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허!”
내게 신앙심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황제는 내 가식을 대놓고 비웃었다.
“탄타로스의 일부터 시작해 모퍽 소가주의 추잡한 음모까지, 전부 이것을 위한 신의 뜻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모든 시련이 신의 뜻이었다 생각하니 이겨 낸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의 뜻에 순종하는 갸륵한 여인을 흉내 냈다.
“마침 두 사람 이야기로 온 제국이 시끄러운 이런 때에 신탁이 내리다니.”
이런 괘씸한 짓거리는 디아시의 머리에서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황제의 분노 어린 시선이 내게 꽂혔다.
“마치 누군가 꾸며 낸 것 같지 않소? 맥포이 가주.”
황제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신탁을 조작했던 일을 그대로 흉내 낸 발칙한 짓거리에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직구에 가까운 비꼬기는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신의 뜻을 한낱 인간이 어찌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전 그저 따를 뿐입니다.”
나는 지금만큼은 음모의 ‘ㅇ’ 자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직구를 날려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 척하면 되었다.
그게 또 황제의 속을 긁는 데 효과적이었는지, 그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동안 말없이 황제가 나를 노려봤고 나는 이쯤에서 얌전히 머리를 조아려 주었다.
“이번 신탁엔 더 깊은 뜻이 있을 것 같군.”
돈 쓴 건 난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했다.
“신탁이란 원래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신의 사랑을 받는 로덴시로서, 짐이 생각하길 이번 신탁은 조금 더 해석할 필요가 있겠소.”
되도 않는 시간 끌기에 답답한 마음이 들어 슬쩍 고개를 들고 황제를 보았다. 때마침 황제가 욕심이 가득 찬 눈으로 노마 디아시를 훑어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마 디아시를 끔찍이 미워하면서 그를 탐내는 시선은, 아주 역겨웠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당장 저 단상에 올라가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을 것이다.
더 이상 시간 낭비뿐인 대화를 참아 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폐하. 신하 된 입장에서 오랜만에 충언 하나 올리겠습니다.”
“되었소. 차라리 상소로 올리시오.”
내가 꽤나 되바라진 눈을 하고 말했고, 그 눈빛이 뭔지 아는 황제는 벌써 기분이 잡친다는 듯이 더 듣지 않겠다며 손을 휘저었다.
“잠시 모두 물려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제가 말주변이 없어 감히 날것의 충언을 올릴 것인데, 아무래도 독대가 좋지 않겠습니까? 저야 듣는 귀가 있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발칙한 말투에 황제가 언성을 높이려 했으나, 내가 더 빨랐다.
“꼭, 들으셔야 합니다.”
“…….”
꼭 들으셔야 한다. 이는 나와 황제 사이에 통하는 암호 같은 것이었다. 맥포이만 아는 정보를 ‘특별히’ 흘려 드리겠다는 신호였고, 수차례 학습이 된 황제는 이 신호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욕심 많은 황제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곧 그가 모두 나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흥, 어리석은 놈. 나는 간단히 걸려든 황제를 향해 투지를 활활 불태웠다.
밀란을 따라 나가려던 노마가 퍽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내 손을 잡을 듯 말듯 망설였다. 그에게 입 모양으로 걱정 말라 하자 그가 나만 보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하여간 한 번 말한 건 잘 들었다.
동시에 저 무해한 인간을 감히 추잡한 눈으로 본 황제에게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제국과 로덴시 황가를 수호하는 맥포이의 가주로서 가장 고귀한 분께 올리는 충언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길.”
직역하자면, 딱히 한 일 없이 자리 보존하고 있는 너와 다르게 제국의 한 축을 갈고닦은 내가 하는 말이니 아니꼬와도 쳐 들어라, 이 말이었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기분 나쁨을 느꼈다.
“2황녀를 불러들이셔도 아무런 재미를 보지 못하실 겁니다.”
“……뭐라?”
“위대하신 폐하께선 황후의 간청에 메르케시 황녀를 모자라고 미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황녀가 개미 오줌만 한 왕국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만 계셨습니다.”
“맥포이 가주, 지금 무슨 소리를―.”
“폐하. 제가 모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닌 척하실 것 없습니다.”
상상력 없는 황제가 머리를 굴려 봤자였다. 나와 노마 디아시의 결혼을 불허하고, 십수 년 전 노마와 칼리페시가 결혼한다는 신탁을 재해석해 그를 메르케시와 결혼시키려 들 게 뻔했다.
‘어딜 감히. 노마 디아시는 이미 나와 입을 맞추었다, 이거다.’
어느새 디아시의 괴랄한 가칙에 전염된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황녀가 후계자가 될 수 없도록, 폐하께서 그녀가 모자라고 미쳤다는 말을 퍼뜨리신 것은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요.”
“닥치라 했소.”
흥, 언제?
“2황녀는 그 사실을 압니다. 제가 2황녀라면…… 감히 폐하를 아주 많이 원망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선 어떠십니까?”
황제는 일그러진 얼굴로 씩씩거릴 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메르케시의 생각이나 기분 따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안온함에 익숙해져 원망도 분노도 잊은 그녀를 또다시 멋대로 쥐고 흔드시면, 아무리 잘 참는 메르케시 황녀라도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지도 모르죠.”
메르케시는 빌리넌트와 달리 똑똑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결정적으로 권력에 큰 뜻이 없었다. 그녀는 자유를 사랑했고 그저 황위에 앉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얌전히 황궁을 나가 준 것이다.
