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내 행복은 그런 게 아니야. 함부로 지껄이지 마.”
오필리아는 여전히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입만 움직여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 고난 끝에 부와 명예, 사랑을 얻은 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오필리아는 천둥 같은 목소리의 주인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딱히 이해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참……. 곤란하네. 그럼, 지금 행복하지 않단 말이야?”
오필리아가 아주 입을 다물어 버리자, 목소리의 주인이 난감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흐음―. 그러면 안 되는데. 이걸 어쩐다.”
전신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거슬리게도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별 괴상한 꿈을 꾼다고 생각하며 손등 아래에서 미간을 모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람. 이 이야기는 네가 행복한 걸로 끝나야 하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 부, 명예, 사랑 할 것 없이 다 주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지자 오필리아는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조금 내렸다. 그러나 새하얀 사위만 보일 뿐이었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네가 행복해지는 걸로 빌어 보렴.”
오필리아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재차 말소리가 들렸다.
“오늘 널 찾아온 것은 마지막으로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으니, 어서.”
“네가 뭔데 남의 소원을 들어주고 말고야.”
오필리아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에게 날을 세웠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이 큰 소리로 웃었다. 세상을 반으로 쪼갤 듯한 커다란 웃음소리에 오필리아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내 땅에서 알포의 힘을 몰아내 주었으니, 소원 하나는 들어줘야지. 선물이라고 생각하렴.”
그 말에 오필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봤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간엔 그녀 혼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여신이다.’
오필리아는 기묘한 목소리의 주인이 메헤라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신. 소원. 내가 바라는 것. 내 행복. 여신이라면―.’
오필리아는 오랜만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소원이 얼마나 구체적이어야 하는지, 그런 것 따위는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갑자기 생긴 기회에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아이사가, 아이사 맥포이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오필리아의 입에서 절박한 말들이 두서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곤 불안한 눈으로 연신 주변을 살폈으나, 방금까지 저 혼자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정적이 계속되자 오필리아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건. 이러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는데.”
절망한 오필리아가 주저앉기 직전, 마침내 한숨에 가까운 여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게 네 소원이면 어쩔 수 없지.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은 네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니.”
들어줘야겠지, 하는 여신의 중얼거림에 오필리아는 오랜만에 숨을 쉬는 사람처럼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억하렴. 아무리 나라도 ‘이야기’는 아주 조금만, 비틀어 줄 수 있단다. 나머진 그 애 하기 나름이야.”
여신은 신탁을 내리는 것처럼 모호하게 말했다.
오필리아는 아까부터 여신이 말하는 ‘이야기’며 ‘결말’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신이 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그녀는 어떤 기대감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인가? 이 모든 게 전부 꿈이라면, 내 망상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어.’
오필리아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여신에게 오늘 일이 현실이란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새하얀 공간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하얀 가루로 흩어지고 발 디딜 곳 없던 오필리아는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기억하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단다.”
추락하는 오필리아에게 여신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여신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모호했으며, 이번엔 특별히 불길했다.
“헉!”
오필리아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부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침실의 풍경이 보일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필리아? 악몽이라도 꾼 거야?”
니콜라스가 일어나 오필리아의 등을 쓸어 주며 물었다. 악몽이라는 말에 오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 여신과 만난 것이 단순히 꿈이면 안 되었다.
물론 여신의 말은 하나같이 모호하고 찝찝하긴 했다. ‘이야기’를 비튼다는 것이나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로선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에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에 오필리아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날부터 오필리아는 여신과 만난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고 믿으며,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 ‘아이사 맥포이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대했다.
그렇게 처음 며칠, 오필리아는 모두의 태양이라 불리던 시절처럼 희망차고 그 자체로 빛이 났다.
그 시간 동안 오필리아는 묘하게 생기가 돌았고 니콜라스는 방심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가 아이사 맥포이를 잃은 충격에서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오필리아는 시간이 지나도 바뀐 것 없는 세상에 곧 더 큰 절망을 느꼈다. 이미 발 디딜 곳 없이 위태롭던 그녀는 희망 고문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오필리아가 어이없는 사고로 눈을 감은 것은, 그녀에겐 예견된 미래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입장에선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그날 아침 식사 시간까지만 해도 모두가 아는, 잘 웃고 친절하고 유쾌한 오필리아였기 때문이다.
