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그림자처럼 서 있던 아드리네의 시녀 하나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모든 시녀들은 예민한 아드리네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발걸음 소리는 물론 숨소리조차 내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다.
시녀가 다가와 그녀의 귀에 자그맣게 속삭이기 무섭게 그녀의 고운 이마가 대번에 일그러졌다. 조금이라도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을 싫어해 언제부턴가 두텁게 올리기 시작한 분칠에 쩍― 금이 갔다.
자비에가 보내온 선물을 구경하는 데 푹 빠진 빌리넌트는 어머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눈을 내리깐 시녀가 공손한 자세로 아드리네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녀가 우아하지만 조급하게 쪽지를 낚아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최근 온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황제를 알현한다니. 이번엔 특별히 알현실에 미리 사람을 숨겨 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쪽지엔 모든 것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맥포이 가주가 황제를 독대하며 한 말들이 듬성듬성 적혀 있었다.
“야만스러운 서부인 아니랄까 맥포이 가주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맥포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드리네의 입에서 ‘맥포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빌리넌트가 뒤늦게 반응했다. 그는 지난 대회의 때 제 기세에 눌린 자그마한 여자를 생각하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도 모르게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아드리네는 찻잔을 들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그녀가 잠시 황궁에 들렀던 모양입니다. 황태자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그 오만한 계집이 감히 폐하 앞에서 또 불경한 소리를 했습니까?”
그러나 한번 오른 노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빌리넌트는 창백하게 질린 어머니의 표정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위아래 없는 맥포이를 조심하라는 황제의 한탄을 자주 들은 바 있는 그가 인상을 썼다.
“그녀가 여느 때처럼 건방을 떤 것뿐이에요.”
아드리네는 맥포이 가주가 감히, 빌리넌트와 메르케시를 비교하며 황제를 협박한 것에 속으로 분개했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크게 안도했다.
어쨌건 어리석은 황제가 메르케시를 다시 불러들이려 한 일을 맥포이 가주가 막은 것 아닌가?
맥포이 가주는 그동안 황태자 자리를 두고 아무런 의견을 표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혹시나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내심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감히 빌리넌트를 저평가한 것은 불쾌했지만, 황실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결국엔 제 아들을 황제의 후계로 인정한 것과 같았다.
‘하는 짓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걱정이었는데, 역시 그녀도 보수적인 귀족일 뿐이지. 황실이 어지러우면 대귀족 역시 혼란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니.’
아드리네는 안도를 느끼며 애써 분함을 가라앉혔다. 상황에 따라 몸을 바짝 낮추는 법을 아는 그녀는, 대귀족은 찍어 누를 게 아니라 상생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황제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귀족의 힘은 황실을 능가할 때가 있다. 그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고, 맥포이를 이겨 먹으려 들거나 사서 그녀와 틀어질 필요는 없었다.
다만 황후 아드리네는, 제 아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오만한지는 잘 몰랐다. 알았다면 제 손에 구겨진 쪽지를 기어코 펼쳐 읽은 황태자를 붙잡아 맥포이 가주가 한 말의 의도를 해석해 주었을 것이다.
성년을 앞둔 빌리넌트는 생김새만 조숙했다. 그는 제 외관 때문에도 자신이 다 컸다고 착각하곤 했다. 자연히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결정한 것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황태자 빌리넌트는 쪽지를 펼쳐 봤고, 어머니의 한숨을 들으며, 생각을 했다.
‘맥포이 가주 계집은 역시 오만하고 위험해.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야.’
빌리넌트의 가련한 머리통은 앞뒤가 잘린 대화 내용 일부만 보고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되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감히 그 미친년을, 쫓겨난 계집애 따위를 들먹여? 귀족 따위가 황제 자리에 누굴 앉힐지 간을 보고 있단 말 아닌가?’
빌리넌트가 보기에 맥포이 가주는 불경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위대한 로덴시 황가를 집어삼켜 제멋대로 제국을 주무르려는 것이 분명하다!’
분명 아드리네와 같은 쪽지를 읽었음에도 그가 낸 결론은 이번에도 끔찍이 멍청했다.
* * *
ㅎㅂㄹㄱ
황도에서 맥포이까지는 보름 정도 쉼 없이 달려야 했다. 마차 이동은 끔찍하지만, 특별히 제작된 내 마차는 누워도 될 만큼 널따랗고 푹신해 그나마 이동할 맛이 났다.
또 노마 디아시가 운이 좋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와 이동하는 내내 비는커녕 말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보다 빨리 지치는 일도 없었다.
보통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하나라도 터지기 마련인데 무섭도록 평화로웠다. 이대로라면 황도에서 맥포이 본성까지 어렵지 않게 최단 시간을 찍을 것이다. 마치 노마 디아시가 맥포이에 가는 길을 온 세상이 터 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긴 마차 여행은 여전히 내겐 고역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해 나는 아예 모로 누워 맞은편에 앉은 노마 디아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순하고, 다정하고, 잘 웃는 그. 확실히 그는 흔히 알려진, 혹은 내가 보아 온 여느 ‘디아시’들과는 달랐다.
