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대신관이 주례를 맡아도 어색함이 없는 역사적인 결혼이었지만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달째 바그다트에 갇혀 있었다.
그건 니콜라스 디아시도 마찬가지로, 그는 사랑하는 형의 성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닉스의 봉인은 하루도 쉬어선 안 됐기 때문이다.
자연히 나의 성혼식 주례는 서부 신전에서 가장 높은 서열을 가진, 고위 신관 이디오가 맡게 되었다.
‘맥포이 가주’를 보면 맹수를 마주친 것처럼 온몸을 떠는 이디오는 주례를 보는 것을 끔찍한 형벌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맥포이와 디아시의 결혼을 그보다 더 서열 낮은 자가 맡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눈물을 삼키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맡았다.
“에……. 그럼, 어……. 먼저―.”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거진 두 번은 말을 더듬는 이디오 덕분에 그의 앞에 선 나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나는 이디오에게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고, 이디오는 딱 여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두 분은 서로 오, 오래된 것을 나누십시오.”
서제국 귀족의 성혼식에서 신랑과 신부 되는 자는 두 가지를 나눈다.
첫째로, 오래된 것.
보통 가보를 나누며 짧게는 한 대에 걸쳐 내려온 반지 따위를 교환한다.
노마 디아시가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수 그의 장갑을 벗기기 위해 그 손을 잡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장갑을 벗기는 손끝이 떨렸다. 부디 이를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지만 그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담담한 척하며 그의 왼손 약지에 보랏빛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워 넣었다. 자수정은 대단한 보석은 아니었지만, 이 반지는 가장 오래된 맥포이의 가보 중 하나로 주로 안주인이 소유했다.
이젠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한 어머니의 반지는 오랫동안 주인이 없어 내가 끼고 다녔다. 아마 필립 모퍽과 결혼했다면 이 반지는 여전히 내 손가락에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반지가 노마의 손가락에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은 하얗고 곱긴 했지만, 마디와 혈관이 도드라진 기다란 남자 손가락에 그 반지가 끼워진 것이 새삼 어색하기도 했다.
노마 디아시가 자신의 손바닥에 내 손을 얹었다. 커다란 그의 손은 퍽 안정감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내 손에 씌워진 장갑을 벗겨 냈다.
노마는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 디아시 선대 가주 부인 귀네스의 반지를 준비했다. 밀란이 처음 귀네스에게 선물한 반지라고 했던가. 언제나 어머니의 반지가 있던 자리에 푸른 보석이 박힌 귀네스의 반지가 끼워졌다.
“에, 다음으로 두 분은……. 메, 메헤라께서 주신 것을 나누십시오.”
둘째, 여신이 준 것.
신랑과 신부 되는 자는 성혼식에서 여신이 내린 세 번째 이름을 나눈다.
부모 자식 사이에 나누는 세 번째 이름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가족이 됐음을 의미한다나. 신앙심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 번째 이름이란, 까딱 누군가에게 잘못 알려 줬다간 알포의 저주에 이용될 수 있는 약점일 뿐이었다.
이번엔 노마가 먼저였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듯이 허리를 숙여 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코가 닿을 것 같은 거리감을 버텼다. 고장 난 신부를 보고 신랑이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조에.”
웃음을 참던 노마는 귓속말 끝에 기어코 남몰래 내 귓불을 앙 물었다. 난잡하기 짝이 없는 돌발 행동에 나는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지루한 예식에 방심하고 있던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노마를 쳐다봤다. 그러나 최근 제법 뻔뻔해진 그는 볼만 조금 붉혔지 이젠 눈도 피하지 않았다.
“시, 신부께서도…….”
내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마를 바라보고만 있자, 이디오가 눈치를 보다 조그만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칙한 행동을 한 노마를 한 번 더 노려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냉큼 허리를 숙여 내 입 쪽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키니스.”
노마가 허리를 펴 다시 날 마주 보고, 우린 다음 순서에 맞춰 손을 맞잡았다. 키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에……. 그럼, 두 분은 한 가지씩, 맹, 맹세하십시오.”
정오의 햇볕을 받아 노랗게 반짝이는 금안을 홀린 듯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힘닿는 대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애초에 노마 디아시가 이 결혼에서 바란 것이 행복이었다. 정확히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의 입으로 내 옆에 있는 것이 행복이랬으니 어떻게든 되겠거니 싶었다.
내 맹세에 노마가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평소와 다른 미소였다.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어딘가 가라앉아 보였다. 성대하게 청혼을 말아 먹은 날, 탑 위에서 마주했던 표정과 비슷한 것도 같았다.
한편 힘닿는 대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아이사의 말에 노마는 그 자체로 이미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제 욕심이 하루하루 커져 이젠 옆에 있는 정도론 만족할 수 없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저렇게 선뜻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노마는 그녀 앞에서 산뜻해 보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사육제의 마지막 날, 그녀를 만날 생각에 들떴던 노마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다급하게 탑에 올랐다. 전에 본 들짐승 같은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분명했다.
