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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89화 (89/139)

89.

“생긴 게 계집인지 사낸지 구분도 안 되는 흰죽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몸도 내가 더 좋더만.”

“그런데 대장, 솔직히.”

양손에 얼굴을 묻은 가노가 무심코 중얼대자 퍼시가 끼어들었다. 그는 제 대장을 따라 맥포이 가주의 성대한 성혼식을 먼발치에서 훔쳐봤던 날을 떠올렸다.

사람 머리가 엄지손톱만 하게 보이는 거리에서도 맥포이 가주 부군이 된 노마 디아시의 얼굴은.

“남자인 저도 반하겠던데요. 성별을 불문하고, 저는 그렇게 생긴 사람은 정말 난생처음 봤습―.”

가노가 손가락 사이로 도대체 누구 편인지 모를 퍼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뒤늦게 그 눈빛을 눈치챈 퍼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 물론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죠! 남자 하면 역시 몸 아니겠습니까? 제 눈엔 누가 뭐래도 육체미의 정수인 대장이 최고십니다!”

“네놈 눈에 최고여서 뭐 하는데. 그만 닥치고 꺼져.”

가노는 이미 늦었다는 듯이 눈을 감아 버렸다. 당황한 퍼시가 허겁지겁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디 여자가 맥포이 가주뿐입니까? 걱정 마십쇼, 대장! 이렇게 된 거 제가 오늘 최대한 가주를 닮은 여자를 찾아서―.”

“이 쓰레기 새끼.”

결국 퍼시의 복부에 가노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비명도 못 지른 퍼시가 느릿하게 모래 위로 넘어갔다. 그는 생리적인 눈물을 쏟으며 한동안 모래 위에서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끄으으…….”

퍼시는 좀 억울했다. 그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상관을 위로하고자 꺼낸 말인데 별안간 얻어맞은 격이었다. 무엇보다 가노에게 ‘쓰레기’라는 말을 들은 게 퍽 억울했다.

물론 누구보다 난잡하게 놀던 가노가 갑자기 제국의 보수적인 귀족 청년이라도 된 양 가식을 떤 지 꽤 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문란한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 박힌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가노 하면 여전히 여러 여자들에게 쓰레기의 대명사로 통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구 이름에 대고 그런 난잡한 소리를. 꼴 보기 싫으니 당분간 눈에 띄지 마라. 꺼져.”

어느새 몸을 일으킨 가노가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아직 모래사장을 구르는 퍼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가노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퍼시가 다급하게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어흑, 저, 대장.”

가노는 분노로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제 부관은 기어이 오늘 죽고 싶은 모양이었다.

“악! 잠시만, 잠시만요! 대장, 그게 아닙니다! 보고요! 보고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가노가 퍼시를 가차 없이 걷어찰 요량으로 붙잡힌 다리를 들어 올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퍼시가 황급하게 외쳤다.

‘보고’라는 말에 다행히 가노가 천천히 다리를 내려놓았다. 간신히 걷어차일 위기에서 벗어난 퍼시는 남몰래 안도했다.

“우리 상단주 서신 못 봤나? 나 휴가야. 다음에 해.”

실은 만사가 귀찮아진 가노였기에 퍼시를 걷어차는 일조차 귀찮을 뿐이었다. 그는 다리를 터는 것으로 가볍게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손을 떨쳐 냈다. 그러곤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메르케시! 메르케시 황녀 말입니다.”

“……그 미친 여자는 또 왜.”

그러나 퍼시의 목소리가 또다시 가노를 멈춰 세웠다. 그가 천천히 퍼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가노에게 메르케시 황녀는 완전히 또라이, 미친 사람이었다. 재수 없게 사람 속을 긁어 대던 흐릿한 인상을 떠올리자 그는 또다시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움직였습니다.”

“뭐야? 설마 제국에 들어갔나?”

그제야 가노가 평소처럼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곧 황태자 성년식이었다. 메르케시가 이 시기에 제국에 들어갔다 눈에 띄면 곤란했다.

“아니요! 그게, 그녀가 지금 오기아에 있습니다.”

“……뭐?”

바짝 긴장했던 가노는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곧 그 기분은 빠르게 분노로 치환됐다.

“방금, 첫 배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미친 여자가 설마 날 따라 들어온 건 아닐 테고.”

“육로로 이동해서 저희 쪽보다 늦게 오기아에 도착했을 뿐이지, 경로를 보면 한참 전부터 이곳을 향해 이동한 것 같습니다.”

“하! 별 또라이 같은 황녀를 다 보겠군. 유폐된 황녀가 오기아에 와?”

가노는 짐승 같은 촉을 지닌 사내였다. 그의 촉이 간만에 얻은 휴가는 완전히 망했다고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가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쩐지 매우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기랄…….”

선박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는 오기아의 조그마한 항구 쪽을 바라보며, 가노가 습관처럼 욕설을 읊조렸다.

* * *

시모어 모녀가 간만에 단둘이 중정을 거닐었다. 모녀 사이에는 무서운 침묵이 감돌았다. 두 모녀와 마주친 사용인들은 심각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그들을 한 번씩 흘끗 쳐다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절대 다투거나 마음 상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죽음 같은 침묵은 그저 시모어 부인과 에리카가 평소에 필요한 말 외엔 잘 하지 않아서였다.

그런 두 사람이 오랜만에 함께 걷고 있는 이유는, 시모어 부인이 몸소 서부 신전에 방문하기 위해 잠시 성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주일간 서부 신전과 주요 사원을 들를 예정이다.

시모어 부인은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고 싶다며 수행 인원을 대폭 줄여 버렸다. 에리카는 별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호위가 너무 부족한 것 아닙니까?”

