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딱 뒈지겠군.”
지난 세 달여간의 감상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완연한 봄이 되어 성혼식까지는 어느덧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결혼 준비는 시모어 부인의 진두지휘 아래 무섭도록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사이 안살림을 떠맡은 것은 에리카, 아치를 맡은 것은 웃기게도 예비 부군인 노마였다.
디아시에서 매일같이 사람과 물품을 보냈지만 맥포이는 언제나 일손이 부족했다. 결혼 준비만으로도 빠듯했지만 내가 밤까지 새워야 했던 이유는 곧 있을 사육제 때문이었다.
맥포이의 사육제는 최근엔 멧 축제로 불렸다. 만물의 소생을 축하하는 사육제에서 맥포이가 축하하는 것이야 당연히 서부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멧이다.
건국제가 한 달이라면 사육제는 일주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혼돈의 부어라 마셔라의 기간이 시작된다.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다. 크고 작은 행사를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해 세금을 조절하고 치안을 강화하고. 와중에 틈틈이 성혼식 준비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지난 세 달여간, 당연히 결혼을 재고하고 말고 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결혼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거뭇해진 눈 밑을 꾹꾹 누르며 인상을 썼다. 절대로 보름하고 며칠 후에 결혼을 치르는 새 신부의 몰골은 아니었다.
“다음은 누구냐.”
“스탕 부인입니다, 가주님.”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퀭한 에리카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그녀가 안경을 꺼냈다면 말 다 했다. 진심으로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런.”
다음 알현자는 하필 쓸데없이 힘이 넘치고 시끄러운 엑트라 스탕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가져올 소식은 중요했다. 며칠 전 패트라 랑드라이가 예정보다 한 달 일찍 출산했기 때문이다.
“무슨 소식을 가져왔지?”
“서신대로 패트라 랑드라이가 조산을 했습니다. 여아이고, 신전의 확인을 거친 결과―.”
그럴 필요 없지만 엑트라는 잠시 내 눈치를 보곤 말을 이었다.
“필립 모퍽의 친자가 맞습니다. 송구합니다, 가주님.”
“아이는 약속대로 ‘위고 신전’으로 보내라.”
담백하기 짝이 없는 내 반응에 엑트라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패트라의 아이가 필립의 친자일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꽤나 마음을 졸인 모양이다.
거래를 제안해도 되겠냐고 묻던 붉은 눈의 미인은 내게 딱 한 가지를 원했다.
아이의 신분 세탁이었다. 높은 확률로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요청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물론 그랬다면 거래는 불발이었을 것이다. 영리한 그녀는 그걸 알았던 모양이었다.
최고의 불명예를 안은 모퍽 가문은 분풀이로 패트라를 찢어발기려 들 테고, 아이 역시 분노의 대상일 것이다.
패트라는 제 욕심으로 품었으니 이 정도는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신전도 썩은 것을 아니, 여아가 태어나면 여사제만 있는 위고로 보내 아이를 신전 고아로 만들어 달라 청했다.
패트라는 역시 머리 굴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신전 고아란 보통 신전에서 태어난 부모 없는 아이를 뜻했다. 못난 부모와 상관없는 새 삶을 주기 적절했다. 아이가 운 좋게 성력이 있다면 그대로 신관이 될 수도 있었다.
그중 여사제만 받는 ‘위고’는 들어가기가 까다로운 편이나, 맥포이 이름으로 못 해 줄 게 없었다.
“예. 그럼 랑드라이는…….”
“알아서 살아남겠지. 머리 제법 굴리니 꽤 오래 숨어 살 수 있을 거다.”
나는 맹약을 시행하겠다는 종이에 인장을 찍으며 퍽 무미건조하게 대답했고, 엑트라도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성혼식 준비도 막바지겠습니다.”
그러나 볼일을 다 본 엑트라는 그냥 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미간을 살며시 구기고 한껏 우쭐하게 솟은 그녀의 광대를 노려봤다.
“왜 안 묻나 했다. 왜, 이제 좀 마음에 드나 보지?”
“말해 뭐 하나요.”
