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아이사는 이 혼사를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아예 자리를 잡고 긴장, 경계,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저를 뜯어보는 것이 그녀의 새로운 일과였다.
모든 것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갑자기 거리를 좁힌 제 탓이니, 노마는 최대한 무해한 얼굴을 하고 그 시선을 받아 냈다. 섣부르게 마음을 고백한 것치고 일이 너무 잘 풀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운만 좋았을까?
노마 디아시는 그날, 자신이 얼마나 치졸하게 아이사 맥포이를 몰아붙였는지 알고 있다. 그녀가 제게 유독 약하다는 것을 이용했고 일부러 곤란한 선택지만 내세웠다.
그렇게 치사한 방법으로 그녀의 옆자리를 꿰찼다는 것을, 노마는 모르지 않았다.
‘충동적이고, 어리석으며, 음습해.’
긴 잠에서 깨어나 아이사 맥포이를 만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을 깨닫고 난 후론 도통 자기 자신이 낯설기만 하다. 더 정확히는 ‘진짜’ 노마 디아시는 금욕과 절제의 상징이 아니라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를 갈구해. 욕심이 나.’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제 안에서 충동, 어리석음, 음습함이 함께 부피를 키웠다. 그녀를 생각하면 욕심은 끝도 없다.
‘그녀 옆에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위험하지 않나.’
엄격한 교육을 받아 드높은 도덕관념을 지닌 남자로서, 그 감정들은 아주 당혹스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사 옆이 아닌 제 자리는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흑심이 들끓다가도, 그녀를 마주 보면 또 그것만으로 모든 욕심이 사라지곤 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빠르게 만족감이 차올랐다.
충만한 행복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빠르고 쉬운가. 그러니 이건 사랑이 분명했으며, 노마는 사랑은 미친 것과 같다는 그 말뜻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 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제 마음을 믿을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경계만 하시니, 순진무구함을 연기 중인 남자의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생채기가 났다.
그럼에도 노마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건 자신의 충동 탓이다. 그녀의 경계를 푸는 것 또한 온전히 제 몫이란 걸 알았다. 그녀 앞에서 벌써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지만, 더 이상 그런 실수는 없어야 했다.
차근차근. 그녀가 놀라지 않게.
별 가루 같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온 세상을 경계하는 새 신부를 향해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긴장이 되긴 합니다.”
“뭘 또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맥포이 사람들이 예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역시 친절하다. 약한 자에게 약하다. 당신께선 당신이 아주 못되게 굴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어쩔 수 없이 상냥해.
‘몹시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시면서도 당신을 난제에 빠뜨린 나를, 약한 소리를 하는 날 내버려 두지 못하시지.’
“이러니 제가…….”
“예?”
‘자꾸만 욕심을 부리지.’
노마는 직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잠시라도 닿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잠시만,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최대한 가련하게, 반쯤 눈을 내리깔고 그녀에게 속삭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가 미간을 잔뜩 구기고 제 얼굴을 보았다가, 다소곳하게 모여 있는 제 손을 내려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제 손에 닿는 순간 손끝이 움찔거린 것은 맹세코 연기가 아니었으나, 언뜻 보기에 겁에 질려 있는 듯한 그 반응은 적절했던 모양이다.
아이사가 쯧, 작게 혀를 차더니 창밖을 향해 팽 고개를 돌렸다. 창틀에 팔꿈치를 기댄 채 턱을 괸 그녀는 무심한 척 한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준 것 하나에도 기쁨이 넘쳤다. 노마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아이사의 손을 잡으며 슬그머니 그녀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는 즉시 예민한 고양이처럼 절 노려봤으나, ‘너무 멀어서요’라고 모른 척 속삭이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락이었다.
마차 여행을 힘들어하신다더니 아까부터 조금씩 졸던 그녀는 곧 완전히 눈을 감았다.
제 옆에서 곤히 자는 아이사를 보고 있자니 그녀와 저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는 것 같아 기꺼웠다. 제 두 손 안에 있는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좋았다.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신은 여전히 고민이 많으신데 나 혼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노마는 어쩔 수 없이 들뜨는 기분에 마음이 넘쳐 결국 작게 중얼거렸다.
“절 마구 밀어 내시고 절 들인 것을 후회하셔도, 저는 좋습니다.”
“……선택을 일일이 후회하기엔 내가 바빠…….”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지 그녀는 꽤나 신경질적으로 잠꼬대를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오자 노마는 작게 웃었다.
“저는 정말 뭐든 좋습니다.”
손안에 있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을 피난처 삼고자 옆자리를 내어 달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미간이 아주 잠깐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지금은 그것만 알아주셔도 기쁠 겁니다.”
그래,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녀에게 마지막 말이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을 피난처 삼고자 옆자리를 내어 달라 한 것이 아닙니다.”
‘개뿔이. 믿을까 보냐.’
나는 즉시 냉소를 날렸지만 입 밖으로 꺼낸 건 아니었기에 노마에겐 들리지 않았다.
