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79화 (79/139)

79.

계획에 없던 ‘진짜 안주인’을 맞이하게 된 나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노마 디아시와 결혼하기로 한 이상 맥포이 가주의 결혼은 더 이상 구색 맞추기가 아니었다. ‘디아시’ 사람을 허수아비 부군으로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수순처럼 나와 그에겐 ‘부부의 의무’가 주어졌다. 그럼에도 그 의무라는 것은 여전히 내게 막연하기만 했다.

그것을 속성으로 배우기 전까진, 정말 남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시모어 부인은 어느 날 내게 선생 하나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로, 성혼식 전에 그녀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귀족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초야를 대차게 말아 먹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당장 초야, 나아가 가주 부부의 원활한 합방을 위한 속성 교육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치 나이 정도의 꼬마도 아니고 알 건 다 알았으나 새삼 하나하나 콕콕 짚어 가며 이론을 독파할수록 미지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선생의 일목요연한 설명을 들을 땐 그러려니 했으나, 그것을 그림으로 접했을 땐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저걸 노마 디아시와 하라고? 나는 이미 후계자가 있으니 저런 건, 안 해도 되지 않을까.’

피하고 싶은 생각이 만만했지만 이게 또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갑을 관계의 계약 결혼도 아니고 적법하게 안주인 자리를 꿰찬 노마 디아시를 합방일마다 소박 맞힐 수는 없었다.

나는 착실한 학생답게 이론이나마 머릿속에 있는 대로 구겨 넣고 보았다.

그러다 마지막 수업 날에, 나의 엄격한 선생은 백날 이론만 들이부어 봤자 한 번의 실전만큼 못하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부군 되실 분이 여러모로 비상하시니 큰 걱정 마십시오. 그러니 일단 다가오는 초야는 흘러가는 대로 즐기세요.”

노마 디아시가 나보다 더한 숙맥이거늘, 저자가 뭔 소리를 하는 거람. 그러나 선생은 나의 불신 어린 시선을 개의치 않아 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임한 성혼식은 의외로 괜찮았다.

내가 정말 결혼을 한다고? 하는 생각에 초야에 대한 걱정도 잠시 잊혀졌다. 이디오 때문에 화딱지가 나긴 했으나 폭발하기 직전이면 노마 디아시가 귀신같이 날 웃게 했다.

노마는 가끔 골 때리는 짓을 했고, 그의 부군 맹세는 노마답다고 해야 할지 패기가 넘쳤다. 절대로 옆을 떠나지 않겠다니, 누구 좋은 맹센지 몰라 헛웃음이 났다. 동시에 기묘한 만족감이 드는 것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간만에 즐겁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잠시였다.

“가주님, 긴장을 풀어 주는 향료랍니다. 어떠세요?”

“어머, 얘는! 감히 가주님께! 가주님, 이건요―.”

잔뜩 들뜬 하녀들이 나를 씻기고 말리면서 시끄럽게 조잘거렸다. 나는 까르르거리는 하녀들을 혼쭐내 줄 생각도 못 했다. 해가 지고 초야가 다가올수록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식을 한 번 더 치르는 게 낫지.’

몇 시간이고 이디오가 말 더듬는 걸 듣는 쪽이 훨씬 나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맨살을 보여. 어떻게 맨몸을 만지지? 어떻게 그걸 거기에―!’

“가주님, 속옷은 어쩌시겠어요?”

그때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하녀 아이 하나가 내 심연을 깼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콧김을 뿜어 대는 그녀를 쳐다봤다.

“뭐……?”

내가 입술만 달싹거리자, 하녀들은 자기들끼리 멋대로 토론을 시작했다. 성격 급한 하녀가 과격하게 주장했다.

“어차피 금방 벗게 되실 거, 빼자!”

“아니, 너 뭘 모르는구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이 있는 하녀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원래 한 꺼풀 벗어 내릴 때 묘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이고, 다시 한 꺼풀 벗을 때마다 그것이 점점 고조되는 거란다!”

나는 그냥 저것들의 입을 다 막아 버리고 싶었다. 욕조에 머리를 박고 마른세수를 하는데 달짝지근한 향기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마침내 나는 여름에도 안 입을 낭창한 가운으로 몸을 둘둘 싸맨 채 침실 문 앞에서 섰다. 이 안에 노마 디아시가 있다.

‘이게 말이 되나? 팔자에 없는 초야를 치르다니. 아―. 실제론 결혼도 못 하고 죽을 팔자이기도 했지.’

짧은 사이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문짝만 노려보길 한참이었다.

끔찍하다 이런 건 아니었다. 그저 발가벗고 행하는 부부의 의무라는 것이 내겐 너무 난해할 뿐이었다.

그것도 보기만 해도 경건해지는 성스러운 남자를 데리고,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기민한 노마는 내가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뻔히 알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초야에 그를 소박 맞혔다간 이번에 밀란 디아시에게 혼나는 이는 나일 것이다.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장정 다섯이 데굴데굴 굴러도 될 것 같은 새하얀 침상 위에 오늘도 용케 달빛을 끌어모은 남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갓 씻겨 나온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촉촉해 보였다. 곧장 시선이 마주쳤고, 나는 숨 쉬는 것을 잊고 말았다. 직전에 숨을 들이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관절이 사정없이 삐거덕거리긴 했지만,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 맞춰 노마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나 막상 침대를 옆에 두고 마주하자니 입을 떼기 어려웠다. 내가 머뭇대자 노마가 살며시 눈꼬리를 휘며 먼저 내게 속삭였다.

