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그것’이 폭주한 날을 돌이켜 보자면 역시 후회는 수십 가지, 어땠을까 하는 가정은 수백 가지였다.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탓에 그날의 기억이 많이 남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오필리아는 몇 안 되는 기억 속에서 록시의 허락하에 갓난아기였던 아치를 안고 아이사와 함께 성벽을 구경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 뒤의 기억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닉스는 그날따라 유독 조급하게 굴며 오필리아를 쫓아 성벽까지 올라왔다. 불안하게 몸을 떨며 오필리아에게 다가오던 닉스의 앞을 막아선 것이 아이사였다. 그녀는 닉스를 향해 썩 꺼지라고 호통을 쳤다.
그 뒤론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치를 안고 있던 오필리아는 빠르게 행동할 수 없었고, 아이사의 복부에 구멍이 났다. 곧 닉스의 몸에서 징그럽게 생긴 검은 손이 수천, 수만 개가 뻗어 나와 맥포이를 꿰뚫었다.
꿈속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다 자신의 오래된 기억이란 사실을 알지만, 오필리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그때 내가 그걸 달래 줬으면 그것이 폭주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것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따라 함께 맥포이를 떠났다면.
그럼에도 오필리아의 가장 끔찍한 기억은 저 때가 아니었다. 진짜 지옥의 시작은 아이사가 ‘정말’ 죽은 날부터였으니.
처음엔 아이사의 손가락이었다.
오필리아는 손가락의 주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사는 언제나 왼손 검지에 맥포이 가주 반지를 꼈으니.
피 묻은 맥포이 가주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받았을 때, 오필리아는 태어나 가장 큰 두려움을 느꼈다.
다음 장소를 찾았을 땐 검은 머리칼. 다음은 오른손. 다음은 왼쪽 귀. 다음은 왼 다리.
아이사의 신체 조각을 실마리 삼아 탄타로스를 찾아가는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니콜라스가 없었다면 그대로 공황에 빠진 채 탄타로스를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라색 눈알 하나를 찾았을 때, 오필리아와 그 일행은 탄타로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필리아는 탄타로스의 가장 높은 탑을 쉼 없이 뛰어올랐다. 꼭대기까지 계단 다섯 칸이 남았을 때,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과 인영 두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쪽 눈이 없는 아이사를 한눈에 알아봤다. 드디어 마주한 아이사의 모습이 엉망이라는 사실에 비명을 토하기도 전에, 닉스는 손 쓸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아이사의 목을 그었다. 오필리아가 계단을 채 다 오르지도 못했을 때였다.
찰나와 같은 재회에 오필리아는 비명은커녕 눈 한 번 깜빡일 수도 없었다. 아이사의 목이 잘려 나가 지저분한 돌바닥을 구르는 것은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아이사의 머리가 더러운 돌바닥을 몇 차례 구르다 멈췄다.
오필리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엎어졌다. 굴러떨어진 아이사의 목을 향해 기어야 할지, 아직도 닉스의 발치에 있는 아이사의 몸체를 향해 기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무한한 성력이 배꼽부터 끝없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 것이 아닌 양 괴기스러웠다. 그 감각만큼은 과거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아아…….”
오필리아는 바보가 된 사람처럼 아이사의 머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꼭대기에 오른 니콜라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긴 했지만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사 맥포이가 또다시 제 눈앞에서 죽고 말았다. 그날 성벽에서 그랬던 것처럼, 허무하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아이사가 ‘진짜’ 죽었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오필리아라 해도 잘려 나간 목을 붙이진 못했다.
오필리아는 그 뒤로 어떻게 닉스를 죽였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절망은 분노를 불렀고, 분노는 폭주를 불렀다. 그녀의 폭주를 막은 것은 니콜라스였다.
폭주의 끝에서 오필리아는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아이사가 죽을 줄 알았다면. 온갖 고생만 하다가 고문 끝에 목이 잘려 죽을 줄 알았다면.
‘그날 성벽에서 죽은 널 다시 살리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필리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100번 그날로 돌아가도, 자신은 100번 다 아이사 맥포이를 살려 냈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아이사 맥포이가 죽는 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죽었구나.’
그녀는 한층 깊은 곳에 잠기는 기분을 느꼈다.
오필리아는 이번엔 아이사 맥포이가 일곱 살이었을 적,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에서 헤맸다.
그때만 해도 아이사는 또래보다 키가 조금 큰 편에 속했다. 대귀족 아가씨인 만큼 영양 상태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출신과 출생이 불분명한 고아 소녀의 나이는 자연히 덩치가 비슷해 보이는 맥포이 막내 아가씨를 따르게 되었다.
당시 아이사의 아버지, 선대 맥포이 가주는 고아 소녀를 그렇게까지 극진히 대우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막내딸 아이사는 맥포이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것에 약했다. 오필리아를 본 아이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필리아는 아이사가 자신을 보고 처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와……. 너 되게…….”
아이사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선 잔뜩 인상을 쓴 채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예쁘다…….”
그러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필리아 역시 제 주변을 열심히 기웃거리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화라락 얼굴을 붉히는 또래 소녀가 마냥 좋았다. 어린 아이사는 퉁명하고 새침한 말투와 다르게 정이 많아 손을 잘 내어 주기도 했다.
