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64화 (64/139)

64.

술기운이 오르고 궁지에 몰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필립은 ‘노마 디아시’가 누군지 알았다. 그는 이름난 성기사가 아닌가.

그런 자가 갑자기 제게 결투를 요청하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필립은 성력도 없고 검기도 다룰 줄 몰랐다. 제대로 승마도 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일단 눈앞의 기사는 자신과 체격부터 심하게 차이가 났다. 절로 눈물이 핑 돌고 숨이 탁 막혔다.

‘하지만 결투를 피했다간…….’

귀족의 명예는 보통 추잡한 소문으로 땅바닥에 처박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명예가 땅을 기어 다니는 귀족이라도 어떤 추문이냐에 따라 은근슬쩍 사교계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있었다.

그러나 결투를 피하는 것은 달랐다. 중앙에 다시 발을 못 들이는 최고의 수치이자 불명예였다.

즉, 결투에서 도망치면 재기 불능이었다. 차라리 결투 중 목숨을 잃는 편이 훨씬 명예로웠다.

그러니 가문 이름 하나 믿고 살아온 모퍽의 필립은 오줌을 지릴 만도 했다. 하필이면 상대가 노마 디아시라니. 나라도 도망치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일이 아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상황을 지켜봤다. 맹약에 따라 필립이 가문에서 파문되면 그대로 평생 노역을 지게 하려던 참이었는데. 별안간 내 수호 기사를 자처한 노마 디아시가 나타나 필립에게 죽음을 선고한 꼴이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지. 이번 일은 자극적일수록 오래갈 테고. 바라던 바는 맞는데.’

결투를 막을 이유가 딱히 없었다. 이걸로 빚을 진다고 하기엔 노마 디아시가 제 입으로 날더러 은인이라 했고, 그가 필립을 상대로 질 리가 없지 않은가.

“아…… 아아……. 아…….”

이미 한참 전에 한계였던 필립의 가냘픈 정신 줄은 더 이상 압박을 버티지 못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는 결국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필립이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뜻밖의 이벤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마치 악당이 쓰러진 것처럼 뜨겁게 환호했다. 졸도한 필립에게 조롱을 뱉거나 포도알을 던져 대는 사람도 있었다.

자극적인 사건의 연속에 관객들의 흥분이 하늘을 찔렀다.

어느새 무도회 손님들이 죄다 간이 무대 앞에 모였는지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저들을 뚫고 나갈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개판이군.”

한 발짝 떨어져 그 소란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개판을 의도하긴 했으나, 저들을 비집고 나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암담했다.

“가주님.”

그때 계단에서 내려온 티베이 부인이 나를 불렀다. 가면을 쓴 그녀 뒤로 시종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보였다.

“손님들이 과하게 흥분해 당장 나가시기는 어렵겠습니다. 정리할 동안 잠시 휴게실에 계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내게 바짝 다가온 그녀가 몹시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조아리고 내 귀에 신속한 투로 속삭였다. 흘긋, 다시 난장판 한가운데를 돌아보니 그녀 말을 듣는 편이 나을 듯했다.

“……저들을 때려 기절시키지 않는 한 지나가기 어렵겠군. 피곤하기도 하니 잠시 쉬겠다.”

“예, 가주님. 이 아이가 안내할 겁니다.”

자리를 뜨기 전 나는 다시 한번 졸도한 모퍽 쪽을 돌아봤다. 그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머리통 사이로 필립을 향해 여태 검을 치켜들고 있는 노마 디아시의 옆얼굴이 보였다.

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몇 초간 그를 바라보다 팩 몸을 돌려 티베이 부인의 어린 시종을 따라갔다.

시종 하나를 따라 계단을 몇 개 올라가니 비교적 한산한 복도가 나왔다. 시종은 휴게실은 모두 비어 있으니 편한 곳에 계시라 했다.

