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직전의 다짐이 무색하게 노마 디아시는 저돌적인 아이사 맥포이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노마 디아시는 한 줌 남은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해 애를 썼지만, 아이사의 경우 무지에서 나오는 용감함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 마주한 감각에 적극적이었고, 본능대로 움직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두 남녀는 인생 처음 느낀 벼락같은 감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번쩍, 손끝은 짜릿하고 머리는 마비되었으며 뱃속은 뜨겁게 들끓었다. 입술이 닿는 횟수만큼 빠르게 능숙해졌고 능숙해지는 만큼, 좋았다.
나는 분위기에 한껏 취해 노마 디아시의 얼굴, 가슴, 어깨, 목을 마음껏 주무르며 그의 입술을 탐했다. 내 기세에 밀린 노마의 다리가 마침내 카우치에 닿았고,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간 그가 입술을 부딪쳐 오는 나를 받아 냈다.
기어코 그를 눕히고만 나는 자각 없이 그의 딱딱한 복근에 올라타 하던 일에 몰두했다. 입을 맞추기 시작한 이유 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그저 그와 닿는 것이 미친 듯이 자극적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 다들 입을 맞추고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 따위나 들었다. ‘안 해 봐서 모르는 거다’라는 가노의 논리가 아주 궤변은 아닌 모양이다.
몇 번째인지 모르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다 먼저 입술을 떼어 낸 건 내 쪽이었다.
“하…….”
체력의 문제였다. 엎드려서 숨을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힘든 일이었다. 가쁘게 호흡하면서 노마 디아시를 내려다봤다. 그는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전혀 숨이 차 보이지 않아 괜히 진 기분이 들었다.
……잠깐, 엎드리다니.
뭘 내려다 봐?
노마 디아시의 맨 가슴을 짚고 있는 내 손이라던가, 손이라던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게 왜 저기. 왜 저기에 가슴이.’
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퍼뜩 손을 떼어 냈다.
노마가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와중에 그의 입술은 타액으로 번들거렸고 심지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제야 주변이 보이고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밀려드는 배덕감에 정신이 아주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카우치 위였다. 정확히는 카우치에 누운 노마 디아시의 복근 위로, 그의 상반신은 마치 날강도에게 습격을 당한 사람처럼 반쯤 벗겨져 있었다.
노마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내가 헤집어 놓은 것이 분명한 가슴팍을 한 손으로 주섬주섬 가렸다. 그 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순진한 총각을 농락한 기분이 들어 뒷덜미가 싸늘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자, 생각해라. 아이사 맥포이.’
내가 방금 느낀 것은 명백히 성적 흥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진정하자.
그렇다면 서부의 주인이, 맥포이의 가주가 처음 느낀 쾌락에 패배해 지금, 사람을 덮친 건가?
짐승도 아니고? 난 누구보다 지성인인데?
제길.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굳이 근원을 찾자면 이번에도 노마 디아시 때문이었다.
그가 날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고, 나는 얼떨결에 그를 안에 들였고, 그가 대뜸 내 부군 자리에 자신이 어울리는 이유를 읊기 시작했고, 그가―.
그가 내게 대뜸 그, 감정을 고백하는 바람에 나는 순진한 그의 착각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고…….
아니 그래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입을 맞춤 거람?
나는 태어나 가장 큰 자괴감을 느끼며 노마 디아시의 복근 위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더―.”
아무 말 없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여는 바람에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안 하시나요?”
그가 슬며시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누굴 파렴치한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 실례했습니다.”
“실례라뇨.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걸요.”
그가 유독 ‘결혼’을 말할 때 힘을 주며 바짝 다가왔다. 결혼. 그 단어에 이성이 돌아온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그 결혼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도요.”
어째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써 그 기분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맥포이와 디아시가 결혼한다고 하면 모든 귀족이 싫어할 겁니다. 특히 로덴시 황가가 뒷목 잡고 쓰러진다에 뭐든 걸죠.”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맥포이는 이 결혼으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정말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복잡했다.
예상컨대, 맥포이 빼고 온 제국이 이 결혼을 반대할 것이다. 귀족의 결혼은 결국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귀족 간의 결합은 다른 귀족들의 불만을 살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밉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다른 귀족들이 불만을 토하는 것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황제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황제의 몇 안 되는 권능 중 하나가 바로―.
“아마 겁 많은 우리 황제 폐하께선 지레 놀라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대귀족의 결혼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귀족은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결혼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까 걱정이시군요.”
“그래요. 당신과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맥포이고 당신은 디아시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황제라도 ‘메헤라의 뜻’이라면 허락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노마가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고 말했고, 나는 멈칫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분명 신탁일 것이다. 칼리페시가 노마 디아시를 탐내 그와 약혼할 때 쓴 방법이 바로 저것이었다.
오래된 제국보다 더 오래된 신전은 썩을 대로 썩어 돈을 주면 메헤라의 말씀도 맞춤형으로 만들어 냈다. 물론 이는 어마어마한 뒷돈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권모술수에 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디아시 가문의 뜻은 어떻습니까? 가문 사람들은 당신이 맥포이에 장가갈 생각하는 걸 알긴 합니까?”
나는 빠르게 다음 핑계, 아니 걱정거리를 댔다. 그들이 퍽이나 공들여 키운 디아시 1번을 ‘맥포이’에 줄까!
