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끝마디마다 미세하게 떨렸다. 잘 보면 그의 둥근 손끝에도 그 떨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의식하고 나니 콩콩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시선은 내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나 상기된 분홍빛 뺨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미친 것이다. 짧은 인생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사람이 미치면 보통 그 이유는, 대체로 사랑 때문이다.
그놈의 사랑. 내가 사랑이니 뭐니 하는 감정놀음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노마 디아시가 어줍잖게 작위적인 만남을 만들어 온 것이.
설마하니 나를―.
“설마, 나를, 나를 뭐, 좋아해요?”
그가 지금 내게 사랑을 논하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말을 마구 더듬었다.
‘노마 디아시가 아이사 맥포이를 좋아한다.’
말이 안 되지만 정황상 이것밖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고, 난 확실한 걸 선호했다.
“정확히는 사랑이 맞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산뜻하게 내 귀에 때려 박혔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제 마음을 앞세워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그저 당신 옆자리에 절 둬 주세요.”
그가 그렇게 간절히 속삭였다.
“아이사 님은 제게 두 번째 삶을 주었습니다. 이번엔 가문의 의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 행복을 찾고 싶어요.”
“진짜 미쳐 버린 건 아니죠? 헛것을 보고 이러는 건―.”
노마가 세상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나를 마주 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안이 안 미쳤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새삼 가면무도회에 맞춰 어딘가 느슨한 복장을 하고 있는 그에게 아름다움을 넘어 색기마저 흐르는 것 같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그가 벌써 두 번째로 분위기를 살려 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부디 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노마 디아시가 예쁘게 눈을 감으며 말했다.
미쳤나! 노마 디아시!
어디로 보나 예뻐서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간지러워서 급기야 난폭하게 가슴을 쥐어뜯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아까 마신 독한 술에 이제야 취기가 오르는지 얼굴에 열이 몰렸다. 술기운을 탓하며 발그레한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그가 냉큼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이고 경이로운 얼굴을 들이댔다. 손바닥에 따끈한 그의 볼이 닿았다. 살포시 눈을 내리깐 그가 기다란 속눈썹을 가련하게 떨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개소리를 지껄였으면 더 들을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얼굴로 행복하게 해 달라는데. 자길 봐 달라는데.
내 손바닥에 얹어진 노마 디아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장 그를 행복하게 만들 방법이 100가지나 떠올랐다.
부군 될 사람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라도 바랐다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노마 디아시라니.
노마가 말한 것처럼 그는 최고의 부군감이 확실했다. 그 존재 자체로 신전과 먼 맥포이의 등불이 될 것이며, 그의 말대로 아치와 관계를 생각했을 때 제 발로 굴러들어 온 복덩이가 따로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풀거리는 그의 속눈썹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사랑. 날 사랑한다고?
어리석은 그대. 그건 당신의 착각이다. 당신은 오랜 잠에서 깨고 처음 본 것이 나라, 지금 착각에 빠진 거야.
당신은 10년 넘게 허(虛)인 공간을 떠돌며 죽어 달라는 말만 듣다가 갑자기 눈을 뜬 충격에 판단력을 잃은 거야. 그 충격에 본 게 나라, 단단히 당신의 감정을 오해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나는 굳이 착각이라고 정정해 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가문의 이익밖에 모르는 아주 이기적인 장사꾼이라,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 순진한 당신을 이용할 거야.
‘노마 디아시’는 그대 말처럼 이용 가치가 많은 사람이거든.
그러니 순진한 당신은 지금 굉장히 못되어 처먹은 사람에게 잘못 걸린 거다.
“저를 선택해 주세요. 저를 이용해서…….”
그때 순연히 눈을 감은 그가 타이밍 좋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손끝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가끔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당신하고 있으면 도통 길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날 아주 충동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당신을 못 내버려 두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 나처럼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가끔 허공을 바라보며 당장 죽어야 되는 사람처럼 굴지만 사실은 죽기 싫어한다. 그런 당신이 살아남아 이젠 제 행복을 찾고 싶다고 한다. 당신에게 눈이 갈 수밖에.
또한 그렇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은 살아도 된다는 말을 오랜 시간 기다렸고 타이밍 좋게, 아주 우연히 그 말을 해 준 게 나라, 그래서 지금 날 사랑한다고 착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 알려 주지 않을 거야.’
당신이 그 감정이 착각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땐 한참 늦었을 거다. 두근두근. 목줄을 쥔 쪽은 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분명 내게 유리한 제안이었으나 마음이 소란했다.
순진한 그를 속이는 것만 같아서 그런가?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저 눈앞의 남자가 점점 탐이 나 급기야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대가 선택한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아다 끌어당겼다. 그는 순순히 내게 이끌렸다.
마주 보고 선 그는 새삼 키가 컸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새삼 잘 꾸민 그의 미모는 계속 보고 있기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다. 가령 이성적인 사고가 무뎌진다거나 하는.
“이걸 진짜 어쩌지.”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시나요, 아이사 님.”
노마 디아시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더 들이댔다. 나는 생각하길 포기하고 들이밀어진 얼굴을 멍청히 구경했다.
“절 받아 주셨다고 생각해도 되나요.”
