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오필리아가 아이사의 침실에 찾아갔던 밤, 그녀가 뱉은 말에 맹세코 거짓은 없었다.
오필리아는 아이사 맥포이가 죽은 세상에서 2년을 살았다.
어쩌면 그 나날들은 모두 여신이 보여 준 미래일지도 몰랐다. 다만 아이사가 죽었던 세상은 단순히 보았다고 치부하기엔 끔찍이 사실적이었다.
아이사가 닉스에게 납치당한 건국제 날로 돌아온 오필리아는 정신없이 탄타로스를 향해 달리며 생각했다.
‘아이사가 죽고 일어났던 일들이 꿈이 아니라 모두 현실이라면, 나는 어째서 돌아왔고 미래는 왜 바뀌었나.’
그녀는 곧 짐작 가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필리아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 여신을 만난 적이 있었다.
* * *
탄타로스에서 아이사 맥포이가 죽은 세상. 그 세상에서 오필리아는 아이사의 목이 잘려 나감과 동시에 성력을 되찾았다.
여신에 가장 가까운 전지전능한 힘을 되찾은 오필리아는 최강이었다. 닉스와 그 잔당을 처리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필리아는 이미 지명 수배자가 아니었다. 나팔과 북소리, 함성과 박수 소리. 그녀의 마지막 재판은 축제에 가까웠다.
그녀가 10년 넘게 제국을 떠돌며 쌓은 인연 중엔 제국의 유명 인사도 많았다. 이른 나이에 대신관이 된 헤이롯 역시 그중 하나였다.
여우처럼 쭉 찢어진 눈매와 뱀 같은 눈동자는 백색에 가까웠다.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헤이롯은 신관보다는 속을 알 수 없는 장사꾼이 더 어울렸다. 그는 오필리아의 숨은 조력자이기도 했다.
“메헤라의 이름으로 무죄를 선고하니―.”
몸소 재판에 나선 헤이롯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면서 오필리아를 향해 활짝 웃는 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에게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을 축하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알포를 믿는 광신도들의 패악에 두려움에 떨던 제국민들이 대신관의 선언에 우레와 같이 환호했다.
오필리아의 아름다운 외모와 압도적인 성력, 영웅적인 서사는 그들의 맹목적인 숭배를 불렀다.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
“여신의 헌신!”
“우리들의 구원자! 저분이 바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니콜라스 디아시가 환하게 웃으며 오필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그 손을 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시 ‘오필리아’라고 불리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디아시 영지가 아닌 만인의 앞에서 오필리아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니콜라스의 오랜 소원이기도 했다.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는 그를 보고 있자면 오필리아는 당연스레 기쁨을 느꼈다. 니콜라스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
그해, 역사에 남을 가장 성대한 성혼식의 주인공은 디아시 가주와 그의 부인이 된 오필리아였다. 주례는 대신관 헤이롯이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만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내내 꿈속을 걷는 듯, 탄타로스 이후 일어난 모든 일들을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다.
들리는 모든 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오필리아는 이 기분이 정확히 아이사의 목이 눈앞에서 잘려 나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그녀가 아이사의 죽음을 완전히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니콜라스와 성혼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알포를 믿는 광신도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이번에도 서부였다. 그들은 또다시 가주를 잃었다. 다시 한번 여신이 맥포이를, 서부를 미워한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와중에 죽은 맥포이 가주의 후계는 어린 소년이었다. 아치 맥포이는 열한 살에 마침내 모든 혈연을 잃었다. 아이사 맥포이가 열다섯 살에 겪었던 비극에 비해 상황은 훨씬 나았지만, 여전히 어린 가주가 짊어지기엔 무거웠다.
서부가 또다시 고립되자 성녀로 추앙받기 시작한 오필리아가 대뜸 자신의 뿌리는 맥포이라고 선언했다.
오필리아가 지명 수배자였을 때는 그녀가 맥포이 사람이 아닌 게 서부에 득이었으나, 지금은 그녀가 맥포이 사람인 편이 득이었다. 세상이 치사하게도 그랬다.
디아시 가주 부인이 된 오필리아가 돌연 맥포이 본성에 방문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좀처럼 아이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오필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흐리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십수 년 만에 맥포이 본성 정문을 밟은 날, 그녀는 아이사가 죽었다는 현실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아이사 맥포이의 죽음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열세 살이 된 아치 맥포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벌써 12년 전, 제 품에 안겨 살아남았던 갓난아기는 어느새 제 턱에 차는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오필리아는 분노인지 슬픔인지로 가득 찬 자색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치를 보자 아주 오랜만에 눈앞이 선명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치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먼발치에서 맥포이 사람들을 훔쳐보는 건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물론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긴 했다.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감히……!”
오필리아는 아치의 매서운 주먹질과 비명 섞인 욕설을 묵묵히 받아 냈다.