두 소녀가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것은 수순이었다. 막내 아가씨가 아끼는 고강한 성력의 여자아이는 쉽게 맥포이 성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오필리아’라는 이름의 탄생도 요 조그만 아가씨의 작품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사실 아이사 말고 ‘오필리아’였으면 좋겠어.”
예쁘장한 금발 소녀와 안면을 튼 지 3일째 되던 날, 소녀에게 단단히 홀린 맥포이의 막내 아가씨는 자신의 1급 비밀을 그녀에게 쉽게 털어놓았다.
“어딘가 어감이 멋지지 않아? 뭣보다 ‘아이사’는 아이노 그 멍청한 자식하고 비슷해서 싫어.”
3남매 중 막내인 아이사는 오빠 아이노와 언니 시프와 자주 싸우곤 했는데, 특히 성격이 비슷한 아이노에게 유독 질색을 했다.
“그래도, 나는 맥포이의 아가씨이니까 이름을 마음대로 바꿀 순 없지.”
그러면서 꼬마 아가씨는 귀족 가문 아가씨의 의무에 대해서 투덜거렸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한 손바닥을 작은 주먹으로 꽁 치곤 눈을 빛냈다.
“아, 그럼 네가 오필리아 하면 되겠다! 넌 얼굴도 아주 예쁘니까.”
섬세함이나 성의라곤 하나도 없는 작명 솜씨에, 과연 대귀족의 어린 아가씨다운 제멋대로인 행동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한 번도 기대한 적 없는 ‘이름’이 생겼을 때 얼마나 설렜는지 몰랐다. 그때 느낀 감정을 표현하자면 문자로 다 담을 수 없었다.
날 때부터 혼자였던 오필리아에게 이름이 생긴 것은 일생일대의 사건이었으며 특별한 일이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이름을 지어 준 아이사라는 존재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이 별 뜻 없이 단지 어감이 예쁘단 이유로 제게 붙여졌다고 해도 그랬다.
그러니까 오필리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그마한 아가씨에게 참 많은 걸 받았다. 처음 사귄 생명이자 친구였으며, 가족이었다.
오필리아의 인생에서 아이사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최고의 행운임이 분명했다.
어린 오필리아는 아이사가 제게 행운인 것처럼, 자신이 아이사에게 행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강한 성력을 타고났으니, 언젠가 성기사가 되어 아이사에게 검을 바쳐야지.’
한때 오필리아는 그런 꿈을 꾸며 입버릇처럼 아이사에게 ‘너는 내가 지킬 거야’라고 허세를 떨기도 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아이사 맥포이의 행운이 될 수 없었다. 따지자면 모든 불행의 시작쯤이었을 것이다.
“……아.”
꿈속을 허우적대던 오필리아가 문득 눈을 떴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굴렸다. 사위는 이미 해가 중천인 것처럼 밝았고, 정무를 보러 간 모양인지 니콜라스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필리아는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구나.”
후회는 깨어날 때마다, 숨 한 번마다 속절없이 느는 듯했다.
어느 날의 아침도 여느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사과를 한 번도 못 했다는 깨달음은 의도치 않게 그녀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오필리아?”
“아, 미안. 내가 또 다른 생각을 했네.”
니콜라스가 식사와 대화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오필리아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니콜라스의 아름다운 금안에 근심이 어리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오필리아의 어색한 웃음에 더 마음을 졸였다. 그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오필리아 역시 그의 불안을 모르진 않았으나 그녀로서도 스스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수 있을 거야.”
탄타로스에서 아이사가 죽고 종종 애먼 땅을 바라보는 오필리아에게,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필리아는 제 곁을 지키고 선 그를 향해 힘없이 웃었지만 그 말에 위로를 받지는 못했다.
‘아이사는 이미 죽었는데 시간이 무슨 수로 해결할 수 있지?’
어떠한 기회도 없다는 점에서 이 따뜻한 날들은 지옥이 확실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사과 한마디 못 건넸다는 후회는 작은 물결에서 곧 커다란 파도가 됐다. 끝내 어두운 해일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아이사 맥포이의 죽음이 오필리아에게 대단한 충격이라는 것은 그녀의 주변인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듯이, 그녀라면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또한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는 비록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을 잃긴 했지만 얻은 것이 많았다. 그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 축하와 축복을 받고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지 않나.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을 쟁취한 오필리아. 타인의 눈에 이보다 완벽한 한 사람의 결말은 없었다.
그러니 오필리아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이 아픔을 금방 씻어 낼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도 그녀가 해일에 휩쓸려 해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지 몰랐다.
모두가 말하는 행복. 오필리아는 그 행복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아이사가 죽음으로써 오필리아는 행복한 결말에 좀처럼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제 행복의 전제가 ‘아이사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필리아는 결국 그날도 식사를 다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찍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필리아는 여신을 만났다.
오필리아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공간에서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고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저 평소와 조금 다른 꿈이겠거니 생각했다.
“드디어 ‘행복한 결말’에 도달했구나.”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을 때, 오필리아는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개소리. 뭘 안다고.’
별안간 들린 목소리는 자비로웠으나 그 내용은 그녀에겐 지긋지긋한 개소리였다. 목소리가 말하는 행복은, 사람들이 제게 말했던 행복이 분명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