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71화 (71/139)

71.

솔직히 마지막은 홧김이었다.

지를 땐 속이 시원했지만, 막상 알현실을 나오자 후회가 들었다. 황제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니, 그런데 저 날파리 같은 황제가 먼저―!’

후회와 합리화를 반복하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황도의 맥포이 저택에 도착했다.

“맥포이 가주.”

이젠 제법 익숙해진 노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릴 때, 한발 먼저 도착한 밀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들을 잘 부탁하오.”

그가 내게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도 벌써 두 번째였다. 뻣뻣하게 있을 수만은 없어 일단 마주 고개를 숙이고 봤다.

“본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맥포이에 청혼서를 보내겠소.”

아무래도 노마가 맥포이가 되는 것이니 내 쪽에서 청혼서를 보내는 게 맞지 않나. 부러 천천히 청혼서를 보낼 생각이었던 나는 내심 당황했다.

“……귀한 아드님을 이렇게 간단히 제게 주셔도 되겠습니까.”

“간단히 내어 주지 않았소. 그저―.”

밀란 디아시는, 불량한 말투로 황제를 협박하던 맥포이 가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제 슬픔에 빠져 살다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컸다. 특히나 십수 년 만에 다시 만난 첫째 아들 노마는 소중한 동시에 걱정거리였다.

살아 돌아온 아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면 했다. 되도록 언제나 행복했으면 했다.

그러니 노마가 갑자기 저속한 파티에 간 것도 모자라, 맥포이 저택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밀란은 필시 노마가 또다시 어떤 음모에 휘말렸겠거니 판단하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답지 않게 허겁지겁 황도의 맥포이 저택으로 가는 길에 이미 황도 바깥으로 퍼진 두 사람의 세기의 사랑 이야기가 밀란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는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급하게 맥포이 저택 문을 두드려 일단 제 아들이 폐를 끼친 맥포이 가주에게 허리를 숙이면서, 그는 제국에 전해 내려오는 도덕경을 읊으며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드디어 마주한 아들의 입에선 벼락이 떨어졌다.

“입을 맞추었다니. 설마, 맥포이 가주에게 입술을 빼앗긴 것이냐?”

“아닙니다, 아버지.”

밀란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들은 산뜻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네가 그녀에게 손을 댄 것이냐?”

그렇다면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아들을 혹독한 겨울 산에 유폐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디아시의 가칙이란 매우 극단적이었다.

“제가 허락을 구했고, 받아 주셨습니다.”

아들은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며 입술을 매만졌다. 밀란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가칙을 어기고 퇴폐적인 곳에 발을 들인 것은 사실이니, 어떤 벌도 받겠습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또한 디아시는 오직 반려와만 입을 맞추어야 하니, 그녀가 저를 선택해 주시면 가칙에 따라 그녀와 성혼을 맺어야겠지요.”

노마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 충만한 웃음에 밀란은 순간 디아시의 피에 새겨진 특유의 맹목적인 사랑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 감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사랑을 잃고 모든 걸 놓아 버린 바 있었다. 그렇다면 경험상 노마는 설득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설득이 가능한 상태였다면 애초에 입을 맞추지도 않았겠지. 귀네스, 우리 아들을 어쩌면 좋소…….’

밀란은 깊이 침음했다. 여태 디아시의 가르침을 벗어난 적 없던 큰아들의 비행은 아주 아찔한 것이었다. 가칙을 이용해 결혼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로 만들어 놓고, 그저 상대가 제 마음을 받아 주길 기다리겠다니. 아비로선 답답할 뿐이었다.

“맥포이 가주가 끝내 너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평생을 혼자 살겠다는 말이냐.”

“그녀는 친절하고 마음이 약하시어 절 그저 내버려 두지 못하실 겁니다. 저를 이 저택에 들이신 것도 같은 이유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치사한 겁니다, 아버지.”

친절하고 마음이 약하다니.

밀란이 아는 아이사 맥포이는 성정이 잔인하며 냉정한 사람이었다. 오직 가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그녀가 노마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받아 줄까?

“그녀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입맞춤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맥포이 가주 옆에 있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의 순진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성혼에 적극적이지 않은 맥포이 가주의 모습을 봤을 때는, 몇 년 만에 초조함을 느꼈다.

그러나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노마를 제 사람이라 외치는 맥포이 가주의 박력에 모든 불안감은 한 번에 날아갔다.

‘저이구나.’

손끝에서 시작되는 얕은 전율에 오랜만에 가슴이 빠르게 뛸 정도였다.

‘왜 진작 맥포이 가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밀란은 노마가 가끔 허공을 보고,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노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초조한 눈으로 아들을 좇던 밀란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위태롭다. 제 아들은 당장이라도 다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한 발만 걸치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된 듯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붕 떠 있었다.

밀란은 노마를 두 번 잃을 수는 없었다.

‘맥포이 가주 옆이라면 노마가 죽지 않겠다.’

돌이켜 보면 노마는 맥포이 가주를 볼 때는 온전히 이 세상에 있었다.

아이사 맥포이는 누구보다 기개가 있고 자기 사람을 아끼니, 마음을 다친 노마를 잘 지탱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그녀에게 무거운 일을 떠맡긴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밀란은, 제 자식이 중요했다.

“이 늙은이 대신 황제 폐하 앞에서 그리 말해 주어 고맙소.”

노마를 바라보는 황제의 뭐 같은 눈빛에 화가 났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다시 한번 부족한 아들을 잘 부탁하오.”