“그냥 가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가주님.”

그의 입에서 ‘아이사 님’도 아니고 ‘가주님’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왼 눈썹을 치켜뜨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곤 빠르게 호칭을 정정했다.

“아이사.”

“흠.”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호칭이 뭐라고, 순식간에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집착하는 어린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민망했다.

청혼 이후 노마는 은근슬쩍 ‘님’을 빼고 친근하게 나를 부르곤 했다. 이게 또 생각보다 거슬리지 않아서 은근히 그가 ‘아이사’라고 부르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가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신경이 쓰여서 기다렸을 뿐이지 맹세코 다른 의미는 없다.’

스스로에게 열심히 변명을 하고 있는데, 노마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자, 다음 순간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수치스러운 공주님 안기가 통상 세 번째를 달성한 것이다. 나는 성인이 분명한데 번쩍번쩍 들리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이게 무슨 짓이지?”

“기다리느라 아주 힘들었습니다, 아이사.”

그럼에도 나는 지성인답게 침착하게 항의했고 노마는 가련을 떨며 다른 소리를 했다.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은 사실이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노마 디아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들고 침대 위에 올랐다. 그는 한 손으론 나의 뒷덜미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론 내 허리를 감쌌다.

세상에나.

시작한다는 말을 따로 하지 않았지만 초야는 이미 시작된 후였다. 그의 팔뚝에 의지한 내 몸뚱어리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 시간을.”

노마 디아시가 나를 내려다보며 촉촉한 입술을 움직였다. 내 시선은 그대로 그의 입술에 고정됐다.

‘입술이 촉촉해. ……미쳤군.’

선생의 말처럼 달달 외운 이론 따위는 실전에 큰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다. 아니,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내 머리는 방금 사고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직 시청각 자극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물기 어린 그의 목소리라든가, 눈동자라든가, 입술이라든가, 가운 사이라든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등허리부터 시작해 마침내 뒤통수까지 푹신한 침구에 닿았을 때, 그가 그렇게 속삭이며 입매를 늘어뜨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이사.”

“예?”

“할 겁니다.”

“뭐, 뭐어…….”

뭘 해요? 하고 새침하게 소리를 지르기엔 노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렇지, 그걸 하려고 들어왔지.

“끝까지.”

상냥한 어조는 여전했으나 단호한 말투였다.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그런 내게 졸지 말라는 듯이 이마에 말랑한 입술을 한 번 박곤, 훌쩍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더 이상 따스한 별 가루가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귀여운 단어론 설명할 수 없었다. 번뜩이는 그의 금안은 배고픈 맹수 같았다.

노마가 가운을 벌려 팔을 뺐다. 흐물거리는 옷감이 자연스럽게 그의 장골까지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상반신이 달빛에 낱낱이 드러났다.

지난번 가면무도회에서 분위기를 타 그의 가슴을 멋대로 주물렀을 때, 옷 사이로 설핏 보이는 가슴 근육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벗기니 대단했다.

‘신이 디아시를 빚을 때만 정신 차렸다는 것은 비단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을 말하는 거였구나.’

검을 쓰는 직업임에도 그의 몸엔 티끌 하나 없었다. 그의 어깨와 가슴은 장벽처럼 두꺼웠으나 허리 아래는 표범처럼 매끈하고 날렵했다. 예쁘게 쪼개진 근육은 어떻고.

선생이 보여 준 그림 속 물렁거리는 남정네들과는 다르게 아름답고 위협적인 몸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의 가슴부터 배꼽 아래까지를 천천히 훑어봤다. 과감하게 노출을 감행한 노마는 뒤늦게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제 선생이 말하길, 매일같이 이론을 공부해도 실전 한 번만 못하다고 하더군요.”

‘젠장, 같은 선생이었나?’

“처음이라 서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마가 벌건 얼굴로 포부를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숨이 턱턱 막혀 와, 잠시라도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되도록 눈을 피하지 말라는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다. 나는 우등생이었으므로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 순간, 눈 깜빡할 새 그가 마법처럼 빠르게 내 옷을 벗겨 냈다. 가운에 얇은 속옷 하나 입고 있었으니 순식간에 나신이 되는 것이 당연하긴 했다만, 그의 손길은 충격적이게도 매우 거침이 없었다.

와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숨을 참았다. 시침,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 외에 누군가의 앞에서 나신이 된 건 처음 같았다.

확실히 오늘 노마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볼 빨간 것도 평소와 다른 발그레함이 분명했다. 나는 동공을 떨며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왜 이리 능숙해? 왜 이렇게 거침없지? 포옹이나 입맞춤엔 그렇게 정신 사납게 굴면서 이건 왜 막힘이 없어? 눈빛은 또 왜 그래?

애초에 어떻게 사람이 옷을 벗고, 맨몸으로, 맨살을 맞댈 수 있는 거지?

그와 이래도 되는 게 맞나?

머릿속엔 수많은 의문이 솟아났지만.

“이거, 이거 사람들은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다들 미쳤나 봐.”

막상 뱉어 낸 말은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우뚝 움직임을 멈춘 노마가 코앞에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잠, 잠깐만. 노마, 이건―.”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노마가 한숨을 내쉬듯이 가볍게 웃었기 때문이다. 그의 볼이 한층 붉어지고 눈동자엔 언뜻 환희 비슷한 것이 스쳤다. 그 얼굴은 꼭, 행복에 돌아 버린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사.”

제길.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닥치라는 말보다 강했다.

딱딱히 굳은 내가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얼음이 된 나를 녹이듯 그가 입술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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