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그럼 이제 슬슬 올라가시던가요. 탑으로.”
“그러지.”
제법 무심하게 말했지만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챈 에리카는 준비하는 과정이 더럽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밌긴 하네, 하고 생각했다.
둘만 있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에리카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탑 아래에서 대기했다. 극성맞은 글렌 역시 탑에 오르지 못했고, 호위 기사 몇몇만 눈에 띄지 않게 곳곳에 몸을 숨겼다.
글렌을 제외하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가주님의 청혼 이벤트’를 응원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창피했으며, 막상 청혼을 하려니 상당히 민망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스탕 부인 이 망할 노인네를 그냥.’
나는 약한 울렁임을 느끼며 탑의 난간을 부여잡고 고개를 떨궜다.
해가 지는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시끌벅적 떠들썩하게 사육제의 마지막 날을 즐기고 있는 맥포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너르게 펼쳐진 호수에 비친 태양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제길. 실은 축제의 풍경 따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이상 이 떨림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산전수전을 겪었어도 아직도 긴장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긴장을 풀기 위해 일부러 엉뚱한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예를 들어 일몰 때문에 붉게 타오르는 호수 면을 보며 지금쯤 이디오가 저기 어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던가.
겨울이 끝났어도 아직 밤이면 날이 쌀쌀한데 겁 많은 늙은이가 고생이 많았다. 당분간 구박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던가.
마침내 동그란 해가 완전히 호수 뒤로 사라진 순간 사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왔구나.’
엑트라가 알려 준 느끼한 청혼 멘트를 속으로 달달 외우며, 나는 심호흡 끝에 당차게 뒤를 돌았다.
“…….”
“표정이 왜 그래.”
그러나 기다리던 사람은 거기 없었다. 대신 웬 우락부락한 남자가 나를 향해 비뚜름하게 웃고 있었다.
“바람피우다 걸린 귀부인처럼.”
빌어먹게 느끼한 가노의 말투에 결국 미간이 와작 찌푸려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등 뒤를 확인했다. 왜 그랬는지 나조차 모르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바람피우다 걸린 귀부인의 심정이었다.
“언제 귀환했지.”
“당신이 내 뒤통수를 이렇게 칠 줄 몰랐어.”
가노가 다른 소리를 하며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으르렁거렸다.
“뒤통수를 치다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이게 뒤통수친 게 아니야? 나를 가지고 아주 노는군. 날 멀리 보내 놓고 결혼을 한다고? 그것도 그 디아시와?”
“가노. 자의식이 과하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저지하며 정색을 했다.
“내가 자네 몰래 날치기 결혼을 하려고 그대를 멀리 보냈단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결혼한다는데 그대가 무슨 상관이람.”
“너무하는군.”
그의 얼굴이 상처받은 짐승처럼 서럽게 일그러져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다 알면서.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못되게 말하는 거야?”
“……뒤통수를 쳤다느니 먼저 못된 소릴 한 건 자네야.”
타오르다 못해 불꽃이 튀는 듯한 눈빛을 더 이상 마주 보기 힘들었다. 일몰을 배경으로 한 붉은 머리 남자는 참 부담스러워, 나는 결국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노마 디아시와의 결혼은 수지에 맞지 않아. 지금까지 당신이 한 선택과 다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황위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에 노마 디아시와 결혼하는 것은 가문을 두고 봤을 때 좋은 선택이 아니다. 대귀족 간의 결합인 만큼, 견제의 대상이 되기 쉬우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다면―.’
가노가 답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와 결혼하지?”
“그는 성기사이며, 디아시지. 여신의 은혜와 거리가 먼 맥포이에게 좋은 부군감이야.”
“지금 그와 결혼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걸 모르지 않잖아. 거짓말 치지 마. 모든 귀족들이 적으로 돌아설 텐데?”
“우스워라. 귀족들이 언제는 내 편이었나?”
“귀족뿐인가? 황제는 어떻고.”
“황제가 뭐라고. 난 맥포이야.”
“아이사. 난 당신하고 말장난하려고 온 게 아니야.”
“가주님.”
내가 단단히 벽을 치자 가노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사이 나도 모르게 재차 그의 등 너머, 계단으로 통하는 문 쪽을 바라봤다.
“하.”
그는 내 시선이 자꾸만 제 등 뒤를 향하는 것을 눈치채고 실소했다.
“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야? 이제 그만 내려가.”
“내가 몇 년이나, 당신을 바라봤다고 생각해.”
내려가라 했지만 가노는 오히려 바짝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나는 한 걸음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선 넘지 마. 정신 차려.”
“그놈도 안 되는 이유투성인데, 몇 년 동안 당신 옆에 붙어 있던 나는 왜 안 되는데.”
“그건 그대가 가장 잘 알잖아.”
가노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해적이며, 망국의 왕자이지만 사생아다.
세기의 사랑은 무슨. 그와 가볍게 한두 번 만나도, 풋사랑을 해도, 불장난 같은 사랑을 해도. 그와 염문이 사실이 되면 아이사 맥포이는 해적의 정부 취급이나 받으며 모든 업적은 몸을 팔아 이룬 것이 돼 버릴 것이다. 순식간에 맥포이가 우스워질 것이다.
그걸 감수하면서 저 남자의 손을 잡아 줄 이유가, 내겐 없다.
