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88화 (88/139)

88.

나는 노마에게 구구절절 몸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조금이라도 불리해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내게 자세한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나와 그는 독하지만 효과 좋다는 동대륙의 피임탕을 매일같이 들이켜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어려운 몸이라고는 하지만 나 역시 강박적으로 피임탕을 마시고 있는 이유는, 혹시나 아이가 생겼을 때 이래저래 복잡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라니. 내게 아이라니.

가주가 된 후 나는 한 번도 임신과 출산을 내 인생 계획에 넣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와 노마 사이에 아이라니.

솔직히 노마 디아시가 날 사랑한다는 것이나 그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애라니. 그거야말로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아닌가?

사랑이나 연애, 결혼도 그렇지만 아이야말로 내겐 미지의 영역이었다.

와중에 의도치 않게 매일 합방을 치르는 바람에 피임탕을 마시는 것이 새로운 일과가 돼 버렸으니, 에리카가 걱정을 할 만도 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 없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에리카는 들고 있던 종이를 한 장 넘기며 심드렁히 덧붙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라고 하셨으니 금방 질리시겠죠, 뭐. 언제나처럼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 아이처럼 남몰래 침을 삼켰다. 그사이 에리카가 내 앞에 종이를 들이밀었다.

“다음은 넥타 왕국입니다. 보고는 웬일로 가노 님 부관이 올렸더군요. 퍼시 말입니다.”

“그래.”

나는 항상 가노 옆에서 그를 뜯어말리던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의 남자를 떠올렸다.

어색하게 검은 물을 들인 머리칼 때문에 겉보기엔 누가 봐도 양아치 같았지만 돌발 행동이 잦은 가노를 달래기 위해 고생깨나 하고 있는, 나름 건실한 해적이었다.

“보시다시피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날 많이 혼내셨습니까?”

나는 그날은 언제고 누굴 혼냈냐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어제만 해도 내가 혼낸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에리카가 종이를 넘겨 내 앞에 펼쳐 놓았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노였다.

동시에 청혼을 말아 먹었던 뼈 아픈 추억이 떠올라 내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리는 동안 내 미간은 더욱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휴가? 달포?”

“예. 가노 님이 달포나 휴가를 요청했습니다. 뭐, 넥타 왕국과 거래도 안정 궤도에 올랐으니 허락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시위하는 건가?”

“예?”

“지가 뭘 잘했다고 휴가를 내지?”

“역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에리카는 그날 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저 내가 노마에게 청혼하기 직전, 가노가 탑에 난입하는 바람에 나의 청혼이 망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에리카 역시 밤잠 줄여 가며 내 청혼 준비를 도왔기 때문에, 당시 그녀 역시 굉장히 가노에게 분개했었다.

“알 게 뭐냐, 그 쌍놈의 새끼! 그거 완전히 개자식이다. 사람을 물어뜯으려 들고 말이야.”

“…….”

예상보다 길게 가는 아이사의 분노에 에리카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저렇게 화가 나신 줄은 몰랐는데.’

가주님의 망한 청혼은 에리카 입장에선 지난 일이었다. 거의 두 달 전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자신의 청혼이 망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에리카는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다.

물론 에리카는 아이사가 말한 ‘물어뜯으려 했다’는 표현이, 문자 그대로 이빨로 물어뜯으려 했다는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아이사가 비유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가노의 평소 행동과 말투는 해적답게 거칠긴 했으나, 에리카가 보기엔 그는 아이사가 닳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난을 떨기도 했다.

때문에 설마 그런 가노가 아이사의 입술을 물어뜯으려 들었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하. 단순히 가노가 나타나는 바람에 청혼을 망친 게 아니라, 탑 위에서 대판 싸우다 망치셨나 보군. 애들도 아니고.’

에리카는 가노가 아이사의 결혼 때문에 마음이 상했고, 하필이면 그녀가 외간 남자에게 청혼하려는 모습을 보고 제 성질을 못 이겨 그대로 가주님과 싸웠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가주님께서 결혼하든 말든 상관없는 척하더니 결국 못 참았나. 내 생각보다 가주님을 향한 가노의 마음이 진지하군.’

아이사는 여전히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고 있었다. 마냥 분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에리카는 가노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양쪽 다 생각보다 오래가겠는데? 그럼 가노는 이대로 한동안 오기아에 처박혀 있을 생각인가.’

가노가 에리카에게 사람을 붙여 놓았듯 그녀 역시 그에게 개인적으로 사람을 심어 놓았다. 그 정보원에 의하면, 가노는 몇 년간 출입하지 않던 ‘오기아’에 들어갔다고.

오기아라고 하면 365일 부어라 마셔라,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르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는 유흥의 섬이었다.

퇴폐와 향락의 끝. 괴로운 현실을 잊기엔 제격이었다.

‘두 분 사이의 골이 너무 오래가면 좋지 않은데.’

가노는 수완이 좋았고 그가 붙들고 있는 상단 일이 많았다. 맹약으로 묶인 신분이니 차였다고 홧김에 맥포이와 맺은 동맹을 깰 수는 없겠지만.

에리카는 모쪼록 그가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길 바랄 뿐이었다.

* * *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눈을 떴다. 초여름에 접어들고 짭짤한 바람엔 끈기가 어려 눈을 뜨기 쉽지 않았다.

“……바람이 짜다.”

