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나는 노마의 손을 잡고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때마침 사위가 한층 환해졌다. 이디오가 마지막 남은 성력을 불사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뻐요.”
“…….”
“함께 불꽃놀이를 보자는 약속을 지켜 주셨군요.”
부드러운 불빛으로 밝혀진 풍경 속에서 노마 디아시가 내 손등에 답례하듯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이 절망스러웠다.
“……내 옆에 있다고 행복하겠나. 나는 정말 모르겠어.”
이틀 밤을 새우고 바락바락 화를 내다 핏줄이 다 터진 눈알을 하고선,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엑트라가 열심히 골라 준 대사를 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리를 심하게 질러 댄 탓인지 골이 울려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언젠가 가노 그 자식이 내게 어느 쪽으론 눈치가 영 없다고 한 적이 있지만, 나는 감정 읽는 눈치가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노마는 분명 웃고 있지만 슬퍼 보였다. 저 얼굴에 대고 청혼은 무슨. 저 남자도 내 꼴을 보아 뭔가 대단히 망한 것을 알 테지.
“다 들었군.”
“…….”
노마는 아무 답이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은 걸까.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벌게졌을 게 뻔한 내 눈가를 다정한 손길로 슬슬 쓸 뿐이었다. 그러다 한참이나 내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직전에 가노가 목덜미를 문 것이 생각나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자, 그가 방긋 웃어 주곤 눈가를 쓸던 손을 내려 목덜미를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전에 본 적 있는 따스한 빛이 번쩍이고, 잠깐 간지러움이 일었다.
노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괜히 초조했다.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이디오가 만든 혼신의 빛 조각들을 빙 둘러보는 그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시 한참 서로를 마주 보고 나서야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이런 분위기에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새삼 잠 줄여 가며 준비한 청혼이 완전히 망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 서러웠다.
“해 주세요.”
노마가 부드럽게 양손을 맞잡으며 속삭였다. 눈을 감은 그가 채근하듯이 코끝을 맞대 와서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습니다. 해 주세요.”
내가 망설이자 그가 다시 한번 그렇게 속삭였고, 그사이 주변을 밝혀 주던 이디오의 성력마저 사그라들었다. 늙은이의 기력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어두컴컴한 첨탑 위에서 술주정뱅이들의 왁자지껄한 주정을 배경 음악 삼아,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노마 디아시.”
박박 악을 쓰느라 다 쉬어 버린 내 목소리는 끔찍했다. 젠장―, 이렇게 엉망일 수가.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만 같아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네, 아이사.”
그러나 노마 디아시의 존재가 이미 완벽한 낭만 소설의 한 구절이었다.
그가 내게 존칭을 하지 않으니 생경했다. 하지만 지금 허락도 없이 존칭을 물린 것이냐고 따질 만큼 분위기를 모르지는 않았다. 저렇게 애절한 목소리로 답하는데, 내 목소리 좀 쉬었다고 입을 계속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부군이 되어 줘요. 잘해 주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급하게 날것의 문장이 멋대로 튀어 나가고 말았다.
“네.”
멋대가리 없는 청혼에 그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노마 디아시는 언제나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정말 기뻐서 웃을 땐 다른 얼굴을 한다.
‘그래. 그는 이렇게 꽃이 만개하는 듯, 햇살인 양 화사하게 웃지.’
그의 웃는 낯에 모든 긴장과 설움, 두려움 따위가 잠시 잊혀졌다.
“당신이 정말 마녀여도 좋고.”
또다. 또다시 세상에 노마 디아시와 나만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시선에 빠르게 사로잡혔다. 별 가루를 모은 것 같은 그의 금안, 거기에 담긴 내 얼굴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절 사랑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뭐라는 거람. 어리석은 노마 디아시, 또다시 손해 보는 말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난 이번에도 당신 손해라는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어쨌건 멋이라곤 하나 없는 내 청혼보다 그의 대답이 훨씬 그럴싸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래서야 내가 청혼을 받은 것만 같았다.
“그를 정말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를, 진짜 사랑하기라도 해?”
비슷한 것을 묻던 황제와 가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어지럽게 귓속을 울렸다. 머릿속이 소란했다. 가슴은 쿵쿵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나?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맥포이 가주가 되어서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이사 맥포이는 그러면 안 된다.
무엇보다 노마는 날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착각에서 벗어난 그가 맥포이를 떠나 버리면 그땐 정말.
“아이사.”
……그때는 뭐?
다음 순간 노마의 커다란 손이 내 양 뺨을 감싸 왔다. 깨지기 쉬운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볼부터 얕은 소름이 퍼져 나갔다. 아래에선 여전히 시끄러운 축제가 한창이었음에도 사위가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그런 타이밍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결혼을 약속한 후엔 으레 입을 맞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배움이 빨랐으니.
다음 순간 내 입술에 노마의 말랑한 입술이 내려왔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 * *
“돈 많아 보이네.”
솔직하지 못한 말에 나는 왼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까딱였다.
“아, 뭐!”
한창 반항기를 겪고 있는 소년이 왁, 소리를 질렀다. 아치가 오늘 유독 싱숭생숭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예뻐. 축하해.”
내 시선에 못 이긴 아치가 결국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맥포이의 간판 미남 해리 폴른 경이 내게 처음 검을 바쳤던 날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아까부터 대놓고 얼굴을 찌푸린 아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디아시 경이 맥포이가 되는 날인데 표정이 왜 그러냐.”
“…….”
“고모보다 더 좋아하는 디아시 경 아니야?”
“아잇, 그거랑 같아? 고모는 섬세하질 못해. 정말 바보야.”