“충분하다. 이 늙은이 하나 호위한다고 부대 하나를 움직일 순 없지.”

“…….”

“너도 바쁠 텐데 마중은 이만하면 됐다.”

“제가 도개교까지 마중을 나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마차 앞인데요.”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렴. 참, 가주님 탄신 연회 준비는 어떠니.”

“예년처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시모어 부인이 직접 서부 신전과 사원에 방문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곧 있을 맥포이 가주의 탄신일 때문이었다.

이번에 맥포이의 안주인이 된 노마도 함께 가는 것이 보기 좋을 테지만, 시모어 부인은 이쯤에서 그에게 안살림을 온전히 맡겨 보고자 혼자 떠나기를 택했다. 또 일주일간 아치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노마 님이 있어서 다행이지. 도련님을 두고 이렇게 빨리 마음 편히 성 밖에 나갈 수 있을지 몰랐구나.”

“도련님께서 그분을 퍽 잘 따르시죠.”

에리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마는 아이사와 별개로 아치를 정말 예뻐했다. 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천성인 듯했다.

“벌써 맥포이에 완벽히 적응하신 모양이고.”

“솔직히 어디에 데려다 놔도 사랑받고 살 분이 아닙니까. 알고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십니다. 가주님께서 처음 그분 입지를 위해 이것저것 신경 쓰신 것도 다 쓸데없었습니다.”

“그래. 처세술이 뛰어나신 분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좋구나. 순하기만 해선 안주인 역할을 하지 못하니.”

시모어 부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후후,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제 어머니의 옅은 웃음소리에 에리카는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는 그냥 노마 디아시가 마음에 드신 거 같군.’

“또 영악하시면 어떤가. 그분이 우리 가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이 내게도 느껴지는데. 그거면 됐지.”

제 어머니 입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낯간지러운 말이 이어지자, 에리카는 결국 팍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행복이 사랑은 아니지. 하지만 나는 우리 가주님처럼 자신을 채찍질밖에 못 하는 분에겐 필요하다고 본다.”

확실히 에리카가 보기에도 노마는 아이사 몫까지 아이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 말인즉슨, 제삼자가 볼 때 그런 주접과 유난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모어 부인에겐 마냥 어여뻐 보이는 것들이었다.

에리카는 똥 씹은 표정을 한 채 아무런 긍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모어 부인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에리카.”

“예, 말씀하세요.”

“우리는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지.”

“……무슨.”

“잊으면 안 된다고 얼마나 스스로 채찍질을 했는지 몰라. 가주님께선 우리보다 더하셨다.”

“안주인 마님 이야기를 하시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하세요.”

“난 가주님께서 그것에게 납치당하고 일주일 동안 그 세월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가신으로서 유모로서 뭐 하나 후회스럽지 않은 게 없었어.”

말해 뭐 하나. 에리카 역시 그렇게 죽으시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숨을 쉬듯이 한탄하며 아이사를 기다렸었다.

“그날을 잊을 수 없지. 잊어선 안 되지.”

시모어 부인은 11년 전의 참사에서 에리카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을 잃었다. 남편, 큰딸과 사위, 손자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어 온 소중한 인연 대부분이 한날한시에 떠났다.

그건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성년식을 위해 어머니와 바그다트로 떠난 덕에 참사를 피한 것은 당시에 그저 불행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우리도 자기 인생을 살아도 될 것 같더구나.”

“…….”

“그날만 보고 살기엔 또 소중한 것들이 많이 생겨 버렸지 않니.”

에리카는 불현듯 해리 폴른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마냥 느슨해질 수는 없지만……. 기껏 제국 최고 부자에 오르시고 최고 미남자를 부군으로 들이셨으니, 나는 가주님께서 하루 중 반이라도 그분 인생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제가 알기로 우리 가주님께선 이미, 하루 반 이상을 부군과 뒹굴고 계실 텐데요.’

아련함도 잠시, 에리카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당장 어머니의 말에 딴지를 걸고 싶었으나 고상한 그녀 앞에서 발언을 아끼기로 했다.

“너도 요즘 가주님 표정 보았지. 그분을 갓난아기 때부터 돌봤지만 난 그렇게 정신 쏙 빠진 아이사 님은 처음 봤다.”

“예. 그렇게 얼빠진 얼굴은 저도 처음 봤죠. 그래도 ‘그 애’를 쳐다볼 때와 비슷하시긴 합니다. 왜, 둘 다 반짝이는 것이 맥포이가 맥을 못 추는 유형이잖습니까.”

에리카의 불손한 말투와 더불어 ‘그것’에 이어 ‘그 애’가 나오자, 시모어 부인이 드물게 미간을 좁혔다. 이내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에리카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쨌든 말이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시모어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리카는 오늘의 어머니는 드물게 수다스럽다고 생각했다.

“가주님께서 마음이 가시는 걸 숨기지도 못하시면서 지레 겁먹고 밀어 내려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이 늙은이의 마음이 다 아프다. 노마 님 마음은 어떻겠니.”

“노마 님이…… 걱정되세요?”

“그럼. 이제 그분은 맥포이시지 않니.”

시모어 부인이 생각보다 더 노마를 아끼는 모습에 에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오늘따라 감성이 넘치는 어머니에게 또다시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에리카.”

“뭐가 말입니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너도 더 늦기 전에 누릴 수 있는 건 누려라.”

“충분히 누리고, 있는데요.”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긴. 난 널 그렇게 멍청하게 키우지 않았다.”

에리카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조그맣게 항변하자 시모어 부인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정색을 했다.

“해리 폴른 경 말이다.”

그렇게 덧붙인 시모어 부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마차에 올랐다.

‘제길.’

기어이 어머니 입에서 연인의 풀 네임이 나오자 에리카는 대놓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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