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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65화 (65/139)

65.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발코니 창 쪽을 돌아봤다. 이 층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아마도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듯했다.

어떤 미친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이 겨울에 발코니에 나와 풍기 문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 얼어 뒈져도 상관이 없나? 휴게실에서 저러면 안 되지. 여관에 가라고!’

나는 다급하게 다시 노마를 쳐다봤다. 흔들리는 동공과 또다시 맞부딪혔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해명을 해야 하나? 무도회에서 휴게실이 비록 그렇고 그런 행각을 벌이는 곳이 맞긴 한데 원래 저렇게까지 하면 안 되고, 나는 절대로 저런 의도로 그대를 들인 것이 아니며…….

“이건―, 그.”

어떤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노마가 대뜸 내 얼굴 쪽으로 양손을 뻗어 왔다. 그가 내 키에 맞춰 허리를 숙인 탓에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 양 귀를 턱, 막았다.

“……뭐 하는 거예요.”

두 뼘 거리까지 다가온 금안을 홀린 듯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소년처럼 구는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나온 말이었다.

아마도 노마는 민망한 소리를 막을 수 없으니 냅다 내 귀라도 막은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얼굴은 착실하게 붉어졌다.

“노, 놀라신 듯하여.”

“그대가 더 놀란 것 같은데.”

내 말에 노마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가 점점 땅을 바라보더니, 곧 푹 고개를 숙였다.

신음 소리 때문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봐도 한탕을 노리거나 날 두고 내기를 한 놈 같진 않은데.’

노마 디아시는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할 때가 많았다. 맹렬하게 그를 의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빠르게 경계심이 사그라들었다. 대신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장난기가 들고 일어섰다.

“……그러게 왜 여기까지 따라와선. 가면무도회가 이런 데라고요. ‘디아시’한텐 무리라니까?”

그에겐 비밀이지만 그러는 내게도 무리가 확실했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두근거리긴 했다.

내 말에 슬쩍 고개를 든 노마가 꽤나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를 놀리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이래서 그가 카탐에서 날 그렇게 곤란하게 만들었나 싶었다.

노마는 입 모양으로 내게 잠시만 귀를 막고 있으라 했다. 손바닥으로 귀를 막아 본들 제대로 막아지는 것도 아닌데 비장하게 구는 그가 그저 골 때렸다.

그가 장난스러운 아이를 둔 어머니처럼 재차 꼭 귀를 막고 있으시라고 말할 때, 나는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속하게 발코니 창을 닫은 노마가 허리를 숙여 웃다 못해 쭈그려 앉아 거의 울다시피 웃어 대는 내게 돌아왔다. 그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이 내 옆에 쭈그렸다.

“그대는 이런 무도회에 올 일이 없으니 잘 몰랐을 테지만, 일단 저 소리가 뭔지는 알겠죠?”

“……네.”

그래도 나름 알 건 다 아는지 그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더 놀리면 그의 얼굴이 정말 터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장난은 그만두기로 했다.

“특히나 가면무도회에서 휴게실이란 곳은 남녀가 함께 들어오면 저렇게 은밀한 짓을 하는 장소로 쓰입니다. 그러니, 선객이 있으면 들어오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고.”

그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내 말에 계속 끄덕끄덕거렸다. 장신의 미남이 쭈그려 앉아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퍽 온순한 강아지처럼 보였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 순진한 그대를 곤란하게 한 겁니다.”

“…….”

“경께선 아무래도 내게 용건이 있는 모양인데, 날도 그렇고…… 특히 장소를 아주 잘못 잡으셨습니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으니 서둘러 나가세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는데 노마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이사 님.”

“예? 그럼 제게 용건도 없는데 여길 왜 왔습니까?”

“저는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가 신에게 부정을 고하는 신관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설마하니 그걸 부정한 것인 줄은 몰랐다. 어째 그에게 또다시 말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보기 드물게 순진한 것 같은데…….”

“저는 이곳이 뭘 하는 장소인지 압니다. 알고, 당신을 만나러 온 거예요.”

노마 디아시는 가끔 말을 참 이상하게 할 때가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오해하고도 남았을 발언 같은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뱉곤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끄러운 말을 하곤 혼자 얼굴을 붉히는 것도 여전했다.

“긴박한…… 용건인가 보군요.”

나는 가까스로 이상한 분위기를 살려 냈다.

“실은 오늘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저 당신을…….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노마 디아시의 아련한 대답 때문에 나의 필사적인 수습은 곧장 무효가 되었다.

노마는 오늘, 이런 곳에서 이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더 천천히 더 좋은 분위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감이 좋았고 그의 촉이 바로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내 미간은 어떤 불안감으로 조금씩 좁아 들었다. 날 따라 제법 궁상맞게 쭈그려 앉았던 그가 기사도 문학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처럼 한쪽 무릎을 굽히고 내게 손을 뻗었다.