‘그래도 그렇지. 괴랄하기 짝이 없는 그 디아시를 부군으로 내 성에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코앞에서 번쩍이고 있었지만 새삼 믿기지 않았다. 일단 사람이 저렇게 생긴 것도 그렇고, 탄타로스에서 처음 마주쳤을 땐 그와 이리 엮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노마 디아시가 내 마차를 타고 내 성에 가고 있다고? 그와 얼마 후에 결혼을 한다고?’
참 나. 저런 얼굴을 하고 사람과 결혼할 생각을 하다니. 저런 얼굴을 하고 어쩌다가, 하필이면 날 사랑한다고 착각을 하는지. 나는 또다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 마차에 함께 오른 노마는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특수 제작한 내 검은 마차가 나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말부터 시작해, 오늘의 기분까지. 소곤소곤, 그는 뺨을 간지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보통 단답으로 답했다. 그를 앞에 두면 좀처럼 길게 생각을 할 수 없었던 탓에 그랬다. 나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그는 뭐가 좋은지 수줍게 웃기나 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이러고 있자니 어쩐지 참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황제 앞에선 내 부군이 되려면 노마 디아시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큰소리치긴 했다만,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티베이의 가면무도회가 끝나고 ‘맥포이 가주와 노마 디아시 경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황도 전체에 퍼졌다. 물론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흔한 추문이 아니었다. 에리카가 손수 친 양념에 의해 ‘세기의 사랑’으로 포장되었다.
이제는 제국 구석 끝까지 퍼지기 시작한 흥미진진한 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악의 소굴에서 서로에게 목숨을 빚진 두 남녀. 서로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지만, 여자에겐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으니!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곧 여자의 약혼자가 그녀를 끔찍하게 배신해 그녀는 커다란 충격에 빠지고, 그녀의 명예를 위해 나선 남자의 용기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처음엔 에리카가 개막을 앞둔 흔해 빠진 기사도 낭만극의 줄거리를 읊은 줄 알았다.
그게 나와 노마의 결혼을 날치기로 발표하기 위한 장대한 밑밥 작업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구르며 웃었다.
약혼자가 악당이고, 남자 주인공은 성기사라니. 뭇 제국 여성들의 공감과 흥미를 얻을 이야기 아닌가.
역시나 이 재미난 소문 혹은 소식은 달리는 말보다 몇 배는 빠르게 온 제국으로 퍼져 나갔다.
별의별 소문을 달고 산 나지만 이런 낯간지러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맥포이 가주가, 아이사 맥포이가 세기의 사랑으로 기록될 결혼을 하게 되다니.
‘그것도 눈앞의 저 별 가루 같은 인간과 말이야.’
탄타로스 때 일부터 오늘까지. 지난날을 곱씹을수록, 눈앞에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칠수록 모든 게 기묘하게 느껴졌다. 모르는 사이에 사술에 당했나 싶을 정도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결혼 문제를 이따위로 결정하게 될 줄은 몰랐지. 정말 뭐가 문제지?’
노마의 얼굴을 본다고 답이 나올 거 같진 않았지만, 나는 마차에서 대부분 시간을 그의 얼굴을 뜯어보는 데에 썼다. 전투적인 눈빛과 다르게 피로감에 찌든 몸은 여전히 시트에 늘어진 채였다.
“아이사 님. 피곤하시면 역시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뜨거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빤히 마주 보던 노마가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아니요.”
이번에도 답을 찾는 데 실패한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본성까지 반나절 채 남지 않았으리라.
“곧 본성이니.”
노마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손을 잡고 티베이 저택을 나선 순간, 어차피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러고 그와 결혼하지 않으면 끔찍한 불명예의 주인공은 순식간에 모퍽이 아니라 맥포이와 디아시로 바뀌겠지.
‘어쩌면 휴게실에 그를 들였을 때 이미 돌이키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를 내 침실 테라스에 들였을 때. 그것도 아니면……. 나는 끝없이 펼쳐진 물속에서 그를 건져 냈을 때를 생각하며 조금 인상을 썼다.
어쨌건 나는 그와, 그는 나와 결혼할 수밖에 없다. 그는 다가오는 봄의 끝에 내 부군이 될 것이고 나는 그의 부인이 될 것이다.
날 보고 느낀 안도감이나 고마움, 동질감 따위가 실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언제쯤 깨달을까.
이르면 오늘이라도 깨달을지도 몰랐다. 성혼식 날, 주례 신관 앞에 나란히 섰을 때 불현듯 깨달을지도 모르지.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작게 고개를 털어 냈다.
어떻게 하긴. 대귀족이 쉽게 이혼할 수 있을 리가.
‘그러니 당신은 나와 결혼할 수밖에 없다. 내가 돌이키기엔 늦은 것처럼 당신 역시 늦었다.’
“맥포이는 외부인에게 박합니다.”
서부의 마녀가 악독한 생각을 하며 가련한 새신랑에게 무심하게 조언을 던졌다.
서부인은 동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10년 전의 참사 때문에 외부인을 꺼려 했다. 동부 출신의 가주 부군이 자리 잡기까지는 아마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이해합니다. 제 걱정은 마세요.”
딱히 당신 걱정을 한 것이 아니라고 딱딱하게 받아치려다 멈칫했다. 나는 그를 걱정하고 있나? 이제는 이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한편 고민이 많아 보이는 새 신부를 두고 새신랑은 부드럽게 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내 마음을 믿지 못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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