그렇게 말하며 밀란 디아시는 웃었다. 그 모습에 순간 대답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나는 밀란의 웃는 얼굴을 처음 봤다. 설핏 웃는 정도였지만 그 파괴력은 대단했다.

디아시 형제의 아름다움은 작고하신 선대 디아시 가주 부인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디아시가 어떤 가문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종들이 태어나는 곳 아닌가. 밀란 디아시는 그 자체로 완벽한 미남자였다.

‘닮았잖아.’

웃는 모습만큼은 노마 디아시와 너무 똑같아서, 예법을 말아 먹은 행동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노마를 제외하고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두가 완연한 중년이라곤 믿기지 않는 밀란의 짧은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통에 나는 청혼서고 성혼식이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신중하게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사육제와 함께 결혼을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몹시 바쁠 것이오.”

밀란은 그새 빠르게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정말 사육제쯤에 성혼식을 치르는 모습을 볼 작정인 듯했다.

“또한 서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노마는 당장 맥포이 가주와 함께 맥포이 영지로 가는 게 좋겠소.”

밀란은 노마를 내 앞에 떠밀며 덧붙였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넘어오는 노마의 손을 잡아 주었다. 지극히 귀족적 매너를 행한 것뿐이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디아시가 단체로 미쳤나?’

별안간 나타나 소중한 첫째 아들을 채 간 날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성혼을 밀어붙이는 게 괜히 찝찝했다.

에리카가 슬그머니 다가와 귀에 대고 혹시 그 짧은 시간에 입술 말고 다른 것도 뺏으셨냐고 물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입술도 ‘빼앗은’ 건 아니었다.

밀란이 맥포이 저택을 떠나기 전, 부자는 꽤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 봤다. 아름다운 남자 둘이 석양을 배경으로 마주 본 모습은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지만, 유난이 분명했다.

‘하여튼 이상한 인간들이야.’

그걸 지켜보던 나는 괴상한 디아시식 인사에 디아시끼리는 독심술이 가능한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들을 보던 밀란은 마지막으로 노마의 어깨에 손을 얹곤 잘했다, 한마디를 남기고 맥포이 저택을 떠났다. 도대체 뜬금없이 뭘 칭찬하는 것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모퍽가는 노마 디아시가 보낸 도전장을 반려했다.

‘목숨을 건 결투’라는 세기의 이벤트를 직관할 기대에 부풀었던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모퍽을 비난했다. 금세기 최고의 치욕을 당한 모퍽은 삼대가 바뀔 때까지 황도에 발걸음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겨울이 끝나 갔다.

맹약 건과는 별개로 필립 모퍽이 약혼녀에 대한 불미스러운 거짓 추문을 퍼뜨리고 그 내연녀의 존재가 공개적으로 밝혀진 것이 문제가 되어, 나와 필립의 약혼은 자연히 파기되었다.

그날, 홀로 된 맥포이 가주가 유유히 영지로 떠났다. 따지자면 완전히 홀로는 아니었다. 그녀의 옆엔 새로운 예비 부군이 함께였다.

대신전에서 날아온 파혼 허가문이 마차 창밖으로 던져졌다. 잔뜩 구겨진 종이는 한동안 공중을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 * *

달걀흰자보다 매끈한 하얀 대리석과 황금으로만 이루어진 황후궁은 그 자체로 제국의 보물로,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이었다.

황후궁의 주인은 아드리네였다. 남부 대귀족 모르고트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첫 번째 황후 사후에 황후가 되었다.

남부 대귀족 가문 출신의 아가씨를 간택한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이었지만 황제는 곧 어리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그녀를 아꼈다.

아드리네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아들, 빌리넌트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또렷한 에메랄드색 눈동자, 굽이치는 풍성한 백금발을 자랑하는 그녀는 나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젊어 보였다.

아드리네는 하루 중 오전, 황후궁 응접실에서 아들과 보내는 티타임을 가장 좋아했다. 빌리넌트는 북부의 명문가, 자비에 가문이 보낸 보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황태자.”

“자비에는 검만 들 줄 아는 무식한 자들인 줄 알았는데, 보는 눈이 있군요.”

“자비에 가문은 혈통, 재력, 군사력. 무엇 하나 딱히 부족한 것이 없지요. 분명 큰 힘이 될 겁니다.”

물론 자비에보단 노턴이 나은데 말이야, 라는 생각을 하며 아드리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요즘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았다. 돌아오는 여름에 황태자가 드디어 성년이 되기 때문이다.

북부의 부자는 누가 뭐래도 노턴이었다. 긴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 무예의 명가보단 적당한 혈통과 막대한 재력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노턴에겐 딸이 없었다. 그녀는 욕심을 누르고 자비에의 장녀를 빌리넌트의 짝으로 선택했다.

‘노턴은 동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으니, 노턴만 내 편에 서면 망아지 같은 맥포이를 길들일 수가 나올 텐데. 어떻게 그들을 포섭할까…….’

세상에서 가장 맑고 투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드리네는 실은 전혀 순진하지 않았다. 자애로운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눈치와 계산이 빠르고 영악했다. 특히 상대를 봐 가며 유들거리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앞에서 그녀.

작고한 아버지 모르고트 선대 가주 앞에서 그녀.

욕심 많은 오라비 모르고트 가주 앞에서 그녀.

아끼는 시녀 앞에서 그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아들, 빌리넌트 앞에서 그녀가 모두 달랐다.

황제는 아드리네 황후를 아주 순진하고, 여리며, 세상 물정 모르는 귀부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 바로 옆에 황후가 심어 놓은 첩자가 여러 명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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