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아니, 어제 식사 중엔 우리 가주님께서 부군 얼굴을 보시면서 웃으셨다니까? 내 말은, 평소처럼 비웃거나 화나서 웃으신 게 아니라 정말 다정하게 말이야!”
“세상에! 너 그럼 이건 아니? 두 분만 계시면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르시는 것 말이야. 내가 동쪽 서재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내가 있는지 모르셨는지 두 분이 글쎄!”
“얘, 내가 정원에서 본 건 말이야, 부군께서 남몰래 가주님 볼에―.”
어제는, 그제는!
사용인들은 가주 부부를 목격하는 족족 한데 모여 주책맞게 두 분에 대해 떠들어 댔다.
“하지만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바로 이거 아니겠니!”
옹기종기 모인 무리 중에 연배 있는 하녀가 검지를 높게 치켜들고 외쳤다.
“우리 가주님께선, 당신께서 부군을 바라보실 때 어떤 표정을 하고 계신지 아직 모르신다는 거지!”
그러자 주위에 모여 있던 하녀들이 하나같이 풀어진 얼굴을 하더니 일제히 이마를 짚고 외쳤다.
“……어쩜, 귀여우셔라!”
사용인들은 특히 가주님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기겁을 하는 동시에 몹시 즐거워했다.
무시무시한 소문이 나 있는 맥포이 가주는 의외로 서부에서만큼은 인기가 좋았다. 서부 사람들은 제국 역사 이래 영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영주에게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그분을 직접 모시는 본성 사람들의 경우, 성주의 인기는 더욱 높았다. 그들은 사악한 소문과 다르게 조그마한 몸집에, 퉁명하지만 제 사람은 잘 챙겨 주는 가주님을 퍽 아끼고 사랑했다.
‘작고 소중한 우리 가주님!’
주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성을 가꾸는 그들이니, 친절하지 않은 양철 인형처럼 삐걱대는 가주님에게 기름칠을 해 줄 사람이 언젠가 나타나기를 한마음 한뜻으로 바라 왔다.
그러니 가주님께서 필립 모퍽과 같은 쭉정이와 지지부진한 약혼 관계를 이어 온 5년은 그들에게 암흑기였다. 모퍽 소리만 들어도 모두 가슴을 내리치며 한숨을 쉬었다.
마침내 그 암흑기가 끝나고, 기름칠을 넘어서 양철 인형을 아주 말랑하게 녹여 버리는 남자가 맥포이에 등장할 줄은 그들도 몰랐다.
쏟아지는 신혼부부의 일화는 전부 주옥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뽑은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가주님의 반응이었다.
‘당신도 모르게 말랑해져 버린 우리 가주님이라니!’
지켜보는 입장에서 하루하루 함락당하는 중인 가주님이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 서부에 널리 퍼진 맥포이 가주 부부의 소문보다 더한 것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두 분이 급기야 부부의 의무 중에 작정하고 부수려 해도 부수기 어렵다는 장인의 침대를 파손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에리카는 오늘도 기어코 정오를 훌쩍 지나 집무실에 등장한 아이사를 동태눈으로 쳐다봤다. 곧 그녀가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는 정적을 깼다.
“오늘은 기어이 침대 머리를 부수셨더군요. 귀하신 두 분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부수다니?”
아이사는 에리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망할 ‘사랑해요’를 떠올리지 않고 정무에만 집중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화려하기 짝이 없는 침대 머리를 떠올린 순간, 아이사의 낯빛이 곧 허옇게 질려 갔다. 드문드문 끊긴 어젯밤의 기억 속에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아이사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녀에겐 어젯밤 더 못 버티고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지기 직전, 머리맡에서 땅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세상에. 그게 침대 머리가 부서지는 소리였다고? 도대체 뭘 한 거람?’
“예. 침대 머리 상태를 보면, 안주인 마님께서는 인간은 아닌 듯합니다.”
충격에 빠진 아이사에게 에리카는 경멸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사 역시 노마 디아시가 반인반수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맞장구칠 정도로 넉살이 좋지 못했다.
“뭘 하면 가주님께서 오전 내내 침실에서 못 벗어나시나 했는데. 매일 밤 살아 계신 것이 용한 일이었군요.”
“…….”
“복상사가 새로운 꿈이 아니라면, 적당히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누가 모르나.”
“모르시는 줄 알았죠.”
에리카가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이사는 그게 퍽 얄미웠으나 대꾸할수록 면이 서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의무만 지킬 것이라고 선은 선대로 그어 놓은 주제에,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르는 걸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나도 안다. 안다고!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손만 잡고 자기 시작해도 어느 순간 입을 맞추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순수한 민망함에 아이사의 얼굴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고개를 떨궜다.
‘염병. 가지가지들 하시는군.’
에리카는 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쯧,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곤 제 주인을 이렇게 만드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맥포이의 새 안주인에 대해 생각했다.
노마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단시간에 사용인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으로 시작해 맥포이의 가장 높은 산이라 불리는 시모어 부인의 호감까지 얻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노마가 실은 고단수의 여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방글방글 웃으면서 가노와 기 싸움을 하는 것도 그렇고, 그녀는 노마가 마냥 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에리카는 이번엔 노마의 번쩍이는 금안을 떠올렸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 앞에 서면 부끄러울 정도로 약한 제 주인을 그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생각하면 그는 더더욱 여우가 확실했다.