그렇게 엑트라는 시키지도 않은 예비 부군 예찬을 시작했다. 피곤에 찌든 내 귀엔 대부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청혼은 누가 어떻게 하셨는지요?”
청혼?
이제 썩 꺼지라고 말하려고 할 때,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가던 무수한 단어 중 하나가 귀에 박혔다.
굳이 ‘청혼’을 묻다니, 어쩐지 내가 아는 청혼과 의미가 다를 것만 같다는 촉이 들었다. 엑트라는 워낙 잡지식이 뛰어나기도 했으니.
“디아시에서 청혼서를 보내와서 내가 인장 찍어 보냈지.”
“……그런 거 말고, ‘청혼’ 말입니다. 청혼.”
역시 이게 아닌가 보군.
감을 못 잡는 나를 보고 엑트라가 감히 쓰레기를 보는 듯한 얼굴을 했다.
“뭐, 왜. 그 불순한 표정은 또 뭔가?”
“아니 그럼. 그 꽃 같은 분은, 그 먼 디아시에서 맥포이까지 오셨는데 멀쩡한 청혼도 받지 못하셨다고요?”
에리카가 엑트라를 향해 더 일 벌이지 말고 닥치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폭주 중인 엑트라는 멈추지 않았다.
“가주님. 다른 가문 사람을 데려오셨으니 마땅히 성대하고 화려한 자리를 만들어 혼인을 청하셔야 하는 줄 압니다.”
엑트라가 폭군에게 목숨을 걸고 충언하는 신하라도 되는 양 비장하게 말했다.
“그쪽에서 먼저 하자고 했는데 그럼 어쩌라는 건가. 뻔히 하고자 하는 것을 아는데 그걸 또 물어?”
듣기만 해도 비효율적이라 질색을 하자, 엑트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이런 일은 효율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저라면 너무나 섭섭하고 슬프겠습니다. 사육제니 뭐니 바쁘시다며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추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건, 맞다.
노마 디아시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지. 그나마 귀환 직후에는 식사 시간에 꾸준히 얼굴을 비치긴 했지만 최근엔 너무 바빠서 식사를 대부분 집무실에서 해결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너무 방치했나?
“이 먼 곳에 혼자 계시는데, 아무런 확신도 믿음도 주지 않으시고 그리 방치만 하시니…….”
엑트라가 쐐기를 박았다.
“혼자는 아니야. 디아시에서 보낸 사람이 몇인데.”
치졸한 변명에 다시 한번 쓰레기 보는 듯한 엑트라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엑트라의 연타 공격에 정신이 혼미했다. 행복하게 해 달라고 말하며 눈꺼풀을 내려 감던 노마 디아시가 떠올랐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며 흔들리던 금안이 떠오르자.
‘이건…… 내가 좀 쓰레기 같긴 하군.’
또다시 죄인은 나였다.
에리카는 저 개소리를 가만히 들어 주더니 급기야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주님을 지켜보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잠시 침묵 후.
“청혼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내가 그렇게 묻자 에리카는 얼굴을 와작 구겼고, 엑트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주책맞은 늙은이를 그냥!’
절망한 에리카가 안경을 벗어 던지고 엑트라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엑트라는 신이 나서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자신의 로망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엑트라에 의하면 청혼이란, 본래 청혼서가 오가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 사이에서 시작한 행위란다. 보통 남의 가문 사람을 데려오는 쪽이 혼인 의사를 묻는 것이 매너라고.
그런 것이라면 내가 아는 청혼과 다르지 않았다. 대충 으슥한 정원으로 불러다 묻고 답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또 별거라고. 따지자면 티베이 저택에서 노마 디아시와 입을 맞춘 것이 청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확실히 그날 내 쪽에서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긴 했다. ……멱살이나 잡은 것 같은데. 당연히 내가 그에게 혼인 의사를 물은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은 확실히 하는 편이 좋지.’
엑트라는 또 청혼이란, 죽을 때까지 기억에 남는 황홀한 순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강조했다.
‘황홀한 순간이라니 심히 주관적이지 않은가.’