“아이사 님,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결국 ‘제안’이 나오자 또다시 아까와 같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유 모를 짜증을 외면하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날 은인이라고 하지만, 그대 역시 내 은인이 맞으니.”

나는 건조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은인의 말을 못 들어 줄 것도 없지. 어디, 해 보세요.”

“아이사 님은 새로운 부군을 찾고 계시지요.”

“뭐요?”

“곧 신전 재판을 통해 모퍽 소가주와 파혼하시면 새로운 부군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물론 부군이 필요하긴 했다. 깜찍한 아치는 ‘고모의 행복’ 어쩌고 하며 큰소리쳤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다만, 예상치 못한 주제라 꽤나 당황스러웠다. 일전에 그가 응접실에 찾아왔을 때 테이블에 흩어진 미성년 공자들의 초상을 보고 말았던 일이 순간 머릿속에 스쳤다.

제길.

“……뭐, 중매라도 서시게요?”

“그럴 리가요.”

노마는 잠시 아찔함을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아름다운 노마 디아시의 미소’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를 상대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녀는 정말 내 얼굴만 좋아하시는구나. 내가 당신 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신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노마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래저래 노련한 자였다. 말을 꺼낸 이상 이 자리에서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아이사 님이 결혼을 하시려는 이유는 아치 공자를 입적하기 위해서겠지요. 저는 그 누구보다 아치 공자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귀에 쏙쏙 박혔지만 이해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아치의 아버지라니. 내가 지금 그가 한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그는 지금…….

“경. 지금 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아이사 님.”

“난 이런 농담을 아주 싫어합니다.”

“맥포이는 성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드무니, 제가 아치 공자에게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내 경고에도 노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즉답했다.

“저는 그 나이 또래 아이를 돌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가 나이 차이 나는 동생 니콜라스 디아시를 업어 키운 것이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노마의 자기 어필에 정신이 혼미했다.

“노마 디아시가 맥포이 가주 부군이 된다면 누구도 맥포이를 두고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는 신이 사랑한 디아시 가문의 장남이자 성기사이니까.

“저보다 나은 부군감이 있나요?”

있겠냐? 아니, 이게 아니지. 하마터면 맞는 말만 해 대는 그에게 말려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대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놈을 찾는 겁니다.”

“이왕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보다 아치 공자를 돌보는 것과 본성의 안살림에 야망이 있는 저를 고르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노마가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가 육아와 안살림에 이런 열정이 있는지 몰랐다.

그보다 진심인가? 지난번 맥포이 성에 방문했을 때 내 성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아치가 그렇게 예뻤나? 아주 가족이 되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나와 결혼을 생각하다니. 노마 디아시는 미친 게 분명했다.

제국에서 노마 디아시라고 하면 과거에는 최고, 지금도 물론 좋은 신랑감이었다.

저주에 걸린 후유증이 있다지만 그의 외관이며 성품, 능력은 여전했으며 무엇보다 이젠 기적의 사나이라는 타이틀까지 추가되지 않았나.

반대로 나는 어떻지? 내가 남자였으면 모를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결혼 시장에서 내 취급은 좋지 않았다.

일단 맥포이 가주 부군 자리는 대귀족 중에서 원하는 사람이 없어 내 쪽에서 눈을 낮춰야 했다. 이 밖에 상단을 굴린다는 점, 노처녀, 질 나쁜 소문 등으로 내 취급이 좋지 않다는 것이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눈앞의 미남자가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주의 후유증이란 것이 무섭긴 하다는 생각을 하며 부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맥포이 본성이 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아치에게 좋은 친구, 스승, 뭐 그런 역할 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도 맞는데―.”

나는 자비롭게 그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기로 했다. 노마 디아시는 내가 그에게 유독 관대하단 점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당신은 순진한 게 맞는 것 같군요. 맥포이 성에 머물렀던 기억이 좋았던 모양인데, 그 점은 성주로서 참 다행이지만. ‘노마 디아시’에겐 지금도 좋은 혼처가 양피지로 세 두루마리는 나올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아이사 님은 제게 참 상냥하십니다.”

“…….”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이 제안을 통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접니다.”

“어딜 봐서요. 누가 봐도…….”

나만 이득인데. 나는 부러 뒷말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이 거래의 허점, 그러니까 명백히 당신이 손해라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이 제안은 결국 아이사 님 옆에 있고 싶다는 저의 사심 채우기입니다.”

“그러니까요.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예?”

오늘 노마 디아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족족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당신 옆자리.”

그가 대단히 심각한 소리를 산뜻하게도 말했다.

“그러니 저를 부군으로 맞이해 주신다면 저는 그걸로 득입니다. 서로가 득이라면, 이보다 좋은 결혼은 없지 않나요.”

그가 가슴 중앙에 손을 얹고 간절한 투로 말했다. 부드러운 어조 때문인지 뱃속이 근질거렸다.

서로 이득 보는 거, 아주 좋지. 와중에 내가 더 이득이라면 금상첨화가 맞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못 알아들을 수 없다.

더 이상 착각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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