‘이 머저리 같으니라고. 그녀는 당신이나 황후, 황태자가 무서워 나간 것이 아니란 말이다.’
탈 많은 로덴시 황가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고르자면 나는 무조건 메르케시 로덴시를 뽑았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 있는 그녀를 다시 황궁으로 부르신다……. 제가 그녀라면, 감히 위대한 황제 폐하께 원망을 쏟을 수 없으니 아직 어린 동생에게 화풀이를 해 버릴 것 같네요.”
“더 들어 줄 수 없군.”
“황후께서 메르케시 황녀를 두려워하신 건 지금의 황태자께서 아직 어리기 때문만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메르케시와 빌리넌트 중 누가 더 황제에 적합한지 묻는다면.
“황녀가 사실은 모자라지도 미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황제의 재목이라 그러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메르케시 로덴시 황녀는 당신께서 사랑한 자식이 아니었을 뿐.”
백이면 백, 메르케시라고 대답할 거다.
“그녀는 유능합니다.”
지금 황태자 자리에 계신 그분보다요, 라는 뒷말은 감추었으나 뜻하는 바를 알아챈 황제는 치욕스럽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답지 않게 돌려 말하는 것은 그만두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저 역시 황가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결백의 의미로 가슴 중앙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말해 보았지만, 황제는 개수작 말라는 표정을 할 뿐이었다. 이쪽은 진심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읽은’ 메르케시 로덴시는 흔히 알려진 성격과 딴판이다. 나 역시 모자라고 미쳤다는 그 황녀가 겁 많고 유약한 성품을 가졌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실은 로덴시답게 괴팍하며 대단한 또라이였다.
만약 메르케시에게 인내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칼리페시보다 유명했을 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멍청한 빌리넌트쯤은 손쉽게 이겨 먹을 것이다.
솔직히 대귀족 입장에선 그녀가 황제가 되는 것보다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는 빌리넌트가 나았다.
“황녀가 순순히 황태자의 지지 기반이 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저 하나 골탕 먹이시려고 불씨를 들이지 마시라는 겁니다.”
나 좀 엿 먹이겠다고 집을 통째로 태워 먹지 말라, 이 말이다.
“이번 대회의에서 보니, 황태자께선 확실히 아직 군주로 보이진 않더군요. 적어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겁니다.”
“…….”
“메르케시 황녀를 부르지 마십시오. 그녀가 처음 맛보는 자유에 분노와 원망을 잊은 건 폐하께 좋은 일입니다.”
“…….”
“노마 디아시와 로덴시의 인연은 십수 년 전에 끝났다고 여기시는 게 현명하십니다.”
“……백번 양보해 자네 말이 옳다고 해.”
“양보를 하지 않으셔도 대체로 옳은 줄 압니다.”
“후……. 제발 그 입 좀……. 한 마디만 좀…….”
황좌에 기대앉아 머리를 싸맨 황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과하다. 본 것 중 가장 과해. 자네도 그렇게 느낄 것이오.”
이번엔 내가 침묵했다.
“왜 갑자기 결혼에 욕심을 부리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나.”
“그저…….”
날 엿 먹일 생각에 취해 황위 다툼을 일으킬 뻔한 게 더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맥포이 가주인데, 부군이 노마 디아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생각해 낸 이유치곤 나조차 납득 가는 말이었다.
“허―.”
황제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를 정말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래서 티베이 저택에서 그 미친 짓을 벌인 거고?”
‘말이 왜 그렇게 된단 말인가?’
황제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드디어 내 미간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다행히 황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눈에 밟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동질감 따위였다. 귀족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그저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울리는 자라 그렇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가슴 한편이 불안하게 뛰었다. 화제를 빨리 바꾸고 싶었다.
“서부와 동부가 동맹이라도 맺을 것을 염려하신다면, 그 역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속내를 들키다 못해 탈탈 털린 황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노마 디아시가 어여뻐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어떻게 니콜라스 디아시까지 어여쁘게 여기겠습니까. 디아시 가주와 제가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나는 끝으로 세상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황제가 징글징글하다는 눈으로 그런 날 쳐다봤다.
“대신전의 해석을 인정하겠소. 맥포이 가주와 노마 디아시 경은 신탁에 따르시오.”
밀란 디아시는 넌더리가 나다 못해 기가 팍 죽은 얼굴을 한 황제를 보다 맥포이 가주를 슬쩍 돌아봤다.
“맥포이 가주가 고귀한 분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룬 맥포이 가주는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가련한 척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만 꺼지라는 듯이 도리질을 치며 손을 휘저었다.
“노마 디아시는 맥포이가 될 겁니다. 또한 저는 맥포이 이름을 가진 자를 목숨처럼 아낍니다.”
그러나 맥포이 가주가 아직 안 끝났다는 듯이, 감히 황제 앞에서 협박에 가까운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맥포이의 이름을 가진 자를 모욕한다면 그게 누구든 반드시 응징하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명예이고, 이 혼사를 허락하신 폐하의 존엄한 명예를 지키는 일인 줄 압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앞으로 노마 디아시를 보고 침 흘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결코 돌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켜봐 주십시오.”
건드리기만 해 봐라.
시종일관 협박을 일삼는 맥포이의 말본새는 디아시로선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낯설었다. 누가 봐도 여기서 가장 악당 같은 그녀를 바라보는 금안 두 쌍은, 그럼에도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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