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빌어먹게도 메르케시에게 제대로 된 조력자가 있군.’
가노가 2황녀가 있다고 알려진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메르케시는 그곳을 떠난 후였다. 그녀를 흉내 낸 가짜가 있었을 뿐이었다.
황제나 황후가 보낸 사람들은 멍청하게도 가짜를 감시하고 있었다. 진짜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과연, 쉽지 않을 거라며 웃던 아이사의 말대로였다. 자연히 가노의 귀환이 늦춰졌다. 그는 낭패감을 느끼며 입 안을 짓씹었다.
서쪽의 구석에 구석을 향할수록,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가노의 짐승 같은 촉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경고음을 보낼 때, 그는 극적으로 ‘땅의 끝’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메르케시를 찾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메르케시가 그에게 접촉해 왔다. 아이사의 말처럼 그녀는 모자라지도 미치지도 않았다. 아, 미쳤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메르케시 로덴시는 골 때리는 여자이긴 했다. 흐리멍덩하게 생겨선, 대뜸 자신은 모자라지도 미치지도 않았다고 소리치더니 궁금한 건 다 풀렸냐고 물었다.
“내가 특별히 자비를 베풀었으니 금화를 내놔라.”
황족 출신답게 엄청난 하대를 시전한 메르케시는 대뜸 산 도적처럼 금화를 뜯어냈다. 가노가 내어 준 것들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그녀가 심드렁히 덧붙였다.
“제국에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그러면서 사람을 붙였다가는 네 주인이 싫어할 짓을 할 거라고 말하며 남의 발밑에 단도를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다. 막되어 먹은 행동에 가노의 두꺼운 눈썹산이 꿈틀댔다.
“내 주인이 누군지 알고?”
동시에 생각보다 재미있는 만남에 흥미가 생긴 가노가 저급한 악당처럼 낄낄댔다.
“제국에 해적 부리는 게 둘인가?”
“해적이 한둘인가?”
“그대는 유명세에 비해 조심성이 없군. 자만에 가득 차서는 섬세하지가 못해. 내가 그대 주인이면 그대가 아주 거슬리겠어.”
예상치 못한 지적에 여유를 부리던 가노가 인상을 썼다. 딱히 호적수가 없는 그에게 몸을 숨기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먼바다에 나왔으니 방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새로운 태양이 뜰 거야. 그래도 호위가 필요 없나? 단신이 아니니, 필요할 텐데.”
빈정이 상한 가노는 메르케시를 한껏 도발했다. 새로운 태양은 제국의 새 황제를 뜻했으며 메르케시에겐, 아이가 있다.
메르케시는 잠시 놀란 표정을 했지만 곧 가노를 비웃었다.
“내게 애가 있다는 건 알면서 누가 내 뒤를 봐주는지는 모르나 봐.”
“아이의 아비가 권력자인가?”
“……흠. 내가 누구와 손을 잡은지 모르는 걸 보니, 그 미련한 것이 아직도 제 동생을 못 찾아갔나 보구나? 하여간 오지랖은 혼자 다 부리면서 막상 제 앞가림은 하나도 못한단 말이지.”
그녀는 완전히 질린 표정을 하더니 알 수 없는 말들을 혼자 중얼거렸다.
“난 이미 대―단한 분이 붙여 준 호위가 있어.”
가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황실을 피해 메르케시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
‘디아시나 맥포이. 그렇다면 디아시 쪽인가? 그것도 아니면 동대륙?’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썩 꺼지라고. 여신의 태양이 죄다 죽어도 내가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메르케시는 정말로 제국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가노는 그녀에게 몰래 사람을 붙일 생각을 하고 등을 돌렸다. 뜻하지 않게 시간을 오래 쏟아 슬슬 마음이 급했다.
“그나저나 그 멍청한 금발이 맥포이에 못 돌아간 거라면, 결혼은 어떻게 된 일이람?”
그러나 메르케시의 혼잣말에 가노는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짐승 같은 촉이 보내던 경고음이 선명해졌다. 그는 불쾌한 상상을 하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결혼이라니?”
이것 봐라. 메르케시는 뜻밖의 상황에 끌끌 웃었다.