가노는 맥포이 가주 부군이 될 수 없다. 그는 연인으로도 옆에 둘 수 없다. 덩치에 맞지 않게 애처롭게 구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거다.
“그를, 진짜 사랑하기라도 해? 그런 거야? 그래서 결혼하나?”
침묵하던 가노가 내 어깨를 붙잡더니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나는 불현듯 두려움을 느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다그치는 가노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노의 말이 마치 끈적한 저주처럼 발밑에서부터 휘감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저 말에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궁지에 몰린 기분이 되어 일단 부정부터 하고 봤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느리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 괜히 물어봤어.”
멋대로 물은 주제에 가노가 젠장맞을, 하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헛웃음을 짓더니,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렸다.
“아니야. 아니라고 했어.”
가노가 내 부정을 믿지 않자 조급했다. 오기가 생긴 나는 뒤늦게 단호하게 부정했다.
“오, 아이사. 아니라고?”
그러나 가노는 한껏 비꼬는 투로 내게 매섭게 되물었다. 이번엔 내 얼굴이 처참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아이사. 그와 손을 잡고 포옹했나?”
“…….”
“그가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입이라도 맞추던가?”
나는 부정하지 못했고, 가노는 고통을 참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턱뼈가 툭, 불거졌다.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가노가 한 손으로 내 턱 끝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론 내 허리를 잡아챘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그를 피해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급한 대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
가노의 거친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가까스로 그의 입술을 피한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그건 가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맞춤을 피한 건 이걸로 두 번째였다.
내 얼굴과 허리를 붙든 가노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힘 조절을 못 하는 사람처럼 손을 떨던 그가 곧 어색하게 힘을 뺐다. 동시에 바짝 붙어 있던 그의 얼굴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노는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하지 못했다.
“아!”
그대로 멀어지나 싶었던 가노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내 목덜미를 약하게 깨물었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마침내 가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팔을 휘둘러 그의 뺨을 쳐올렸다. 쩍― 하는 소리가 선선한 공기를 흉흉하게 갈랐다.
“하아, 하. 이 X발 새끼가…….”
그러나 가노의 고개는 미동도 없었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한 채였다. 내 손바닥만 화끈거리고, 나만 호흡이 엉망진창이었다.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에게 대단한 신뢰는 없었다만 새삼 배신감이 어마어마했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이게 몇 번째지? 이 개새끼야! 죽여 버리겠어!”
다음 순간 나는 가노에게 마구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욕설을 뱉었다.
“나는! 맥포이 가주야!”
지은 죄가 있으니, 가노는 그에게 솜방망이 수준일 나의 반격을 가만히 받아 주었다.
“맥포이 가주가! 누굴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맥포이 가주가 노마 디아시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외치는데 기분이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어쩐지 아주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이나 보고 X발, 그런 말을 해!”
가만히 맞고만 있던 가노가 발끈해 주먹을 퍼붓는 내 손목을 잡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대번에 손을 옴짝달싹 못 하게 되자 분노로 눈이 돌았다.
나는 가까워진 가노의 안면에 기다렸다는 듯이 박치기를 했다. 인중을 맞은 그가 작게 신음했다.
“닥쳐! 놔! 안 놔? 너 이 개새끼, 내 눈에 띄기만 해 봐. 당장 사라져! 꺼져, X발 놈아! 꺼지라고!”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러 대자 목에서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팔목을 결박한 채, 가노는 착잡한 얼굴로 숨이 넘어가도록 날뛰는 날 내려다봤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 나게 한 건 자기면서, 재수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실언을 했어. 일단 내가 다 잘못했으니 숨 좀 제대로 쉬어 봐.”
“닥쳐! 이 변태 새끼, 안 꺼져?”
내 발차기가 아슬아슬하게 가노의 중요 부위를 스쳐 갔다. 그제야 내 손목을 놓아 준 그가 결백하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세 걸음 물러섰다.
붙잡던 힘이 사라지자 나는 진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망이 된 호흡을 가다듬느라 가노가 슬쩍 뒤를 돌아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나만. 딱 하나만 묻지.”
“싫어, 변태 놈아.”
“내가 제국 출신에 평범한 귀족 남자였다면, 당신 부군이 될 수 있었나?”
“아니, 될 수 없어.”
“…….”
“넌 제국 출신에 평범한 귀족으로 태어났어도 해적질을 했을 거다.”
말 그대로였다. 배경을 차치하고, 가노는 맥포이 가주 부군으로 살기엔 지나치게 자유분방했다.
무엇보다 그의 욕심은 끝이 없기도 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여우는 나보다 더하다고.”
짧은 침묵 뒤, 가노가 내 속을 읽은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속내를 들킨 기분에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 그가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뿌우우―.
때마침 기다란 호각 소리가 들렸다.
내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고, 호각 소리를 신호로 호수 한가운데에서 금빛 한 줄기가 솟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기 무섭게 팡― 소리와 함께 여러 갈래로 나뉜 불빛이 조각조각으로 흩어졌다.
‘망했다.’
하늘에 금가루가 뿌려진 듯 퍽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쭈그려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성스러운 장면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나는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아이사 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오랜만에 보는 노마 디아시가 서 있었다. 그는 오늘도 그림 같았으며 금빛 조각들이 밝힌 밤 풍경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노마는 처참한 꼴로 차가운 돌바닥에 쭈그린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빙긋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내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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