가련하게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아이사를 공격하는 것을 코앞에서 봐 온 에리카는 오래전에 노마의 승리를 확신하기도 했다.
‘가주님은 모르시겠지. 사용인들 사이에서 가주님이 언제 당신 마음을 알아차리실지 돈내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란 걸.’
에리카가 그런 생각 끝에 조금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혈육처럼 함께 자라 온 상사의 우당탕탕 연애에 끼어 있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매일 합방하는 것은 자제해 주십쇼. 정무가 슬슬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런 일로 야근하기 싫습니다.”
“…….”
“천년의 사랑도 이렇게 유난스럽진 않겠습니다.”
“천년의 사랑이라니. 합방이랑 사랑이 무슨 상관이냐?”
얌전히 묵비권을 행사하던 아이사가 사랑이란 단어에 펄쩍 뛰어올랐다. 누가 봐도 과민한 반응에 에리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합방은 그거지.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 단순 욕정. 사랑과는 엄연히 별개다. 내가 그것도 구분 못 할 사람 같아?”
“……언제는 저보고 순진한 해리 폴른 경을 가지고 노네 마네 하셨으면서. 가주님 발언은 더 쓰레기 같으신걸요?”
“귀족의 결혼이다. 사랑이고 자시고 감정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는 말이다.”
‘그럼 당신들이 하고 있는 건 도대체 뭔데.’
순간 짜증이 치민 에리카가 가까스로 불손하게 튀어 나갈 뻔한 말을 삼키는 사이, 아이사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하, 사랑이라니. 한가한 소리군! 내겐 그보다 더 급하고 중한 일이 많아. 그러니 사랑은 말도 안 되지. 참 나. 네가 미쳤구나.”
“…….”
“심지어 버젓이 숙적이 살아 숨 쉬고 있는데 내가 사사로운 감정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리가. 이 합방은! 잠깐의 호기심! 단순 욕정이다!”
“아, 예. 그러시군요.”
“내가 그런 가변적인 감정 따위에 정신이 팔릴 리가 없잖아? 자네 정말 이상해.”
“예에.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이사는 입 밖으로 나온 제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을 느꼈다.
‘닉스가 살아 있는 지금, 나는 언제 또다시 죽을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 또 어떻게든 망할 소설대로 흘러가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니 난 속 편히 사랑을 논할 때가 아니다.’
한편 에리카는 가주님께서 알아서 차곡차곡 업보를 쌓고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끼어들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무엇보다 귀찮은 마음이 컸다.
에리카는 대신 수석 보좌관으로서 신경 써야 할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단순 욕정. 가주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천년의 사랑이 아닙니다. 됐습니까?”
“……그래.”
“그러나 동대륙에서 들여왔다지만, 그 피임탕도 매일 드시면 좋지 않습니다.”
제길.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 그놈의 ‘부군’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어떤 화제를 골라도 불편했다.
노마 디아시와 결혼이 빼도 박도 못한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 늦은 감이 있었지만 나는 그와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합의를 보았다.
“내 후계자는 아치 하나. 아이도 아치뿐입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는 아이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더 이상 노마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나 아이가 생긴다 해도 후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꺼낸 말은 명백히 노마에게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번엔 내게 ‘목숨을 건 결투’를 요청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카를 후계자로 세운 나로선 결혼 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문제였다.
“물론 여기서 결혼을 그만두기 어렵다는 걸 알 겁니다. 그래도 다시 묻겠습니다. 나와…….”
나는 답지 않게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결혼하겠습니까?”
나와 결혼한다고 정말 당신이 행복하겠는가? 이제 와 그만두기 어렵다고 말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정신 차릴 기회를 준 것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노마 디아시는 뭐라고 답했더라.
“저는 이미 아치 공자를 제 아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당신께서 무얼 바라시든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이니.”
그때도 노마는 결혼만 하면 소원이 없는 사람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이 말했다.
“네, 저는 당신 부군이 되고 싶습니다.”
명쾌하고 빠른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한참 그를 바라봤다. 결국 고민 끝에 매번 손해 보는 선택만 하는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고, 혹시 아이가 생기더라도 후계자가 될 수 없으면 당신 입지가 튼튼하지 않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무릇 안주인의 권력은 주인의 지지에서 나오기도 했다.
“내 힘닿는 대로 아껴 주겠소.”
나는 노마 디아시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의 약속이 바로 성혼식에서 내가 노마에게 한 맹세의 시작점이었다.
사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은 이유는 아치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아이 없는 귀족 부부가 어떤 구설수에 휘말리는지 모르지 않았다. 장가온 노마만 난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노마에게 그렇게 선언한 이유는 내 몸 상태 때문이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내 몸엔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달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불규칙했고, 오래전 주치의 얀에게 임신이 어려울 것이라는 소견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랑하는 사람과 대대손손 가정을 꾸릴 계획도 없던 나는 당시 그 말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번듯한 후계자도 있겠다, 나로서는 문제 될 것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귀족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나는 소위 하자가 있는 신붓감이 분명했다. 그렇다 보니 이 문제는 내게 불편하고도 불리한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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