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68화 (68/139)

68.

“간밤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침대에 늘어진 채 시종장이 가져온 아침 소식을 듣던 황제가 질색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황제의 수북한 가슴털과 배레나룻과 마주친 시종장이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하! 맥포이가 죽을 뻔하더니 그새 행보가 더 대담해졌군. 맥포이가 디아시와?”

실소를 하던 황제는 제 옆에서 나체로 누워 있던 창부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눈치 좋은 창부가 가운으로 대강 몸을 가리곤 빠르게 황제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노마 디아시가 황도에 있었다니……. 그는 아직 맥포이 저택에 있나?”

“그러합니다, 폐하.”

다른 귀족이 이런 사고를 쳤다면 아주 재밌는 소식이었겠지만, 맥포이와 디아시라니. 아침부터 기분이 잡치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는 흰머리가 한두 가닥씩 섞이기 시작한 탁한 금빛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긁었다.

“귀여운 맛이라곤 하나도 없는 노처녀가 어떻게 노마 디아시를……. 노마 디아시가 살짝 미쳤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그것이, 맥포이 가주에게 빠져 그녀에게 구애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평소와 같지 않아 그런 소문이 난 것이 아닐지…….”

“그 오만방자한 여자에게 빠진 게 미쳤단 증거지! 아니면 그 독사 같은 계집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게 분명하다!”

나처럼!

감히 황제를, 그것도 한참 연상인 자신을 막 대하는 맥포이 가주였다. 결국 그 오만함에 하찮은 모퍽까지 그녀를 배신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디아시가 그 망할 마장 결투를 기어코 하겠다는 건가?”

“노마 디아시가 도전장을 보내면 모퍽은 답을 해야 할 수밖에 없으니, 폐하께서 결투를 허하시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허참. 역사서에서나 본 일을 처리하게 생겼군.”

황제 또한 마장 결투는 소년 시절 제국 역사와 법을 배울 때나 본 적이 있었다.

유난스러운 일이며 황제 입장에서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와중에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또 아이사 맥포이, 그 건방진 계집이라니.

짜증이 치민 황제가 성질대로 미지근한 물이 담긴 은잔을 던졌다. 대리석 바닥에 은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 끼쳤으나 시종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겁먹은 어린 시종에게 잔을 치우라고 눈짓했다.

“맥포이 계집이 노마 디아시에게 저주라도 건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폐하.”

황제가 생각 없이 금기어를 뱉자 시종장이 조용히 그를 말렸다.

입술을 까득 씹은 황제는 생각했다. 맥포이 가주가 아주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그 계집이 열일곱에 처음 대회의에 참석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 계집답지 않게 독기 어린 눈이 매우 거슬렸다.

그러나 방심했다. 맥포이는 누가 봐도 다시 일어설 수 없었고, 귀족들은 더 이상 맥포이를 대귀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제국법의 허점을 이용해 상단을 차릴 때 내버려 두었다. 맥포이가 수치를 모르고 이젠 평민이 되려 하나 보군! 하며 아첨하는 귀족들과 함께 비웃고 말았다.

그사이 롬닥이 순식간에 성공하고 제국에서, 대귀족 사이에서 어느 때보다 입김이 세진 것이 벌써 5년은 되었다. 그때부턴 몇 번이고 맥포이를 누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 조그만 계집이 맹수였을 줄 누가 알았나. 이빨이 덜 났을 때 밟았어야 했다.”

황제의 한탄에 시종장이 송구하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황태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랬어야 했어.”

비록 아비인 제 눈에도 보통 성질이 아니었던 칼리페시는, 그럼에도 황제의 재목이었다. 그 아이는 괴팍한 동시에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오만한 귀족들을 상대할 수 있는 담대함과 명석함을 가졌었단 말이다.

그러니 황제는 칼리페시가 가끔 난감한 청을 해도 들어주었다. 오래전 신탁을 조작해 노마 디아시와 약혼을 할 수 있게 도운 것도 결국 칼리페시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 새로운 후계자. 빌리넌트는 아니었다.

황제는 아름다운 두 번째 황후 소생인 황태자를 몹시 사랑한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괴팍함만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애는 약삭빠른 귀족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날 거다. 이대로면 황권이 드디어 바닥을 칠 것이 뻔했다. 황가의 이름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황제가 보기엔 빌리넌트의 자리가 너무나 위태로웠다. 안 그래도 빌리넌트가 안정적으로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대한 대귀족의 권세를 누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서부와 동부의 패자가 사돈을 맺겠다니, 괘씸했다.

노마 디아시가 정말 아이사 맥포이를 사랑하건 말건 알 바가 아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결국 두 대귀족의 동맹이란 게 문제였다. 다른 의미론 동부와 서부의 결속이었다.

황제는 남부에 힘을 실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풀 대로 부푼 서부와 동부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특히나 서부에 아주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 맥포이는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한참을 아이사 맥포이가 괘씸하다며 씩씩대던 황제는 곧 음흉하게 웃었다. 그는 욕심 많아 어리석었지만, 머리를 못 쓰진 않았다.

“이보게, 아이반.”

“예, 폐하.”

황제가 평온한 목소리로 시종장을 부르자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오랜만에 황녀가 보고 싶군.”

시종장은 잠시 멈칫했다.

황제에겐 빌리넌트의 모친, 현 황후 아드리네의 간곡한 부탁으로 버린 자식이 하나 있었다. 서쪽 멀리 자그마한 왕국으로 요양을 보냈지만, 그것이 사실상 추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2황녀 메르케시 로덴시는 더 이상 황녀 취급을 받고 있지 않았다. 죄가 없으나 황가의 피가 흐르는, 모자라고 미쳐 버린 황녀는 죄인이었다.