평소 자유롭고 활기찬 것을 좋아하는 오필리아가 오랜만에 혼자 산책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며 태양처럼 웃는 그녀를 보고 모두가 안심했다.
산책을 하던 오필리아가 그녀의 키를 훌쩍 넘는 연못에 빠지고 다시 물 밖에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면, 그녀를 절대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맹세코 오필리아는 죽으려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고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순간 그녀에게 살고자 하는 어떠한 의욕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이대로 가라앉든, 누군가 우연히 자신을 건져 올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맞았다.
그녀는 어떻게 돼도 좋은 사람처럼 수심 깊은 연못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속에 잠겨 있던 오필리아는 아이사가 죽고 처음 편안함을 느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눈을 못 뜰 것이라는 직감이 들긴 했다.
그럼에도 편안했다. 오필리아는 쉬고 싶었다. 이제 그만 관두고 싶었다. 죽지 못해 아등바등 살아남으려 애썼던 것도 자신이 죽으면 아이사 역시 목숨을 잃기 때문이었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아―. 니콜라스.’
오필리아는 뭐 하나 걸리는 것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 끝에 니콜라스 디아시를 불현듯 떠올렸다. 그를 많이 사랑했다. 당장 물 밖으로 나가 그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더는 힘이 들었다. 여신을 만난 것도 다 자신의 망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눈을 뜨는 간단한 일조차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영영 깨지 않을 잠에 들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았다.
“오필리아.”
“오필리아.”
꿈결인지 잠결인지 니콜라스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오필리아는 처음엔 내가 그대로 죽지 않고 살았나 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오필리아는 곧 자신이 과거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엄한 표정을 한 잭 바인스가 오필리아와 대치했다. 살벌한 신경전 끝에 이번에도 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그다트로 가.”
“…….”
“……너네는 진짜 왜 그러는 거야? 고집들이 진짜, 하!”
바인스답게 점잔을 유지하던 잭이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저앉아 ‘악!’ 하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잭이 말하는 ‘너네’는 오필리아와 제 주군 니콜라스였다.
두 사람과 10년 넘게 모험을 함께한 잭은 엄청난 똥고집과 불통을 자랑하는 니콜라스와 오필리아를 중재하느라 어린 나이에 흰머리가 났을 지경이었다.
상대가 오필리아였으니 이번에도 패배는 잭의 몫이었다.
“……그럼,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오필리아에게 잭이 눈까지 부라리며 정색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필리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투덜거리는 것과 잔소리를 멈추진 않았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
오필리아는 새삼 제 옆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과거 혹은 이전 생에 자신이 쉽게 놓아 버리고 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미안했다.
그녀는 마음을 더 굳게 다잡으며 눈을 빛냈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상처를 남기고 얻은 기회였다.
오필리아는 하필이면 왜 자신이 건국제 날로 돌아왔는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신은 조금만 비틀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엔 여신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뜻일 것이고, 건국제에서 눈을 뜬 것도 그 때문일지 몰랐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
여신이 말한 일어날 일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일어날 일이란 것이 닉스의 부활, 그리고 닉스의 아이사 살해를 말하는 것이라면.
‘아니. 그 새끼는 절대로 못 깨어나게 할 거야.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어 나가도 상관없어. 필요하다면 황제도 죽일 수 있어. 필요하다면,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어.’
절대로 그 지옥을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오필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 * *
“시모어 부인, 폴른 경.”
성의 없이 포크를 몇 번 휘적이던 아치 맥포이가 나지막하게 두 사람을 불렀다. 꼿꼿한 자세로 도련님 옆에서 대기하던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작은 주인을 돌아봤다.
“역시 나, 따돌림당하는 건가?”
퍽 풀이 죽은 목소리와 그 내용에 시모어 부인과 해리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도련님? 어째서―.”
시모어 부인은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냐고 되물으려다, 새삼 거대한 식탁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도련님을 보고 멈칫했다. 열댓 명은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 덕분에 빈자리 두 개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혼자 아침 식사 하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날 때부터 이상했어. 설마 5일째 혼자 먹게 될 줄은…….”
어린 주인은 한껏 침울해진 얼굴을 하더니 결국 식기를 전부 내려놓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련님. 가주님께선 정무가 바쁘셔 원래 아침 식사를 하지 않으시기도 했고―.”
“하지만 결혼한 다음부턴 아침 식사 하잖아. 고모부가 하니까.”
안타깝게도 눈치 빠른 어린이에겐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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