엑트라는 내 고민을 읽은 듯, 어줍지 않게 정원으로 불러다 사용인들 다 보는 앞에서 대충 때우실 생각이면 차라리 노마 디아시에게 직접 물어보라 조언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 * *
“맥포이에 와서 제일 좋았던 장소가 어디입니까?”
오랜만에 식사 자리에 나타나 하시는 질문은 꽤나 뜬금없었다. 취조를 하는 듯한 아이사의 말투에 노마는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맥포이는 어디든 아름답지만, 맥포이의 활기가 한눈에 보이는 동쪽 탑이 좋습니다.”
노마는 장터가 즐비한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동쪽 탑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하얀빛, 노란빛, 푸른빛 중에 뭐가 좋습니까?”
“음, 노란빛이요.”
아이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꽃은 어떤 색을 좋아하죠?”
“보라색이 좋습니다.”
멈칫한 그녀가 왼 눈썹을 까딱이며 빤히 저를 쳐다봤다. 대답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시간이 별로 없는지 그녀는 곧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해가 진 후는 어떻습니까?”
“좋아합니다.”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에 그녀는 두 번째로 움찔했으나, 곧바로 근엄한 얼굴을 하고 덧붙였다.
“그럼 사육제 마지막 날에 해가 지는 시간에 동쪽 탑에서 나를 좀 봅시다.”
노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사는 대답을 듣자마자 그럼 이만, 하더니 사라졌다. 불시에 등장한 것처럼 퇴장도 갑작스러웠다.
“고모 왜 저래. 방금 우리 고모가 디아시 경에게 결투를 신청한 거예요?”
포크를 내려놓은 아치가 황망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가주님께서 절 아껴 주시려나 봅니다.”
‘아닌데. 화난 것 같던데? 완전 결투 신청인데?’
아치는 노마의 말이 마냥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그저 괴팍한 우리 고모와 결혼하는 디아시 경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노마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그녀와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 기뻤는데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녀가 또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물으시다니 깜짝 놀라게 해 준다는 생각은 절대 못 하신 거겠지.’
너무 귀여우신 거 아닌가. 노마는 밥을 먹다 말고 심장께를 움켜쥐었고, 아치는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 * *
“이디오는?”
“진작 호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에리카는 이게 웬 미친 짓거리인가 싶었지만 성실히 대답했다. 제 주인이 답지 않게 긴장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부의 최고 신관인 이디오는 고급 인력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오늘 서부의 주인 되시는 맥포이 가주의 지랄맞은 청혼 이벤트의 조명 담당쯤 되었다.
곧 해가 지면, 아이사 맥포이가 가주가 된 이래 처음으로 맥포이 본성에 불꽃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노마 디아시의 취향에 따라, 흔치 않은 금빛 성력을 보유한 고위 신관 이디오가 추위에 몸을 떨며 호수 한가운데서 대기 중이었다.
“피곤하시면 해 지기 전에 잠시 눈 좀 붙이시지요. 충신으로서 직언 하나 올리자면 사람 몰골이 아니십니다.”
제 주인은 사육제의 마지막 날 예비 부군에게 청혼하기 위해 이틀 밤을 새웠다. 당연히 그녀는 오늘 청혼이라는 중대한 이벤트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일주일 뒤에 결혼하는 새 신부로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잠들면 못 일어날 거다. 이젠 성력을 들이부어도 피곤이 가시지 않는군.”
“긴장 풀리는 차라도 대령할까요?”
“……긴장이라니. 내가? 하! 웃기는 소리.”
아이사 맥포이가 긴장이라니 웃기는 말이었다. 아이사는 한껏 오만한 목소리로 에리카의 걱정을 비웃었다. 이게 뭐라고 내가 긴장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몇 번째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아이사는 식사를 하는 노마를 불쑥 찾아가 그의 취향을 알아낸 후, 오늘 이 시간을 내기 위해 잠도 줄여 가며 사육제를 준비했다.
그렇게 드디어 망할 사육제의 마지막 날. 당연히 그를 보는 것도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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