시종장 아이반 역시 그녀의 생사 여부 정도만 보고받고 있었다.

“메르케시를 황성으로 불러라. 내 딸을 못 본 지 오래군.”

황제가 퍽 자비로운 아버지인 척하며 명했다.

‘맥포이와 디아시가 사돈을 맺게 내버려 둘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는 데굴데굴 머리를 굴렸다.

노마 디아시는 저주의 후유증 때문에 미쳤다는 소문이 있었다. 2황녀 역시 모자라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니, 미친 남녀 둘을 짝지어 주면 퍽 잘 어울리지 않겠는가? 황제는 못되어 먹은 생각을 하며 끌끌 웃었다.

“노마 디아시는 원래라면 내 사위 될 사람이기도 했으니.”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디아시와 연을 맺어 황권에 힘을 보태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는 맥포이를 엿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 * *

“욕설 하나 없지만 지금껏 받아 본 서신 중 가장 위협적이군.”

디아시 본성에서 날아온 장문의 서신에 대한 내 감상이었다. 서신에 꽉꽉 눌러 담은 치욕, 분노, 비명이 글자 하나하나에서 느껴져 놀랍기까지 했다.

디아시의 늙은 장로들이 소식을 듣자마자 본성에 모여 이 기다란 글을 써 내려갔을 모습을 생각하니 꽤나 측은지심이 들기도 했다.

박력 넘치게 노마 디아시의 손을 잡고 티베이 부인의 저택을 빠져나온 지 일주일.

디아시까지 이 소식이 들어가고, 그 뒤 디아시에서 날린 전서구가 황도 맥포이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일주일이 걸린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기겁했는지 알 수 있었다.

“효과가 대단하긴 하네.”

나는 테이블에 서신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해 키운 첫째 공자님을 책임지지 않으면 감옥 밥을 먹게 될 것이다.’

서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디아시의 늙은이들은 아이사 맥포이가 순진한 노마 디아시를 잡아먹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이 사람들아. 굳이 따지자면 당신네 앙큼 순진한 불여우한테 내가 홀랑 넘어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흘긋 맞은편에 앉은 미남자를 쳐다봤다. 서신만 보면 곧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눈앞의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오늘도 번쩍번쩍 광채가 흐르는 노마 디아시가 앙투아네트를 쓰다듬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 광경은 평화롭다 못해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만이 존재하는 이상적 세―.

“정말 빼도 박도 못하시겠네요. 뭐 어쩌겠어요? 순진한 총각 건드셨으니 책임지셔야지.”

누가 들으면 정말 밤이라도 보낸 줄 알겠다. 에리카는 일전에 시모어 부인 앞에서 내게 엿 먹었던 일을 염두하고 비꼬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따가운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물론 이렇게 될 것을 다 ‘아시면서’ 디아시 경의 손을 잡고 나오셨겠지만요.”

에리카가 한껏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그녀의 도발에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전 충동적으로 노마 디아시의 손을 잡고 티베이 저택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에리카는 아주 오랜만에 뒷목을 잡았다. 에리카 왈, 빼도 박도 못하게 일을 저질러 놨다는 점에서 그간 내가 친 사고 중 단연 최악이라고 했다.

에리카는 일주일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와 노마 디아시에 대한 소문을 최대한 낭만적으로 조성하는 등, 암중공작을 벌이는 동시에 모퍽과 관련된 신전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리카의 심술이야 받아 줄 생각이었다.

한편 에리카는 골머리가 아팠다. 제 주군께선 평생 사고를 치셔도 아무에게나 싸움을 거는 정도였다. 그러나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주 대형 사고를 치셨다.

노마 디아시 자체는 좋은 부군감이 맞다. 하지만 황제가 권력 이양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그의 출신은 독이 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기 딱 좋았다.

‘그걸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에리카는 벌써 가주님의 짝이라도 되는 듯, 아이사의 맞은편에 앉아 오전을 즐기는 노마 디아시를 흘겨봤다.

‘결국 저 얼굴 하나 보고 이 사고를 치신 것 아닌가.’

물론 가주님께서 아름다운 것에 매우 약하다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었고, 저 미모라면 세계 전쟁이 벌어져도 납득할 수 있긴 했다.

‘하, 나도 모르겠다.’

에리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하인 하나가 신속하게 다가와 그녀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에리카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가주님. 밀란 디아시 공이 오셨답니다.”

올 것이 왔다.

밀란 디아시. 그의 방문은 예상했던 일이다. 꼬박 일주일 만에 들이닥친 걸로 보아, 대회의가 끝나고 곧바로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소식을 듣고 급히 말을 돌렸음이 분명했다.

‘후, 졸 필요 없다. 내가 노마 디아시를 납치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제국에서 내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이 밀란 디아시였기 때문이다.

“가주님.”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버지께선 제게 벌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일 테니,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벌이라니. 이 나이 먹고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저도 같이 받나요?”

충격을 받아 묻자 노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하하, 하고 웃었다. 그는 맥포이 저택에 오고 나서 자주 소리 내어 웃는 것 같았다.

“가주님과 저는 곧 부부가 되니.”

“…….”

그의 입에서 ‘부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어쩐지 미약한 소름이 귓속부터 퍼지는 듯했다.

“뭐든 함께하면 좋겠지만.”

“…….”

“벌은 저 혼자 받을 겁니다. 오래 걸릴 테니 가주님께선 평소처럼 일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노마는 그러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든가…….”

무슨 벌인지는 몰라도 웃을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괜찮겠지 싶었다.

에리카는 두 분이 염병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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