“이게 뻑 하면 고모한테. 자꾸 그러면 몽둥이를 가져오는 수가 있어.”
“아, 몰라! 그냥, 진짜 가족이 생긴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가족이라곤 고모뿐이었는데 어쩌라는 거야…….”
아치는 오늘 같은 날에도 변함없이 괴팍한 고모에게 치를 떨며 버럭 소리쳤다. 그러면서 정말 어색하기라도 한 듯 발끝을 동동 굴리며 비비적댔다.
‘진짜 가족이라니. 애가 뭔 말을 하는 거람.’
그러나 메마른 나의 감성으론 섬세한 꼬맹이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고, 와중에 쓸데없는 단어만 뇌리에 꽂혔다.
“……나 두고 디아시 경만 찾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외를 하니.”
“아니……. 나 빼고 둘이서만, 친해지면 어떡해.”
내가 모른 척 다른 소리를 하자, 얼굴이 시뻘게진 아치가 눈을 데루룩 굴리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아하. 요컨대 막상 식을 앞두니 고모 뺏긴 기분이 들어서 불안하다 이거였다.
말하고 나서 자기도 쪽팔렸는지 애꿎은 앙투아네트를 꽉 끌어안는 것이 어린이다워서 귀여웠다. 앙투아네트 효과인지 몰라도 아치는 요즘 들어 제 나이에 맞게 어리광이 부쩍 늘었다. 어른들의 흐뭇한 눈빛이 내성의 유일한 어린이에게 쏟아졌다.
‘하여튼 조카는 조카라고 귀염을 떠는군.’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고 아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저번처럼 냉큼 고모 품에 안기라는 말이었다.
“에익! 느끼하게 뭐 하는 거야? 이제 그런 거 안 해!”
그러나 아치는 기겁을 하며 후다닥 물러섰고, 시모어 부인은 예복이 망가진다며 내게 엄하게 경고했다.
“뭐야? 저번엔 잘만 안기더니! 그런 말투는 또 누구한테 배운 거냐.”
“폰 바인스 경. 디아시에서 온 기사가 그러길, 갓난아기도 아니고 가족끼리 포옹하는 건 상상만 해도 느끼하대.”
나는 노마 뒤에서 가끔씩 날 노려보던 치기 어린 기사 놈 하나를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폰 바인스는 잘 몰라도 그 형제들은 얼추 알았다. 그들은 <오필리아와 밤>에 나오는 오필리아의 조력자들이었다. 내 기억으론 내가 니콜라스의 목에 칼을 들이댔을 때 날 아무렇게나 붙잡아 떼어 낸 이가 그 집 둘째였을 거다.
어쩌다 저런 이야기가 오갔는진 몰라도 바인스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는 고모 표정은 왜 그러는데.”
그때 이번엔 아치가 내 표정을 걸고넘어졌다.
“내 표정이 어때서.”
“지금 날 걱정할 때가 아니야, 고모. 하나도 설레는 표정이 아니잖아.”
그럼 이렇게 날치기로 결혼을 하는데 실감이 나겠나? 실감이 나지 않으니 당연히 설렐 수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누가 보면 새 신부가 아니라 볼일 참는 사람인 줄 알 거야. 그렇지, 시모어 부인?”
감히 고모에게 똥 마려운 강아지 같다는 표현을 하다니. 마침내 내 얼굴이 팍 구겨졌고, 시모어 부인은 화장이 망가진다며 또다시 되레 나를 타박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성혼식을 앞둔 내 기분은 어느 때보다 복잡스러웠다. 이제 와 우습지만, 지금도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몇 초에 한 번씩 들었다.
‘가문의 주인이란 자가 제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해 아이의 눈에도 혼란스러운 게 보일 정도라니…….’
나는 힐끔 창밖을 바라봤다. 거짓말처럼 완벽한 하늘이 보였다. 오늘 날씨로 말할 것 같으면 근래 가장 눈부신 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이따금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사육제에 이어 가주의 성혼식을 맞아 맥포이는 며칠째 축제 분위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간만의 경사인 데다가, 대귀족 간의 결혼 자체가 오랜만이라 이곳저곳에서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또한 대귀족의 성혼식엔 친히 황가의 일원이 참석하곤 했다. 이번 맥포이와 디아시의 성혼식엔 무려 황태자께서 발걸음하신다는 소식에 구경꾼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가주님. 일어나시지요.”
에리카가 시간을 알렸다. 거추장스러운 예복 탓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조차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내 나는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주렁주렁한 내 치맛단을 품에 안고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등 뒤에서 별안간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돌아보니 글렌이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물도 많으면서 웬일로 안 우나 했더니, 용케 지금까지 참은 모양이었다. 모두가 소리 없이 오열하는 기사단장을 한 번씩 훔쳐보긴 했으나,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한 걸로 유명한 글렌에게 새삼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딱히 그에게 ‘어허, 눈물을 그쳐라’ 하고 명하지 않았다. 다만 유난스러운 할아범을 보고 있자니 웃기기도 하고 괜히 마음이 소란해서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신을 믿는 서제국에서 성혼식은 보통 신전 또는 가까운 사원에서 치러진다.
나의 경우 본성과 가까운 신전을 선택했는데 거리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내성에서 신전까지 가는 마찻길이 바로 구경꾼들이 대귀족의 결혼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언뜻 금 마차로 보일 만큼 호화스러운 장식으로 덮인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나와 똑같은 자수가 새겨진 예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따스한 봄날의 햇볕 아래에 선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아까부터 묘하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노마 디아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남몰래 호흡을 가다듬고 그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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