‘이쪽을 보아하니 마녀와 해적의 염문도 아주 헛소문이 아니었나 보군. 마녀 쪽은 몰라도 해적은 마녀를…….’
눈치 빠른 그녀는 간만의 재미가 기꺼웠다.
“와―, 자네는 아는 게 뭐야? 서부의 마녀와 그녀의 해적에 대한 악명은 다 거짓인가 보군.”
“다시 한번 묻지. 무슨 결혼을 말하는 거지?”
“저런. 날 찾느라 바깥소식이 오래전에 끊겼나 봐. 미안해라.”
오래전, 메르케시는 니콜라스 디아시와 거래를 했다. 어리석은 제 언니, 칼리페시가 노마 디아시에게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황가가 숨긴 진실을 낱낱이 알려 주는 대신 그녀는 일신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가노가 메르케시를 찾아내기 직전, 그녀가 별안간 몸을 숨긴 이유는 다름 아닌 디아시와 맥포이의 결혼 때문이었다.
두 대귀족의 결합은 로덴시 황가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별히 움직임에 주의하라는 소식이 누구보다 빠르게 그녀에게 전해졌다.
‘맥포이와 디아시가 뜬금없이 결혼을 한다길래 오필리아가 드디어 과거 청산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눈이 맞은 거였나?’
하기야. 자신이 맥포이였어도 오필리아를 보자마자 목을 잘랐으면 잘랐을 것이다. 메르케시는 그런 생각을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매엔 즐거움이 한가득이었다.
“그대 주인, 아이사 맥포이가 결혼하잖아.”
가노의 표정이 가차 없이 무너졌다.
“왜, 그 싸가지 없는 니콜라스 디아시의 형님과―.”
가노는 메르케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등을 돌리기 무섭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 으하하, 하핫!”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르케시가 배를 부여잡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기다란 로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급기야 엎어져 웃어 대는 메르케시를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하하하하! 바인스 경, 보았나? 웃겨, 정말.”
“웃기지 않습니다.”
폰 바인스 첫째 형, 디아시의 정예 기사 맥 바인스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메르케시의 입은 폭탄이 따로 없었다. 여차했으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가노라는 자와 검을 맞대야 했을 것이다.
“하하핫! 하지만, 우습잖아. 여유로운 척 건방이나 떨다가, 마차가 떠난 지 한참이란 것을 이제야 안 거지. 저 덩치를 하고 꽁지 빠지게 제 주인을 쫓아가는 꼴이 그럼, 안 웃겨? 난 웃겨!”
“성품이 정말…… 참……. 못나셨습니다.”
과묵한 맥은 언제부턴가 메르케시에게 제법 신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망아지 같아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병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답이 없다고 여기는 막냇동생 폰도 그녀에 비하면 우아할 지경이었다.
“하―. 재밌어. 제국처럼 따분한 곳이 없는데 요즘은 거기가 제일 재밌어 보인다니까.”
맥이 경멸과 불안이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메르케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서부의 마녀가 소문과는 다르게 꽤 귀엽나? 노마 디아시며 저 해적 놈이 미쳐 날뛰는 꼴을 보니 제법 궁금하긴 하군.”
전 황녀께서 저급한 길거리 양아치처럼 귀족 여성을 논했다.
차게 식은 눈을 한 맥은, 제 주인 니콜라스를 보면 일단 달려들고 보던 창백한 여자를 생각했다. 제 주인에게 달려들어 글자 그대로 이빨로 물어뜯던 맥포이 가주는.
‘……귀엽다곤 할 수 없다.’
“이봐, 맥. 어쨌건 며칠은 호화롭게 놀고먹을 수 있겠어. 이참에 ‘이기오’에 틀어박혀 볼까?”
메르케시가 금화를 튕기며 유흥의 섬, 이기오에 가자 말했다. 그 모습은 흡사 시정잡배와 같아 우아한 디아시의 기사는 또다시 어느새 고질병이 된 두통을 느꼈다.
* * *
방문 앞을 잔뜩 메우고 있던 하녀들이, 방문을 닫고 나온 하녀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어때? 어때? 어때?”
“하! 참 나, 어떻긴. 전에 한번 모셔 봤잖아? 왜들 이래.”