“……일단은?”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지 몰랐다. 그가 1등 부군감이라고 한들, 맥포이 가주 부군 자리는 이렇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극히 충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성의 외침을 무시했다.
동시에 몹시 행복한 얼굴로 미소 짓는 노마 디아시를 보고 있자니 뭐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께 입 맞춰도 되나요?”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해 죽겠다는 미남자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가 수줍게 물었다.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나는 식겁해 그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입을 맞춰? 왜?
역시 미친 게 맞았냐는 표정으로 노마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후엔 입을 맞추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어디서, 누가 그런 망측한 소리를 했지?”
“책에서요. 그리고 보통…….”
낭만 문학에서 다들 그러덥니다, 라는 뒷말을 숨긴 노마가 거리를 한 뼘 좁혔다. 그는 맥포이에 방문하기 전에 수천 권의 낭만 소설을 독파한 바 있었다.
책이라니, 정말 그런 통과 의례가 있다는 말인가? 필립과 약혼할 때 대리인을 보냈으니 당장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이쪽으론 배움이 많이 부족하군요. 공부를 하고 오겠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일단 미루길 택했다. 대충 입술이 닿으면 되는 것 같긴 했다만, 몇 번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한 것에 의하면 단순히 붙였다 떼는 게 전부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공부하실 생각이십니까?”
노마가 웃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물었다.
“일단 당신이 읽은 책이 뭔지 좀 알려 주면 되겠네요.”
“이런. 디아시 본성 서고에 딱 한 권 있답니다.”
그가 퍽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곤 잠시 손을 내어 달라고 말했다.
이번엔 군말 없이 손을 내주었다. 평소보다 얄팍한 장갑을 낀 탓에 꼭 맨손에 그의 손이 닿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두루마리에 가주 인장을 찍으시는 것처럼 형식적인 일이니 부디 편히 생각하세요.”
쉽게 납득이 갔다. 보아하니 완벽한 입맞춤일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노마가 잠시만 눈을 감아 달라 청했다. 입 맞출 때 눈을 감는다는 것쯤은 나도 대강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꺼이 눈을 감아 주었다.
‘잠시만. 진짜 이대로 그와 입을 맞춘다고? 해 본 적 없는데? 이러다 진짜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전에 내가 받아 준다고 이미 말했던가?’
시야가 차단되자 그제야 이성이 팽팽 돌아갔다. 제대로 말린 기분이 들어 그의 손을 마주 잡은 손에 땀이 솟기 시작했다.
속으로 ‘안 돼!’를 외치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코가 닿을 거리에 있는 금안이었다.
‘젠장. 저 인간은 왜 눈을 뜨고 있지? 떠도 되는 건가?’
알 수 없는 법칙에 이번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질끈 도로 눈을 감았다. 그의 손바닥에 내 손톱이 파고들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
다음 순간 매끈하고 말랑한 것이 꾸욱, 입술에 닿았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이게 끝이라고?
내가 아는 입맞춤이란 한 번 닿으면 꽤나 오래간 붙어 있는 것인데…… 어딘가 이상했다.
번쩍 눈을 떴다. 곧 터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노마 디아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급기야 눈에 띄게 손을 떨어 댔다. 마치 유경험자인 양 자신만만하게 굴더니 그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런 그를 향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다시 해 봐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말에 그가 깜짝 놀라 하며 나를 돌아봤다. 어쩐지 기뻐하는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후딱 다시 해 보라는 의미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배운 대로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매끈하고 말랑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타인의 입이 닿는 게 비위생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막상 닿아 보니 이게 또 나쁘지 않았다.
닿자마자 사라졌던 아까와 달랐다.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을 때 그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약하게 잡아당기듯 머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행위에 반사적으로 눈이 떠지고,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 순간, 이번엔 두툼하고 축축한 뭔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라 그대로 그것을 깨물어 버렸다. 맞잡은 그의 손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노마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의 입술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자 딱 기절하고 싶었다.
“어디다, 뭘 집어넣는 거예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그의 난잡함을 믿을 수가 없어 세상 억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민망함을 견디지 못해 얼굴에 잔뜩 열이 올랐다.
당황하기만 했나? 문제는 미묘한 간지러움이 뱃속에서 퍼지는 괴상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 기분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아이사 님을 놀라게 했군요. 하지만 책에 의하면 입맞춤이란 원래 혀를 섞으며.”
노마는 놀란 나를 달래듯이 엄지손가락으로 슬슬 손등을 쓸며 바짝 다가왔다.
“빨기도 한답니다.”
그가 내 귀에 그렇게 속삭였다.
“……뭘 빤다고?”
“혀를요.”
그의 말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나는 눈알만 데룩 굴렸다. 어쩐지. 단순히 입술만 맞닿고 있는 것치곤 다들 지나치게 헐떡거리더라.
“오늘은 그저 약속의 의미였으니 이걸로 충분합니다. 더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제대로 못 했으니 하, 한 번 더 해 봐야 하나?”
“…….”
인내의 상징 노마 디아시는 결국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죽겠으면서도 한편으론 이쪽으로 너무 순진하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정말 어쩌지.’
노마는 작고 소중한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진도를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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