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온몸이 근육인 남자가 온몸으로 치대 오니 숨이 다 막혔다.
“치워라…….”
치우라는 것엔 당연히 내 몸을 덮칠 듯한 위협적인 몸뚱이뿐만 아니라 눈치 없는 그의 아랫도리도 포함이었다.
양심이 있긴 한지 노마는 잽싸게 내려왔다. 대신 거대한 덩치로 내 옆구리를 꿰찼다. 그는 여전히 목까지 빨간 주제에 은근슬쩍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미안하기는 한지 슬슬 내 아랫배를 쓸었다.
눈치 보면서 기어코 할 건 다 하는 노마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프셨죠. 오늘부턴 더 자제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손만 잡고 자겠습니다.”
어제 그게 자제를…… 하긴 한 건가? 그보다 오늘이라니 그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오늘은 합방일이 아닐 텐데?”
노마가 눈을 땡그랗게 뜨곤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합방일에만 저와 동침하실 생각이십니까?”
“……합방일이 그럼 왜 있겠나.”
“제가 당신을 잘 모시지 못했나요?”
노마가 세상이 무너진 강아지처럼 눈동자를 떨며 중얼거렸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강아지가 아니라 개새끼였지만, 지금은 무해한 강아지가 맞는 듯했다.
저 얼굴을 하고 묻는다면, 굳이 잘 모셨냐 아니냐를 따지자면―.
“잘, 모셨……죠. 그러니까…….”
물론 아프긴 더럽게 아팠다. 그러나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또한 내 선생의 조언에 따르면 잠자리에 대한 감상은 되도록 솔직해야 한다고 했으니.
“그, 좋았습니다.”
내가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중얼거리자, 노마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뒤늦게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민망함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만 좋은 게 아니었다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 틈새로 훔쳐보니 노마가 나를 향해 얼굴을 숙여 오는 게 보였다. 다급하게 다시 얼굴을 가리니, 그가 달아올랐을 게 뻔한 내 이마에다 입을 맞췄다.
“무척 기쁩니다.”
노마는 시뻘건 얼굴을 한 주제에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그러나 행복해 죽겠다는 듯한 저 얼굴에 대고 다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한발 늦게 이마를 가린 채, 나는 이번에도 백기를 흔들었다.
“대신 오늘은……. 오늘은 정말 손만, 손만 잡고 잡시다.”
“네, 아이사.”
그러나 첫날밤 이후 매일. 그와 내가 손만 잡고 자는 날은 없었다.
* * *
한 남자의 목이 잘려 나가면서 역한 피비린내가 팍, 터졌다. 더운 피가 오필리아의 몸 곳곳에 튀었다.
얼굴로 후드득 떨어지는 뜨끈한 핏방울에 오필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방금 한 사람의 목을 단칼에 자른 것치곤 잠이 든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스물셋.’
오필리아는 건조하게 자신이 베어 낸 머리통의 수를 셌다. 잘려 나간 머리통이 발치에 떨어져 몇 번을 굴렀다. 머리통의 주인은 남쪽 구석에 땅굴을 파고 숨어든 닉스의 광신도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마지막 한 명의 목을 잘라 내고 무심하게 검을 털었다. 검에 묻은 피가 투툭 땅바닥에 떨어졌다.
‘다음은 서쪽.’
오필리아는 기계적으로 다음 목적지를 되뇌며 다리를 움직였다.
“오필리아―.”
디아시의 충직한 가신이자 대대로 훌륭한 기사를 배출한 바인스 가문의 둘째, 잭 바인스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오필리아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사람처럼 휘적휘적 땅굴을 빠져나갔다.
“이거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오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잭은 결국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중얼거렸다.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군.’
잭은 오필리아를 처음 만났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고 그녀를 놓칠세라 뒤를 따랐다.
지난겨울, 오필리아는 돌연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졌었다. 디아시 본성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다행히 오필리아는 니콜라스가 그녀를 찾기 위해 바그다트를 이탈하기 전에 귀환했다.
말없이 사라졌을 때처럼, 갑자기 돌아온 그녀는 겉보기엔 멀쩡했다. 그러나 곧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작위적인 웃음과 묘한 선 긋기. 이따금씩 주먹을 꽉 쥐고 땅을 쳐다보는 것까지.
잭은 10년 전 주군 니콜라스와 함께 닉스의 실마리를 쫓아 도착한 서부에서, 거지꼴을 한 금발 여자애를 만났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오필리아는 존재 자체로 어색하고 음침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오래된 과거’였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을 떠돌면서 그녀는 많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점차 본 모습을 찾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 잭이 보기에 이 잡듯이 알포의 신도를 찾아내 죽이고 보는 모습은 ‘오필리아’답지 않았다. 아무리 광신도라지만 개인의 범죄 이력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죽이는 것은 과격했다.
“정신 차려. 이건 너답지 않아.”
누군가의 피로 절여진 손과 얼굴을 닦기 위해 잠시 개울가에 멈춰 섰을 때, 잭은 결국 오필리아에게 한 소리 했다.
