입에서 손을 떼고 한 발짝 멀어졌다.
“부군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가주 부군, 안주인 마님, 디아시 경, 맥포이 경 또는 공, 노마 님 등으로 불리는 고귀하신 분이 뜬금없이 제 눈앞에 나타나자 입이 막혔던 기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작게 물었다. 어리숙한 모습에서 신입 기사인 티가 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기사가 신입 기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하며 속닥거렸다.
“경은 눈치가 없나? 가주님 보러 오신 것 아니야.”
한껏 눈치 있는 척한 기사는 실은 경비를 서다 이미 노마를 이런 식으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예? 왜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가주님을 방해할 순 없으니, 오늘도 멀리서 얼굴만 보고 가겠다. 가주님껜 비밀이야.”
노마가 재차 검지에 손을 올리며 웃는 낯으로 속삭였다.
“예, 경.”
“다음부턴 졸지 말고. 그대들은 맥포이 기사잖아.”
노마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지나쳤다. 여전히 화사한 얼굴과 다르게 목소리는 싸늘했다. 두 기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요컨대 천사의 얼굴을 한 남자의 말뜻은, ‘지금 이 안에 너희들이 지켜야 할 맥포이가 있는데 졸다니 미쳤구나’였다.
두 기사는 도그만 경처럼 차라리 지옥에서 온 얼굴을 하고 화를 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노마가 그들을 지나쳐 갈 때까지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노마가 멀어지자 신입 기사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위튼 경.”
“왜 그러나.”
“가주님께선 서재에서 집무를 보실 땐 창을 다 막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보시려고 그러죠?”
“난들 알겠나. 알아서 하시겠지.”
위튼 경은 오늘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노마를 마주쳤다. 돌아가면서 곳곳에 경비를 서는데도 벌써 세 번이나 노마를 마주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매일 저렇게 가주님 얼굴을 보러 다니는 게 분명했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본 얼굴일 텐데, 하녀들이 떠드는 것처럼 천년의 사랑이 따로 없군.’
위튼 경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 일로 부디 노마에게 찍히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맥포이 가주는 특히나 중요한 기밀문서를 처리할 때 중앙 깊숙이 위치한 서재를 사용했다. 그 서재엔 누가 드나드는지 볼 수 없게 모든 창문에 가림막이 있었고, 무엇보다 비밀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직 그런 사실까지 몰랐던 노마는 철통 보완에 적잖이 당황했다. 창문을 죄다 가린 가림막 덕분에 아무리 노마라도 아이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맥포이에 장가를 오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을 묻는다면, 노마는 단연 아이사가 보고 싶을 때 슬쩍 자리를 이탈해 그녀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것을 첫째로 뽑았다. 물론 그는 바로 이 점을 노리고 가주 부군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
노마는 그동안 갈고 닦은 검기와 성력을 남몰래 그녀를 찾아갈 때 사용하고 있었다. 낮 동안 볼 수 없다며 온갖 가련한 척을 해 그녀의 밤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실은 노마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아이사의 얼굴을 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노마는, 기대한 만큼 실망했다. 그는 오매불망 가림막을 쳐다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투시 능력이 없었다. 기척으로 보아 가림막 너머에 세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때 기척이 줄어들고 한 사람분의 기척만 느껴졌다. 그 기척이 몹시 익숙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이사다.’
노마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그 기척이 정말 그녀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놀랍게도 기척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노마는 몰래 찾아온 주제에 다가오는 기척에도 숨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척이 다가올수록 그는 기척의 주인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려라.’
두근두근. 노마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작은 소원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소원에 응답하듯, 가림막과 함께 창문이 힘차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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