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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69화 (69/139)

69.

밀란 디아시는 겉보기엔 평소와 같았다. 그가 평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밀란이 몹시 착잡한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해 당당히 그를 마주할 수 없었다.

동시에 조금 억울했다. 노마 디아시와 진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면 모를까, 그와 입만 몇 번 맞춘 게 다란 말이다.

요즘 세상에 입맞춤은, 성년도 안 된 귀족들도 무도회에 나갔다 하면 몰래 하고 그러는 것인데. 내 나이가 몇인데 고작 입맞춤 조금 했다고 속도위반으로 허겁지겁 결혼하는 귀족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이게 정말 사실인가 싶었다.

그러나 억울한 소리는커녕 찍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쨌건 디아시의 기준으로 곱게 키운 그의 아들을 하룻밤 사이에 채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밀란 공이 무슨 말을 해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했는데.

“맥포이 가주에게 무엇으로 이 죄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부디 내 아들의 부덕함을 용서하지 마시오.”

밀란 공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그가 대뜸 숙이고 들어오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고, 그는 노마와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부자 사이에 깊은 대화가 필요하겠지, 암.’

나는 냉큼 내 옆에 서 있던 노마를 밀란 앞에 내놓았다. 노마가 말했던 것처럼 밀란 공은 정말 그에게 벌이라도 주려고 들이닥친 모양이다. 아치를 두고 상상하니 나라도 우리 애부터 찾아 혼냈을 같긴 했다.

상상해 보라.

갑자기 우리 애가 나 몰래 난잡한 무도회에 간 것도 모자라, 아무 가문 아가씨 손을 잡고 무도회를 빠져나와 그 아가씨 집에 갔다고 생각하면.

심지어 그 집에서 장장 일주일 넘게 죽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벌은 무슨. 노마가 아치였으면, 세상이 끝났을 거다.’

그러니 잘 혼나고 와라, 노마 디아시!

그렇게 나는 그날 더 이상 노마 디아시를 볼 수 없었다.

노마가 저택에 머물고 바뀐 게 있다면, 아침 식사를 잘 하지 않는 내가 그를 따라 꼬박꼬박 아침을 챙기게 됐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가 지난번 맥포이 본성에 머물렀을 때처럼.

밀란이 들이닥친 뒤 노마를 볼 수 없었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며칠 붙어 있었다고 새삼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화사한 그는, 여태 내가 본 것 중 가장 푸석했다. 그가 날 보며 반사적으로 햇살 같은 웃음을 지었지만 푸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탄타로스에서도 빛나던 얼굴이……. 과연 대단하군, 밀란 디아시.’

밀란은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표정이나 기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3인의 식사는 체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었다. 그간 노마가 하도 식사하면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서 잊고 있었다. 디아시는 식사할 때 절대 떠들지 않는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것을.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나지 않는 침묵을 견디며 과일즙이나 연신 들이킬 때였다.

“식은 언제쯤 치를 생각이오.”

“풉―.”

밀란 디아시가 무려 식사 중에 말을 했고, 방심하고 있던 나는 마시던 즙을 그대로 뿜었다. 하필이면 간만에 밝은색 드레스를 골라잡은 날이었다. 뿜어져 나온 과일즙이 가슴팍에 불그죽죽한 지도를 그렸다.

밀란은 그 꼴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앞뒤 다 자르고 용건만 말하는 것이 니콜라스 디아시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노마는 어디서 주워 온 건가?

“봄이 지나고 사육제 즈음이 어떻소.”

밀란은 사레들린 나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뒤 본인이 소망하는 날짜를 덧붙였다.

‘너무 빠르지 않나? 우리가 진짜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귀족의 결혼이란 열여섯, 열입곱 즈음 후보를 물색하고 열여덟에 성년이 되면 약혼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스물이 되었을 때 보통 결혼한다.

약혼은 괜히 하는 게 아니었다. 서두르지 않는 편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 첫째이고, 실제로 결혼 준비에만 2년을 쏟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이때 결혼 준비엔 신랑과 신부의 교육이 포함되기도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봄이 지나야 할 겁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시간을 두는 쪽이 좋겠습니다.”

모퍽의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두 사람은 도주 가능성 때문에 신전 감옥에 곧장 수감되었는데, 패트라가 아이를 낳아야 판결이 나왔다.

즉, 당장 결혼하고 싶어도 봄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두 사람은 당장 결혼을 해도 지나침이 없소.”

물론 노마 디아시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귀엔 충분히 극단적이며 지나치게 들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류로만 존재하는 부군을 생각했지, 내 인생에서 결혼을 이렇게 진지하게 다룰 줄은 상상도 못 했단 말이다. 게다가 진지하게 결혼을 계획하는 것이 어쩐지 민망하기까지 했다.

“황제 폐하의 허가를 받는 것도 문제이니…….”

괜히 머쓱한 기분에 핑곗거리처럼 황제의 허가를 말하던 중,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기로 유명한 밀란의 얼굴이 매섭게 굳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 불허하셨소?”

밀란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음산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그러실 겁니다.”

“두 사람은 마땅히 부부가 되어야 하거늘…….”

내 대답에 밀란이 한층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런 그를 쳐다봤다. 화가 난 시모어 부인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큰 위협을 느꼈다.

“내 직접 황제 폐하를 알현하겠소.”