무도회와 상극인지라 슬슬 고단했던 나는 냉큼 가장 가까운 문을 골랐다. 눈치 좋은 내 기사들은 휴게실 안을 빠르게 점검한 뒤에 문밖에서 대기했다.

“얼씨구.”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온 것은 실소였다.

과연 티베이 부인. 나는 여기가 휴게실인지 고급 여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코니 창부터 열었다. 열기 가득한 곳에 있다 보니 속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카우치에 걸터앉아 협탁에 놓인 독한 술을 잔에 붓고,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보는 눈도 없겠다 그대로 장정 셋이 누워도 될 것 같은 널따란 카우치에 드러누웠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시끌벅적한 무도회는 역시 생리적으로 무리였던 모양이다.

“푸흐…….”

그래도 관객의 뜨거운 반응이나 필립 모퍽이 오줌까지 지린 것을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긴 했다.

“흥, 랑드라이 머리가 꽤나 쓸 만하긴 하군.”

카우치에 늘어진 채 낄낄대던 나는 일순 뚝, 웃음을 멈췄다.

“그나저나 그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느릿하게 손안에서 잔을 굴리며 노마 디아시에 대해 생각했다. 실은 오늘 가면무도회에 그가 나타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디아시’가 가면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 가문의 꼬장꼬장한 장로들이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타이밍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사실 노마가 나서지 않았으면 참지 못하고 직접 필립을 팼을 것이다.

그건 썩 귀족적인 방법이 아니었고,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꼴을 봤으면 맥포이 가주가 모퍽 소가주의 도발에 넘어갔다며 비웃었을 것이다.

‘오늘 그를 무도회에서 만난 게 우연일 수 있나?’

아니. 그럴 수 없다. 세상은 그렇게 태평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천장을 바라보던 눈빛이 차갑게 식고 잔을 굴리던 손이 멈췄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티베이 부인이 생각보다 이르게 술주정뱅이들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가주님, 디아시 경입니다.”

그러나 기사는 의외의 인물을 고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술기운이 가셨다.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문 쪽을 노려봤다.

‘이놈 봐라―.’

노마 디아시가 하필 오늘 티베이 부인의 가면무도회에 온 건 우연일 수가 없다. 그가 갑자기 맥포이에 왔던 일은 또 어떻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보인 모습이 심히 수치스러웠던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 발로 날 찾아왔겠다, 당장 앞에 앉혀 놓고 낱낱이 그의 속내를 털어 버리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기가 어디냐. ‘티베이의 부인의 가면무도회’가 아닌가.

심지어 휴게실이 어떤 장소냐. 남녀가 함께 있을 때 ‘밀회 장소’로 둔갑하는 곳이 아닌가.

순진해 빠진 노마 디아시는 남녀가 이곳에 모여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내게 할 말이 있어 따라 올라왔을 것이다.

아무리 가면무도회에는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 주는 규칙이 있다고 해도 나와 그는 파장을 불러오기 좋은 조합이었다.

나는 일단 그를 쫓아내고 내일 황도의 맥포이 저택으로 불러들일 요량으로 몸소 문을 열어젖혔다. 그를 보자마자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올라왔냐며 한 소리 하고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맞닥뜨린 그의 눈동자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눈물을 흘리기라도 한 듯 눈가는 발긋했다.

“……뭐야.”

꼴이 왜 이래. 울었나? 금안에 담긴 내 얼굴이 일렁이는 걸 보고 하려던 말을 잃은 나는,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젠장. 그사이에 뭐가 또 있었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노마 디아시가 너무나 구슬픈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는 바람에 이번엔 내가 대역죄인의 심정이 되었다.

왜 안 돌려보내시지?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미묘하기 짝이 없는 가주님과 디아시 경의 대치 상황을 두고 슬쩍 눈알을 굴렸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할 새 없이, 나는 노마 디아시를 이대로 문전 박대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어떤 위기감에 휩싸였다.

