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하하.”
노마는 날 골탕 먹인 데 성공하면, 이젠 웃음소리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게 괘씸해 다시 그를 흘겨봤다.
와중에 붓는 일이 없는 노마 디아시의 얼굴은 보기 좋았다. 웃어? 하고 그를 위협하려던 마음에는 체면도 없는지 쏙 들어갈 정도였다.
숨 쉬듯이 요망을 떠는 저 남자에게 매번 진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전을 또 이렇게 날리다니. 이러다가 역사에 나태하고 무능한 폭군으로 기록되는 거 아니야? 롬닥도 망하고 맥포이도 망하면 어쩌지.’
어느새 노마가 떠먹여 주는 수프를 삼키며 부정적인 미래를 상상했다. 어떤 왕이 아끼는 미인에게 눈이 멀어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는 꽤 흔한 레퍼토리기도 했다.
‘세상에 그런 아둔한 자가 정말 존재할까 싶었는데. 그게 설마…….’
위기감을 느낀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급기야 내 음식 수발까지 드는 남자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니야.’
다 큰 성인에게 수프를 떠먹이는 일이 뭐가 좋다고 노마는 연신 방글방글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뿌듯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표정에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왜 그러시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음식 수발을 드는 노마와 그런 그를 경계하는 나. 어째 툴레의 노부인 집에서 머물렀을 때 노마가 병 수발 들기를 자처하며 내게 감자를 까 먹여 줬던 일이 생각났다.
그것도 벌써 지난 늦여름 때의 일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새삼 그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결혼한 것도 모자라 매일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삿된 것에 씌었는지.
“허 참…….”
“아이사, 왜 그러십니까.”
고민에 빠진 내 표정이 꽤나 귀신 같아 보인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마는 난생처음 재미난 걸 본 어린아이처럼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그저 순진한 건지 담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의 표정은 은근히 읽기 어려워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성력을 들이부어 줘도 어쩔 수 없이 비실대는 나와 다르게, 노마는 언제나 상쾌해 보이는 것도 묘한 일이었다. 아무리 저 몸뚱이와 내 몸뚱이가 천지 수준으로 차이가 나도 그렇지.
“매일같이 성력을 퍼붓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이고 그대는 그렇게 생기가 넘치는 거지?”
비결이 뭔지 모르겠으나 요즘 노마는 활기가 넘치다 못해 얼굴에선 번쩍번쩍 광채가 흘렀다.
그는 대답하기 곤란함을 느꼈는지 더 화려하게 눈꼬리를 접어 웃기나 했다. 그러곤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시늉을 하며 내게 입을 벌릴 것을 종용했다.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개수작임이 뻔했으나, 나는 부군에게 힘닿는 데까지 잘 대해 주기로 했으므로 일단 군말 없이 입을 벌려 주었다.
노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이미 반사 작용에 가까웠지만 이때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도 했다.
이번엔 노마가 능숙한 동작으로 빵 조각을 떼어다 내 입에 쏙 집어넣었다. 한동안 또다시 아기 새처럼 받아먹기만 하던 나는 결국 점점 쌓여 가는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손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매번 먹여 주는 것도 의문스러운 부분이었지만, 그보다 그는 한 입도 안 먹는단 사실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일일이 떠먹여 주는 것도 이상한데……. 그보다 당신은 왜 항상 안 먹습니까?”
“저라도 점심 식사는 아치와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조찬 자리에 아무도 오지 않아 서운했을 겁니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틀에 박힌 대사를 치면 한껏 비아냥대려고 기다렸거늘, 그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보다 낫군.”
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한 대 맞은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분위기에 심취한 건 내 쪽이었던 모양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깜찍한 조카 녀석을 잠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맥포이 가주의 집무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보니 아치를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전을 통으로 날리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날아가는 시간이 있었으니, 결혼 후 아치와 함께하기 시작한 조찬과 정기적으로 가지던 티타임이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신과 함께하는 티타임을 오후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당황하자 노마는 벌어진 내 입에 빵 조각을 쏙 넣어 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빵을 씹으며 딱히 결점이 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잠깐.’
그러다 곧, 아직 내 머리가 그렇게까지 구제 불능은 아닌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짓을 줄이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간만에 노마의 요망함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며 회심의 미소까지 띠었다.
“생각해 보니, 그보다 합방을 줄이면 되겠습니다.”
내가 제법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하자 다음 빵 조각을 준비하던 노마의 손이 우뚝 멈췄다.
“……저는.”
뚫어져라 내 눈을 들여다보던 노마가 느릿하게 운을 뗐다. 나는 그 순간 어떤 표정, 목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았다.
“당신께서 바쁘시다는 건 잘 알지만. 저는 당신을 낮에도 보고 싶고, 언젠가는 당신 손을 잡고 외성까지 나가 보고 싶습니다.”
“……컥.”
그러나 노마의 공격은 내 예상보다 훨씬 저돌적이었다. 솔직담백한 그의 소망은 사소했지만 날것이라 화끈했다.