방문을 닫고 나온 하녀가 잔뜩 상기된 제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땐 디아시에서 온 사용인들이 찰싹 붙어 있는 바람에 우린 가까이서 못 모셨잖아!”
“……말해 뭐 하니!”
다급하게 재촉하는 하녀들에게, 방에서 나온 하녀가 더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우리 예비 부군께선―.”
하녀들이 두 손을 모으고 숨을 죽였다. 묘한 긴장감 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천사님이 분명하셔!”
꺄아아아아! 황홀한 함성이 며칠째, 노마 디아시의 방문 앞에서 그칠 줄 몰랐다.
“다들 처음엔 경계하는 척이라도 해라. 따지자면 고작 두 번째 방문인데, 아주 간이고 쓸개고 심장까지 빼 줄 것 같군.”
어디서 또 꺅꺅,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내가 치를 떨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시모어 부인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 말 하시는군, 하고 생각했으나 말을 아꼈다.
내가 오전부터 분개한 이유는 다름 아니고 발칙한 조카 때문이었다.
맥포이의 후계자, 드디어 곧 열두 살이 되는 아치 맥포이 어린이는 노마 디아시와 앙투아네트에게 홀딱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급기야 그들과 노는 것에 눈이 멀어 매일 오전, 고모와의 단란한 티타임에 고모를 바람맞히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바람을 맞았다.
이 제국에 고모와 어울리는 놈은 없다더니, 아치의 빠른 태세 전환에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고모를 버린 조카 녀석을 생각하며 나는 새삼 혈연도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성을 내던 나는, 이번엔 아치 없이 홀로 티타임에 참석한 시모어 부인을 의뭉스럽게 쳐다봤다. 스스로 대형 사고를 쳤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시모어 부인’이 조용하기만 하니 영 찝찝했다.
“부인은 왜 아무 말이 없나.”
“저야―.”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시모어 부인이 운을 뗐다.
도련님의 유모 역에 더해 본성의 안살림까지 도맡고 있는 그녀는, 지난 며칠간 노마에게 직접 맥포이 본성을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잠시 가주님의 예비 부군 노마 디아시를 떠올렸다.
“성혼식은 화려하기보단 의미 있는 것이 좋습니다.”
검소하군.
“그녀의 올곧은 성품에 반했으며―.”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볼 줄 알고.
“예년에 비해 겨울이 추웠으니 내성의 예산 또한 그에 맞추어―.”
지혜롭고.
“맥포이 본성은 그 자체로 제국의 역사를 보는 듯합니다. 특히 정문의 첨탑은―.”
박식하며.
“먼저 오르십시오, 부인.”
우아했다.
무엇보다 시모어 부인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합격을 외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아치 도련님을 아끼고 도련님께서 그를 잘 따른다는 점이었다.
“가신으로서 가주님의 뜻에 따를 뿐이지요. 가주님의 뜻이 맥포이 전체의 뜻 아니겠습니까. 빠르게 새 부군감을 찾아 다행입니다.”
시모어 부인을 이렇게 단시간에 함락하다니…… 노마 디아시는 정말이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에리카야 딱히 호불호를 대놓고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니, 이렇게 되면 이 성에서 노마를 거부하는 건…….
‘도그만 경뿐인가.’
나의 충직한 기사로 말할 것 같으면 티베이 저택 앞에서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다, 내가 노마의 손을 잡고 나오자 진심으로 칼을 뽑으려 들었다. 노마를 그대로 저택에 들일 땐 말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글렌이라도 지조 있어 다행이군.’
부르지도 않은 하녀들이 줄을 지어 응접실에 난입한 것은 그때였다.
“뭐야?”
“무엇이긴요. 촌각을 다투는 일은 끝내셨으니. 이제 성혼식 준비를 시작하셔야지요.”
시모어 부인은 그렇게 말하곤 남은 차를 쭉 들이켰다. 평소 그녀답지 않은 과격한 행동에, 나는 남몰래 동공을 떨었다.
“결혼 준비라는 것이 본래 보통 일이 아니며, 파티를 싫어하는 가주님께는 특히나 고역이겠지요.”
제길.
“사육제 준비도 함께 하셔야 하니, 이제부터 어느 때보다 바쁘실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바쁜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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