고민은 짧았다. 나는 목을 쭉 빼 복도를 좌우로 빠르게 살폈다. 노마는 그런 날 내려다보며 촉촉한 눈을 깜빡이기나 했다.

마침 무도회 손님들은 소란 때문에 대부분 회장에 모여 있어 휴게실 쪽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 복도에 아무도 들이지 마라.”

나는 급한 마음에 노마의 팔을 잡아당기며 기사에게 명령했다. 어느새 표정을 갈무리한 기사가 존명을 받들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문이 닫히고 휴게실엔 잠시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곧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에 당황해서 일단 방에 들이긴 했지만, 그 선택에 곧바로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후회하면 뭐 하나. 이미 들인 것을. 이왕 들인 김에 그가 여기 온 이유나 알아내자는 마음으로 정적을 깼다.

“보아하니 지극히 이성적인 상태이신 것 같긴 한데.”

“아이사 님.”

노마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울먹거리는 눈을 하고 날 불렀다. 아까 필립에겐 찬바람 쌩쌩 불더니 이제야 내가 아는 그 목소리였다. 경계심이 절로 한풀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눈을 하고 쳐다본들 어림없었다. 나는 오늘 당신이 그 예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고 말 거니까.

“오늘 당신이 티베이 저택에 온 것이 우연입니까?”

“……우연이 아닙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노마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대답에 기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젠장. 이래선 꼭 우연으로 만나길 바란 것 같지 않나?’

보통 우연을 ‘가장해’ 나와 만나려고 하는 자들의 의도는 뻔했다.

대부분 내게 붙어 콩고물을 떼먹고 싶어 하는 자이거나,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된 악명 높은 여자에게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머리 빈 놈뿐이었다.

‘내가 자신에게 유독 너그럽다는 것이야 뻔히 알고 있는 듯한데, 그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섣부르고 무례한 망상이란 걸 알지만 보통 내게 접근하는 젊은 남자들이란 대부분 저 둘 중 하나였다. 내게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쪽엔 가차 없었으니, 그러한 접근은 씨가 마른 지 오래긴 했다.

지금껏 본 노마 디아시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가 한탕을 바라거나 불순한 의도로 날 만나러 왔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 속은 알 길이 없다는 걸 잘 안다. 그가 정말 나를 우습게 알고 이러는 거라면, 그 밤 역시 우연을 가장한 것이라면…… 아주 괘씸했다.

“애초에 그 밤도 내 정원에서 일부러 서성거린 겁니까?”

불량하게 눈썹을 치켜뜬 내가 위협하듯이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다. 비아냥거리는 어조에 맞춰 입매가 비틀렸다.

“그날은 우연이 맞습니다. 믿어 주세요.”

“뭘 보고 당신을 믿지? 맥포이 가주에게 당신이 볼일이 뭐가 있다고.”

난 제법 단호하게 우리가 얼굴 볼 일이 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사실이 그랬다. 매정하게 들려도 애초에 정을 따질 사이가 아니기도 했다.

잔뜩 날이 선 내 말투에 그의 금안이 한층 촉촉해지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모습에 잠시 움찔했지만, 나는 의심스러울 때 입을 멈추는 법을 몰랐다.

“뭐, 앙투아네트 때문에 날 만나려 했나? 그렇다면 곧장 내 저택으로 왔어야지 이런 파티에 와요, 그 디아시가?”

은밀한 부탁을 할 게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쫓아와 날 만날 리가 없지.

“디아시는 이런 파티에 오면 안 됩니까?”

“그걸 내게 물어요? 당신네 디아시의 가풍에 의하면―.”

노마가 퍽 상처받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법 반항기 어린 그의 대답에 내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릴 때였다.

“아앙―.”

일순 낯 뜨거운 신음이 날카롭게 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이 무슨.

“……미친.”

아흐! 아아! 이어 등 뒤로 꽂히는 다채로운 헐떡거림에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나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신음을 노마 디아시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금욕의 상징이래도 이 신음의 의미는 알겠지.

마주친 두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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