예상치 못한 막강한 공격에 내가 연신 콜록대자 와중에 얼굴이 붉어진 노마가 자연스럽게 내게 물컵을 건넸다. 일련의 돌봄 동작은 숨을 쉬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볼 빨간 사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사육제와 성혼식 때문에 상단 일이 밀려 바쁘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끄럽지만 저는…….”
“…….”
“당신과 단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밤만 기다리고 있는걸요.”
거기까지 말한 노마는 그쯤에서 슬쩍 눈을 마주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마저 빼앗으실 건가요?’ 하고 말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발칙한 동시에 서운해 보여 심장이 조였다.
‘이런 당돌한.’
나는 아까와 전혀 다른 위기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합방을 줄이자는 것은 그렇게 서운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매일 합방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본래 귀족 부부에겐 정해진 합방일이 있으며, 엄연히 각자 요란한 침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노마 디아시는 초야 이후로 한 번도 제 침실에서 잔 적이 없다.
그런데 저렇게 서운한 척을 해? 누가 보면 내가 밤마다 그에게 소박이라도 놓은 줄 알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번에야말로 발그레한 얼굴을 한 노마 디아시에게 맥없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이사.”
어젯밤에도 몇 번이고 들은 달뜬 한숨과 비슷한 목소리가 귓가에 반복 재생 되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노마 디아시에겐 버릇이 있다. 밤의 분위기가 고조에 달했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넘친 사람처럼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고백을 남발했다.
‘나중에 제 마음이 전부 착각인 걸 알고 난 뒤에 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이러는지. 귀족답게 속내를 숨길 줄도 알아야지.’
삽시간에 얼굴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 들어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애도 아니고. 감정을 있는 대로 드러내면 전부 자기 손해라는 걸 모르나.’
그놈의 사랑해요.
실은 요즘 내 최대 고민거리는 다른 게 아니라 이것이다.
밥을 먹다가도, 가신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다가도, 서류를 결재하다가도. 저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귓가를 간지럽혀 도무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맥포이 가주는 최근 오전 집무 시간을 통으로 날리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집중도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노마 디아시가 방금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나도 밤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악!”
나는 단말마의 비명 끝에 애꿎은 침대 시트를 팡! 내려쳤다. 와중에 내 입에 또 빵 조각을 넣어 주려던 노마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움직임을 멈췄다.
‘정신 차려, 맥포이! 쾌락에 져서 폭군이 될 순 없다.’
그러든 말든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너무 늦었소! 이만 가 봐야겠어. 이건 다음에 얘기하지.”
침대 위에 우뚝 선 내가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횡설수설하는 내 혀를 뽑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궁지에 몰린 기분에 휩싸여 도망치는 것이 더 급했다.
“그, 밤에. 거기. 거기서 봅시다.”
나는 거대한 침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허겁지겁 팔다리를 움직였다. 침대는 또 왜 이렇게 넓은지.
한참 허우적거린 끝에 겨우 침대에서 벗어난 나는 그대로 침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쾅― 소리가 나며 침실 문이 닫혔다.
“…….”
아이사가 우당탕탕 빠져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마는 입매를 늘어뜨린 끝에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노마는 그녀가 도대체 뭘 드시고 저렇게 귀여우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등 체온으로나마 달뜬 볼을 식히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기다란 몸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걱정스러울 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 굵은 비명을 내지른 그녀를 떠올리자 볼을 넘어 목까지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지경이다.’
노마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만 눈을 감았다.
“―하. 하하, 하하…….”
다시 한번, 막을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맥포이에 장가온 지 한 달. 노마 디아시는 무섭도록 가슴 뛰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 너무 귀여우시지. 그런데―.’
제게 마음을 주는 것 같다가도 매번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 버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여러 의미로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저렇게 내게 마음 주지 않으시려 기를 쓰시니…… 나는 어쩌면 좋을까.’
노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최근 서부에는 새로운 돌풍이 불고 있었다.
제국의 모든 문학 작품에서 우직하고 말수 적은 기사님이 아름다운 공주를 구하는 내용이 부동의 인기 소재였다면, 최근 서부에서 그 판도가 아주 바뀌었다.
장이 열리는 날에 떠돌이 극단이 펼치는 공연의 주제는 더 이상 차갑지만 알고 보면 따듯한 기사님과 지혜롭고 아름다운 공주님이 아니었다.
요즘 서부 최고 인기 소재는 바로 아름다운 성기사와 괴팍한 마녀의 사랑 이야기였다.
마음씨 고운 성기사가 얼음장 같은 마녀의 마음을 흐물흐물하게 녹이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서부의 주인이 알면 질색할 유행이었다.
그러나 이 유행의 시작은 다름 아닌 맥포이 본성이었다.
내성에서 시작된 맥포이 가주 부부의 신혼 목격담이 외성을 넘어 서부 전체에 퍼진 것이다. 떠돌이 극단의 공연이 묘하게 상세한 것은 다 이 때문이었다.
물론 목격담은 약간의 변형과 과장이 보태져 소문이 되고, 이것이 다시 떠돌이 극단의 공연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맥포이 사용인들이 볼 때 가주 부부에 대한 소문은 그렇게 과장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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