탄타로스의 일 이후 그녀가 광신도의 잔당을 처리하고 수배자 신분에서 벗어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 뒤로 디아시 가주 부인이 되기까지 다시 반년. 그간 맥포이의 어린 가주는 1년 반의 세월을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옆에 아이사 맥포이가 남긴 단단한 장벽 같은 가신들이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오필리아는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그저 갈 길 잃은 분노와 슬픔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화풀이처럼 악을 쓰는 아치를 받아 주는 수밖에.
지칠 대로 지친 어린이는 곧 제풀에 지쳐 그녀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갓난아기였던 아치가 숨이 넘어가라 우는 것을 달래 주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영지를 빠져나갔던 날을 떠올렸다.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 너 싫어! 우리 고모……. 흐으, 흑, 고모가 보고 싶어……. 고모는 완전 거짓말쟁이야…….”
목이 다 쉴 정도로 우는 아치를 달래며, 오필리아는 마침내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날 탄타로스에서, 내 눈앞에서 네가 죽었구나.’
“아이사가…….”
‘아이사가 죽었구나.’
오필리아는 제대로 호흡도 못 하는 아치를 껴안고 작은 등을 두드렸다. 그녀는 텅 빈 눈으로 허공만 바라봤다.
‘정말 그 애가 이 세상에 없구나.’
현실은 지옥이었다.
디아시 가주 부인 오필리아는 그해 겨울을 맥포이에서 보냈다. 어린 맥포이 가주에게 성력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고 그에게 그동안 주지 못했던 애정을 쏟아붓는 동안, 그녀는 마모될 대로 마모된 정신 줄이나마 붙잡고 있을 수 있었다.
그나마 맥포이에 있을 때 오필리아는 제정신이었다. 디아시로 돌아온 봄에, 오필리아는 자신이 더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날씨가 좋은 어느 평범한 날, 오필리아는 오랜만에 본성 밖으로 나섰다. 맥포이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기꺼이 성녀를 자처한 그녀에겐 정기적으로 성지 바그다트에 방문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녀라 불리는 오필리아 님의 기도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바그다트로 몰렸다.
오필리아는 군중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꺼풀을 내렸다.
알포의 힘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냥 활기가 넘치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쩐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오필리아가 마차에서 내려 그녀를 위해 마련된 기도실로 향할 때였다.
“오필리아 님!”
어린 소녀 하나가 군중을 비집고 달려 나와 오필리아를 불렀다. 기사들이 재빠르게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한 명을 받아 주면 달려 나오는 신도는 끝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오필리아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그녀에게 말 한마디를 걸고, 시선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용을 썼다. 그녀에게 축복의 인사를 받는 것을 여신의 가호를 받는 것과 동급으로 여겼다.
그러나 소녀의 손에 들린 보라색 꽃을 본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기사들을 저지했다.
아이가 기대감 어린 얼굴을 하며 불쑥 테렛사 한 송이를 내밀었다. 성녀 오필리아 님이 테렛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유명하기도 했다.
“오필리아 님. 우리들의 영웅, 여신의 헌신이시여!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상기된 볼을 한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필리아와 말을 섞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에게 축복의 인사를 남겼다. 그러곤 자신이 좋은 말을 해 주었으니, 당신도 해 달라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오래오래, 행복하게라.’
오필리아는 문득 그들이 말하는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도망자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 황제가 하사한 새로운 이름, 성녀로 추앙받는 것,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대한 성혼식의 주인공, 대단한 가문의 안주인.
그들이 말하는 자신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이런 것들을 꿈꾸고 10년 넘게 제국을 떠돈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것을 바랐다. 그렇다고 많은 것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너 하나만―.’
오필리아는 또다시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소녀가 내민 보라색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너 하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길 바랐는데.’
느리게 머리를 굴린 끝에 십수 년 바라 왔던 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낸 오필리아는 마침내 발밑이 완전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딱, 그거 하나 바랐을 뿐인데.’
정작 오필리아가 평생에 걸쳐 바란 것은 이제 영영 이룰 수 없다. 만회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네가 죽었구나.’
성녀 오필리아는 그날 기도를 올리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도망치듯 디아시 본성으로 돌아갔다.
오래도록 하나만 꿈꾸던 오필리아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 뒤로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니콜라스와 오랜 동료들의 걱정에도 그녀는 갓난아기처럼 잠만 자기 시작했다.
잠을 많이 잘수록 오필리아는 과거의 기억에 오래 머무르게 됐다. 죄책감을 느끼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에도 수천수만 번의 후회와 가정을 하며 서서히 정신을 놓았다.
‘그 망할 숲.’
‘그것’과 처음 만났던 날은 오필리아가 가장 후회하는 날 중 하나였다. 숲속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아이사와 그 앞에 쓰러져 있던 비쩍 마른 남자아이를 만난 날 말이다.
그날 다른 마차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아이사가 그걸 놓고 가자 했을 때 내버려 뒀다면.
그럼 다른 방법으로 날 찾아왔을까.
내가 맥포이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면 떠나면 됐을까? 그렇다면 어디로?
처음 본 순간 그걸 죽였다면!
오필리아는 꿈속에서 조각조각 난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그것은 자해와 같은 행동이 분명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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