가노가 까슬한 모래에 얼굴을 비볐다. 간밤에 새벽까지 술을 마신 그는 오기아에 잡아 놓은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태 해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빈 술병들이 그와 함께 사이좋게 모래 위를 뒹굴었다.

‘아……. 잡을 데가 어디 있다고 그 허리랑 손목을 그렇게 잡았지. 그러지 말걸.’

가노는 그날 이후 내내 후회 중이었다.

‘목 물렸을 때 표정은 또 어떻고. 날 완전히 변태 보듯이 봤어. 물지 말걸.’

탑에서 아이사와 싸운 뒤로 시간이 꽤 흘렀으나 겁먹은 그녀 얼굴, 격분한 그녀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 긴 세월을 어떻게 참고 또 참았는데. 그 잠깐을 못 참아서 단숨에 눈 밖에 나다니. 이건 꿈이야.’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으며 자유로운 만남을 즐기던 가노에게 인생 첫 실연은 생각보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오, 여우 같은 새끼. 그때 그 재수 없는 낯짝을 한 대 쳤어야 했는데.’

탑에서 내려가다 마주친 노마 디아시 앞에선 온갖 센 척을 했지만, 가노는 아이사에게 뺨과 인중을 얻어맞은 날 이후 며칠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장!”

‘아이사 그 나쁜 계집애. 여자처럼 허연 놈 뭐가 좋다고 그놈만 싸고돌고.’

“아, 대장!”

‘내가 지한테 어떻게 했는데!’

가노가 한 일이란 아이사가 성년이 된 후에 멋대로 수절을 시작하고 그녀에게 들이댄 것이었다. 물론 아이사는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이 없다.

“대장, 정말 속상하게 왜 이러세요! 하다 하다 길바닥 걸인도 아니고 여기서 주무시면 어쩝니까.”

가노가 끝도 없이 찌질해지기 직전, 그를 찾아 오기아의 모든 해변을 뒤진 그의 부관 퍼시가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퍼시는 더 이상 제 대장에게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슬펐다.

뭇 해적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그가 해변의 말린 해초처럼 늘어진 모습을 본 순간, 퍼시는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퍼시는 여전히 모래 위에 늘어져 있는 가노를 짤짤 흔들었다. 그러나 가노는 귀찮다는 듯이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그만 일어나십쇼. 맥포이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그 말에 가노가 벌떡 일어났고, 퍼시의 마음이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찢어졌다.

“뭐? 뭐라 하더냐?”

거뭇한 수염 자국에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가노가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워지는 반응에 퍼시는 와작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의 손에 돌돌 말린 서신을 쥐여 줬다.

가노가 허겁지겁 서신을 펼쳐 들었다. 맥포이 가주 직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에리카도 아니고 아이사가 직접 보낸 게 확실했다.

“휴가, 쓰랍니다.”

“…….”

“……덧붙여서 당분간 꼴 보기 싫다고 하십니다.”

퍼시는 조금 머뭇거렸으나 가감 없이 서신의 내용을 요약했다. 그는 무력이 대단하진 않지만 언어에 능통했다. 그가 가노의 부관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만……. 나도 그 정돈 읽는다.”

가노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못된 마녀 같으니. 우리 대장 좀 받아 주지.’

퍼시는 제 대장이 여기서 더 망가질까 봐 두려웠다. 대장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 못되게 구는 아이사 맥포이가 미울 지경이었다.

물론 맥포이 가주 잘못이 아니며, 그녀에게 가노를 받아 줘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노가 안쓰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이 상한 퍼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장. 이왕 휴가를 받으신 김에, 차라리 예전처럼 화끈하게 놀면서 머리를 식히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닥쳐. 속 안 좋으니까.”

“대장이 얼마나 인기가 많으신데요. 아직 그 인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또 오기아에 미녀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만 해도 제게 대장 행방을 묻는 여자들이 몇 명이었는지 아십니까? 맥포이 가주보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욱한 마음에 선을 넘은 퍼시가 합, 입을 다물었다. 가노가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주먹이 날아왔을 것이다.

기력 없는 늙은 맹수의 눈빛이었으나 퍼시가 겁을 먹기에는 충분했다. 퍼시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퍼시가 슬슬 눈치를 보는 사이, 가노는 다시 죽은 듯 모래사장에 몸을 늘어뜨렸다. 사실 가노가 오기아에 온 이유는 퍼시가 방금 말한 대로였다.

잘나가던 그 시절처럼 수십 명의 미녀 틈에서 정신없이 놀다 보면, 다시 아무나 만나도 괜찮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아이사에게 뺨을 맞고 쫓겨난 충격이 가실 것 같았단 말이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오기아에 왔으나 모든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수절한 세월을 증명하듯, 아무 여자와 가볍게 놀 수 없는 몸과 마음이 되고 만 것이다.

‘제길, 제길, 제길!’

가노는 괴로움을 느끼며 모래 위에서 발버둥 쳤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쁜 년.’

다시 한번, 아이사는 가노에게 딱히 무슨 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날 남자로 안 볼 수 있지. 맨날 서류만 보다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가노는 지금껏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특히나 가노가 매력을 느낀 상대는 언제나 먼저 그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는 제게 이성적 관심이라곤 티끌도 없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사가 별안간 나타난 여우에게 홀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꼴을 봤을 때의 심정이란……. 가노는 그녀가 사랑의 ‘ㅅ’ 자도 몰랐을 적이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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