여차하면 그의 목을 자를 생각을 하며 마지막 계단을 오른 순간. 노마가 본 것은 아이사가 그 사내를 마구잡이로 구타하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었다.
“노마 디아시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
그녀의 날 선 외침에 발이 묶인 노마는 감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남자에게 날아가 그 목을 비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비명에 노마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것으론 부족해 옆자리를 꿰찼지만 욕심은 끝이 없고, 그사이 자신은 기어코 그녀의 마음까지 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충격은 마치 십수 년 전 신체 말단부터 시작해 몸이 조각조각 가루로 쪼개졌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몸이 굳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남자를 응징할 수조차 없었다.
“어디 한번 계속 순진한 척해 봐, 이 여우 새끼야. 얼마나 갈지 나도 궁금하군.”
못이 박힌 듯 딱딱하게 굳어 있을 때, 붉은 머리의 사내가 스쳐 지나가며 비아냥댔다. 악의 넘치다 못해 살의가 느껴지는 그 음성에 금안이 차게 가라앉았다.
노마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얕은 잇자국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아―. 그 사내를 죽였어야 했는데.’
붉은 머리 사내의 도발로 신경 줄이 죄다 끊긴 지금의 심정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평생 그녀와 단둘이, 1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를 훔쳐서 달아나면 괜찮을까.’
그러나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녀는 웃지 않을 것이다. 노마는 저도 모르게 부피를 키워 나가는 어두운 상상들을 애써 떨쳐 냈다.
노마는 아이사가 웃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웃음은 귀했고, 노마는 그녀가 뭘 해도 좋았다. 특히 그녀가 웃을 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그러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저 당신 옆에서 당신 눈길 한번 기다릴 뿐이지. 그러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더 웃어 준다면, 당신이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난 뭐든.
노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절대로 당신 옆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절 올려다보던 그녀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노마는 그게 화가 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당신이 제게 썩 꺼지라고 하셔도, 절대로 멀리 가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 당신이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겠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분에 겨워 소리쳤던 것처럼, 평소라면 입에 담지 않는 거친 표현을 썼다. 제 입에서 나오는 된 발음이 어색했다.
그녀는 해괴한 걸 보는 표정으로 절 바라봤다. 그러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끝에 푸,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이내 소리 내어 웃으시는 게 아닌가.
‘아.’
그녀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또 처음이라, 노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터뜨린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노마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것으로 확실했다.
‘나는 정말 이거면 되는구나.’
가슴 한구석에서 온갖 음습한 가능성들을 따져 보던 노마는 빠르게 그것들을 폐기했다. 그는 단숨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그녀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를 바라보며 까르르 웃는 두 남녀를 앞에 두고, 이디오는 종말의 암시를 본 사람처럼 벌벌 떨었다.
‘오, 메헤라시여.’
그도 그럴 게 이디오는 그간 저분이 비웃거나 화가 나서 헛웃음을 짓는 것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례하게도 이 결혼이 마녀 같은 맥포이 가주가 아름다운 성기사를 협박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눈이 부신 남자를 가련한 인질쯤으로 보고 있었단 말이다.
‘서, 설마, 정말 연애결혼이란 말인가? 그 맥포이 가주가?’
그러나 지금 보니 맥포이 가주와 디아시 경을 둘러싼 소문처럼, 두 사람은 정말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디오는 멍청한 얼굴로 한 미인이 폭군을 길들였다는 어느 신화를 떠올렸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맥포이 가주의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곧이어 그는 허겁지겁 마지막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두 분은 이 시간부터 메헤라의 이름으로 부부가 되셨음을 선언하니, 입을 맞추십시오.”
다행히 이디오는 마지막만큼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맥포이 가주와 그의 가주 부군이 된 꽃 같은 남자가 축복을 받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황태자 빌리넌트는 주례석이 낱낱이 보이는 가장 상석에 앉아 그 모습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지켜봤다. 살면서 눈치를 본 적이 없는 그는 경계 어린 시선을 숨길 생각조차 못 했다.
눈이 돌아가는 성대한 성혼식이었지만 빌리넌트의 시선은 맥포이 가주의 머리통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꽤 봐 줄만 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눈을 못 뗀 것은 아니었다. 빌리넌트는 저 자그마한 머리통을 당장에 부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성혼식을 망치지 않고 얌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은, 망나니 같은 성품을 가진 그로서는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긴 했다.
빌리넌트는 성혼식이 시작하기 직전, 한 보고를 받았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해적을 서쪽 해상 끝에서 봤다는 자를 찾았습니다.”
빌리넌트가 며칠 전 나름대로 정보원을 굴린 끝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붉은 머리칼의 해적이라면 맥포이 가주 계집과 그렇고 그런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가노’라는 자가 분명했다.
빌리넌트가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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