흥, 계속 착각에 빠져 살라지. 그게 당신한테도 좋을 테니까!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악독한 말이나 되뇌고 있을 때, 아까보다 더 멀리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그것만 알아주셔도 기쁠 겁니다.”
간절한 목소리에 전투력이 확 꺾였다. 말을 왜 항상 저딴 식으로, 사람 근질거리게 하는지. 노마 디아시는 사람을 돌아 버리게 하는 재주도 좋았다.
그래도 내가 저 말을 믿을까 보냐. 이 세상이 한낱 소설 나부랭이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낭만 소설처럼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영원히 한 사람만 보고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애초에 낭만 소설도 이야기가 끝난 후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래서 결말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 있을 리가. 영원한 관계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걸.
하물며 당신은 나와 피가 섞인 사이도 아니고 스쳐 가는 사람인 주제에. 착각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지 누가 안담.
옆에 있다 사라지는 것들이 싫다. 어차피 사라질 거라면 처음부터 옆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나았다.
“아이사.”
얼굴을 양 무릎에 파묻고 한껏 자조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사.”
누군가 이름을 불러 댔다. 듣는 것만으로 귓가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보니 또 그놈의 노마 디아시겠군.
“아이사.”
아, 계속 자고 싶은데 왜 자꾸 부른담.
“행복하니?”
그때 생경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첨탑의 종에 머리를 박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끔찍한 감각에 번쩍 눈이 뜨였다.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눈알을 바삐 굴렸다.
“아이사 님?”
정신없이 눈을 굴리다 보니 노마가 보였다. 그는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신 내 이마부터 머리칼을 쓸어 대는 것은 그의 손인 듯했다. 가위에 눌렸다 깬 사람처럼 나는 턱을 덜덜 떨었다.
“방금, 뭐―.”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꿈…….”
내가 꿈을 꿨던가? 왜 이렇게까지 놀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몹시 불쾌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꿈이란 원래 빨리 잊혀지는 것은 맞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기억이 안 날 수 있나. 빠르게 심장이 뛰는 것으로 보아 분명 뭔가 있었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 더 누워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노마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곤 말했다. 우습게도 그새 노마에게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그의 목소리에 안심이 들었다.
“……그런데.”
“네, 아이사 님.”
“내가 왜 당신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있는 걸까…….”
“마차가 흔들려 창틀에 자꾸만 이마를 부딪치셔서요.”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한 노마는 그러면서 이마가 아프시진 않느냐고 자상하게도 물었다.
제길. 나는 뒤통수를 받치고 있는 딱딱한 것이 그의 허벅지라는 사실에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하……. 마차는 왜 멈춰 있을까…….”
“막 본성에 도착했습니다. 곤히 주무셔서 깨우기 어려웠지만 제가 안고 내리는 것보단 직접 내리시는 걸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는 이번에도 상냥히 설명해 주었다. 하나하나 수치스러워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잘하셨습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척하며 그의 허벅지에서 머리를 떼기 위해 들썩였다. 마차 여행에 지친 몸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그것조차 노마의 팔뚝에 의존해야 했다.
애써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나는 눈을 꾹 감고 산산조각 난 내 위엄에 대해 생각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나를 향해 눈을 반짝이고 있는 별 가루를 돌아봤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최대한 믿음직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는 내밀어진 내 손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살며시 내 손을 잡은 그가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아이사 님.”
평소보다 이틀 정도 빠르게 도착한 맥포이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곧 마차 문이 열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장관에 입을 다물었다.
‘저게 뭐람?’
말문이 막힌 채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온 글렌 도그만 경을 돌아봤다. 글렌은 몹시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작게 휘저을 뿐이었다.
“다 튀어나와 있으면 성 안은 누가 돌보고 있고 경비는 누가 서고 있는 거지?”
글렌의 손을 잡고 훌쩍 마차에서 내린 내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부는, 맥포이는 외지인에게 박했다. 분명 그런데.
이런 지조 없는 인간들을 봤나. 나는 매우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죄다 튀어나온 내성 사람들을 바라봤다.
평소 날 맞이하러 나오는 것은 언제나 최소한의 인원이었다. 내가 긴 항해를 갔다 돌아오는 날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개선장군도 이렇게 환영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할 때, 또 여기저기서 감탄사 따위가 터져 나왔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마차에서 내린 노마 디아시가 어스레한 풍경을 밝히고 있었다.
내성의 사람들은 저 인간 별 가루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죄다 튀어나와, 노마 디아시의 등장에 숨을 죽이며 탄성을 지르는 꼴이란. 어쩐지 창피함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맥포이는 참 정이 많고 친절한 것 같습니다. 아이사 님처럼.”
어느새 바짝 다가온 노마 디아시가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곤, 방긋 웃었다. 아까 전 내 경고를 염두하고 한 말이 분명했다.
잽싸게 한쪽 귀를 막은 나는 누구 사람들인지 함락이 더럽게 쉽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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