동부와 서부는 지리상 성향과 풍습도 차이가 많이 났다. 서부는 동부 사람을 따분하다고 여기고, 동부는 서부 사람을 무례하다고 생각하곤 하니까.
또 그간 내가 니콜라스 디아시를 기상천외하게 괴롭힌 역사가 있어, 그들은 나를 어마어마한 미친 여자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아이사 님, 설마.”
노마가 순식간에 지옥에 떨어진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날 바라봤다. 그는 마치 이미 버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썹을 모로 휘며 물었다.
“제 입술만 잔뜩 취하시고 절 버릴 생각을 하고 계시나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빨갛다 못해 터진 것 같은 그의 입술이 보였다. 파렴치한이 된 기분에 일단 부정부터 하고 봤다.
“그렇다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냉큼 내 손을 맞잡더니 언제 슬픈 얼굴을 했냐는 듯 상큼하게 웃었다. 그는 어느새 부끄러운 기색 없이 덥석덥석 잘도 남의 손을 잡을 줄 알았다.
“그 문제라면, 아이사 님이 이렇게 제 손을 잡고 이 저택을 나가시기만 해도 해결될 겁니다.”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저희 가문이 유난히 엄하다는 것은 잘 아시지요.”
“……잘 알죠.”
나는 스쳐 지나가는 노마 외 디아시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좋게 말해 고아한 것이지, 건국 전 예법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그들은 광기의 집단이었다.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하는데 은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그가 입술을 내 귓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실은 디아시에선 입을 맞추면 결혼해야 해요.”
노마가 소곤대며 귓속에 폭탄을 터뜨렸다. 오늘 그가 내게 한 소리 중 가장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귀부터 퍼지는 소름에 잽싸게 귀를 틀어막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그를 보았다. 농담일 것이다. 그는 장난기가 많으니.
“신체적 교류는 오직 반려와만. 디아시 직계가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예법입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그가 수줍게 떠들며 쐐기를 박았다.
수호할 게 없어서 그딴 걸 수호하는 건가? 사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고지식한 디아시 가문을 놀리는 말인 줄만 알았다.
나름 자유연애 시대인데 그건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다른 귀족들이 남몰래 연애하듯이, 입맞춤 정도야 안 보는 데서 하고 그랬겠죠. 설마 그걸 진짜 따를까.”
“디아시는 엄하니까요.”
……따르는구나.
“내가 이대로 그대와 결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저는 평생 혼자.”
“…….”
“살아야겠죠.”
“…….”
여기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곧바로 순진한 총각을 가지고 논 개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개쓰레긴가?
분위기에 말려 못 이기는 척 옆자리를 허락해 놓고 이제 와 내뺄 수 있는 여지를 찾는 나도 쓰레기는 맞지만, 비상식적인 것은 노마 디아시가 아닌가?
물론 그를 가지고 놀 생각은 없다만, 결혼은 중대사인데 이렇게 갑자기 정하는 건 황당한 일이 맞지 않나.
‘젠장.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람…….’
“제가 당신과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아시면 아버지께선 당연히 허락하실 거고.”
그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하기 짝이 없는 밀란 디아시를 떠올린 내 얼굴에 먹구름이 일었다.
“제 손을 잡고 이곳을 나가 저를 데리고 맥포이 저택으로 가시면 디아시 가문의 장로들 역시 허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건 비단 디아시뿐만 아니었다. 어떤 가문이건 미혼 남녀가 그런 짓을 했다간 양 가문이 펄쩍 뛸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아이사 님이 선택하실 차례입니다.”
“…….”
“당신께서 제 손을 잡고 이 방을 나서시면 저는,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그가 천천히 맞잡은 손을 풀었다. 내 손에서 그의 손이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나는 우습게도 그 순간 약한 상실감을 느꼈다.
혼란한 눈으로 노마를 바라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어 가며 웃어 주었다. 그는 아름다운 얼굴을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이런 요망한 놈.’
나는 오늘 이러려고 티베이 저택에 오지 않았다. 가면무도회에서 노마 디아시를 마주치고, 그와 결혼을 약속하는 일은 나의 계획에 없었다. 단 한 번도 검토해 본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다음 날 정신이 맑을 때, 측근들을 불러 모아다가 불꽃 튀는 상의를 해야 할 사항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또다시 멋대로 손이 움직였다.
저 손을 잡으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을 안다. 욕심이 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부 알면서도 홀린 듯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과 닿자마자, 혹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꽉 마주 잡자마자 아까 느낀 미묘한 상실감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노마가 꼭 만월처럼 웃었다. 기뻐요,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사랑을 속삭이는 어느 낭만 문학의 주인공 같아서 속이 울렁거렸다.
배꼽 아래서부터 피어오르는 만족감 따위에 일단 이 손을 잡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나 들었다. 이 모든 것은 필시 독한 술을 세 잔 내리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안일하게도, 나는 이때 노마의 입술을 빼앗은 죄가 그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설마하니 디아시의 미친 노인들이 단순 외박한 첫째 공자를 가지고 대형 사고를 쳤다며 결혼을 밀어붙일지 몰랐다.
나는 그 밤, 제국의 최고 미남 노마 디아시의 손을 잡고 티베이 부인 저택을 당당히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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