“디아시 공,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밀란이 당장 박차고 나갈 것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황제 폐하께선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황제가 불허할 것이야 예상하고 있었고, 이미 손을 써두었다.

문제는 신전과 관련된 이 불법 행위를, 눈앞에 있는 이 무시무시한 예법 지킴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단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신탁 조작’을 듣기 좋게 포장할 수 있을까?

“아버지.”

내가 머뭇대는 사이 노마가 입을 열었다.

“신탁이 내릴 겁니다.”

노마의 설명은 짧고 굵었다. 너무 생략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에 다급히 밀란의 반응을 살폈다.

담담한 아들의 목소리에 밀란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화가 난 밀란 디아시의 목소리에 이어 일그러진 얼굴을 한 밀란 디아시라니. 나는 숨을 죽였다.

밀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하무인이었던 황태녀가 노마 디아시를 탐내 신탁을 조작했던 일은 디아시에게 엄청난 치욕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디아시는 복수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용서와 관용을 교육했다. 특히나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 주는 것은 귀족의 방식이 아니기도 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

잠시 죽음 같은 침묵이 흐르고, 밀란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밀란 디아시가 신탁 조작을 넘어가다니. 그의 분노는 생각보다 오래되고 뿌리가 깊은 듯했다.

3일 후, 성지 바그다트에 무려 14년 만에 신탁이 내렸다. 신탁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노마 디아시였다. 대신관과 고위 신관이 모여 신탁을 해석했고 그 내용은 가장 먼저 황제에게 보내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 황제의 시종이 맥포이 저택에 방문했다. 그가 황제의 명을 읊었다.

“맥포이 가주와 디아시 가주 대리, 그리고 노마 디아시 경은 당장 입궁하라.”

* * *

알현실의 문이 열리기 전, 나는 노마를 힐끔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습관처럼 눈웃음을 쳤다.

‘뭐가 좋다고 웃는지. 우린 지금 엄청난 전투를 앞두고 있는 거라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오늘따라 더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저 별 가루 같은 남자를 탐욕스러운 황제의 눈앞에 보일 생각을 하자 암담했다.

괜한 노파심이 들어 결국 그에게 속사포로 귓속말을 했다.

“대부분 내가 답할 것이니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그저 내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됩니다.”

“네, 아이사 님.”

그가 마찬가지로 귓속말로 대답했다. 그걸론 부족해 나는 한 가지 더 당부했다.

“황제 폐하께 절대로 웃어 주지 말고.”

최근 노마는 너무 자주 웃었고, 그의 웃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욕심 많은 황제가 더러운 눈으로 그를 보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네,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로 웃지 않겠습니다.”

노마가 멋대로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소곤거렸다.

나는 그가 가끔 아주 극단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어허. 그나저나 웃지 말래도.’

노마 디아시가 마냥 순진해 빠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하고 해맑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를 향해 둥글게 휜 눈꼬리가 마냥 반갑지 않아 다시 한번 그에게 주의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밀란 공이 황제의 알현실 앞에서 떠드는 나와 노마에게 주의를 주는 것으로 대화가 끊겼다.

곧,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비뚜름하게 황좌에 기대앉은 황제는 한때 자신의 사위였던 남자를 바라봤다.

‘정말로 살아 돌아왔군.’

노마 디아시는 십수 년 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 당시의 기억이 둑 터지듯이 밀려들었다.

칼리페시가 노마와 약혼을 원했던 일부터 시작해서 처참하게 죽었던 것까지, 오랜만에 아주 선명히 떠올랐다. 황제는 간만에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다 저놈 때문이 아닌가. 내 딸이 그런 삿된 일에 얽혀 든 것도.’

칼리페시의 저주로 인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황제는 사건을 묻기 급급했다. 밀란 디아시가 찾아와 진실을 요구했을 때 역정을 내고 모른 척했다. 황제에게도 나름대로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노마 디아시가 살아 돌아오자, 결국 제가 가장 아끼던 자식만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화가 났고 혼자 살아남은 노마 디아시가 꼴 보기 싫었다.

그러면서 황제는, 역설적이게도 그때도 지금도 ‘노마 디아시’ 자체가 참 탐이 났다.

과거 노마 디아시는 칼리페시의 짝으로 딱이었고, 그 애가 죽은 지금은 지지 기반이 없는 빌리넌트에게 저것보다 좋은 뒷배가 없었다.

둘째 황녀는 단 한 번도 황제의 마음에 찬 적이 없었다.

제법 영특하나 칼리페시보다 못했고 죽은 황후를 닮아 맹숭맹숭한 다갈색 머리에 흐리멍덩한 녹푸른 눈을 가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존재 자체로 새로운 후계자 빌리넌트에게 방해가 되어 눈앞에서 치워 버린 것도 벌써 몇 년이 되었다.

드디어 하등 쓸모없던 자식을 이용할 데가 생겼다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였다.

“신탁이 내렸소.”

황제는 빠득 이를 간 끝에 여유를 가장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신전의 해석에 의하면 노마 디아시 경이 맥포이 가주와 결혼한다는 내용이라더군. 맥포이 가주 생각은 어떻소?”

뭘 또 형식적인 질문을 하시는지. 그 신탁을 내린 것이 메헤라가 아닌 것을 아시면서.

나는 오랜만에 황제 앞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황제의 눈 밑이 씰룩대는 것이 보였다.

“메헤라를 섬기는 딸로서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물으셨으니, 내 대답은 하나였다.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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