주제넘은 소린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필리아는 제 주군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오필리아가 무너지면 그녀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제 주군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디아시의 사랑은 언제나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을 다 차치하고서도 잭에게 오필리아는 긴 세월, 온 제국을 함께 떠돌며 온갖 위기를 같이 넘긴 동료이기도 했다. 비록 퍽 수상해 보이는 오필리아를 의심하고 거부한 시간이 길긴 했지만 전우애로 쌓은 우정은 깊었다.
“하하.”
‘너답지 않다’는 말에 오필리아가 한 박자 느리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붉은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어색하게 웃는 모습은 어딘가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잭은 결국 다시 한번 인상을 썼다.
‘오필리아가 목을 매는 아이사 맥포이도 결국 살았고, 불안정하게나마 닉스도 봉인했다.’
잭은 도대체 뭐가 오필리아를 저렇게 몰아붙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강박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더 이상 숨기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물론 잭이 봐 온 그녀는 감정을 잘 못 숨기는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외지인인 오필리아의 존재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몇 년을 어색하고 기묘하게 굴던 그녀는 오른팔이 한 번 잘리고 나서야 완전히 자연스러워졌다. 마침내 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말이다.
‘맥포이 가주가 납치당했던 일이 그렇게 큰 충격이었나. 이 모습을 옆에서 보면 니콜라스가 울겠군.’
억지로 터뜨린 것만 같은 작위적인 웃음은 짧았다. 오필리아는 다시 건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미안, 한마디 하고선 물가에 쭈그려 앉아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기 시작했다.
잭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애꿎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하늘은 푸릇한 잎으로 가득했다. 초여름에 들어선 숲은 슬슬 울창해질 준비를 하고 있건만 제 친구는 뭐가 문제인지 혼자 먼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잭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대충 피를 닦아 내던 오필리아는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어지러운 파문에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가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저주 같은 계집애.’
물가에 비친 제 얼굴에 대고 습관처럼 욕을 던진 오필리아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바위에 앉아 잠시나마 쉬던 잭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니 혼자 가겠다고 한 건데.’
오필리아는 잭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했다간 잭이 더 곤란한 얼굴을 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부턴 혼자 가겠으니 따라오지 말라는 말 대신, 묵묵히 다음 목적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오필리아의 앞을 막아선 잭은 다급하게 그녀에게 소리쳤다.
“바그다트로 가자. 너, 니콜라스 옆에 있는 게 낫겠어.”
“바그다트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제물 의식을 행한 범죄자들은 이미 다 죽었다고. 이렇게 할 필요까진―.”
“잭.”
“오필리아.”
지독히 무감정해 보이는 오필리아의 얼굴에 잭은 막막함을 느끼며 눈썹을 모로 휘었다.
“불씨를 남겨선 안 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어.”
“알포의 저주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다 죽일 수도 없어. 너 하는 행동을 보면 곧 나도, 니콜라스도 죽여야겠네.”
과한 처사였다. 또한 거대한 제국에 곳곳에 흩어져 있을 알포의 신도와 그 저주법을 아는 사람을 모조리 찾아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잭 역시 제 주군이 바그다트에 벌써 반년 넘게 발이 묶인 것이 싫었다. 언제까지 이럴 수도 없고 방법을 찾긴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찾기 전까지 닉스의 봉인이 풀리지 않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오필리아의 과격한 방식은 어쩌면 가장 확실한 예방책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닉스의 봉인을 풀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닉스가 깨어날 리가 없으니까.
“그것들은 이미 한 번 봉인을 풀었어. 흩어진 그들이 다시 모여 또 그걸 깨우려 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까?”
“…….”
“잭. 나중에 가서 저 사람이 그런 사람일 줄 몰랐다고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이 없던 게 되지 않아.”
“……그래도 나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
“닉스의 몸은 우리 수중에 있고, 그의 신체가 없으면 저주법을 알아도 아무런 소용 없어. 알잖아.”
“잭 바인스. 나는 이미 두 번을 실패했어. 아니, 세 번인가.”
‘세 번이라니.’
한 번은 분명 10년 전 닉스를 옆에 둔 일일 것이고, 다른 한 번은 건국제 날 닉스의 봉인이 풀린 것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머지 한 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잭은 알 수 없었다.
“내가 황제를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오필리아가 냉소적인 말투로 중얼댔다. 잭은 심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녀에게 아찔함을 느꼈다.
잭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오필리아는 마음 같아선 황제고 뭐고 세상에 알포의 힘과 닉스를 아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자면 끝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광신도라도 전부 잡아들여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필리아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물론 과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광신도 무리를 발견할 때마다 모조리 죽이고 있으니 그중에선 분명 무고한 사람이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모든 게 엉망이라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은 ‘그 지옥’을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지옥은 아니었다.
‘아직은, 아이사가 살아 있으니. 내게 성력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지옥은 아니지.’
오필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이따금 여자인지 남자인지, 노인인지 아이인지 모를 목소리가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아무리 나라도 ‘이야기’는 아주 조금만, 비틀어 줄 수 있단다. 나머진 그 애 하기 나름이야.”
기묘한 목소리는 분명 제게 그렇게 말했다. 이야기인지 뭔지를 아주 조금만 비틀어 줄 수 있다고.
그 목소리가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오필리아는 이렇게까지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들린 목소리는 분명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기억하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단다.”
오필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위태롭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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