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덴버 거리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엑트라에게 아이사와 관한 추문을 들은 노마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겐 언제나 한심한 모습만 보이는 것만 같다.’
자신이 첫사랑의 감정에 들떠 있을 때 그녀는 그런 수모를 겪고 있었다니. 매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눈을 떴던 날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맥포이 가주 부군 자리를 꿰차고 있는 복에 겨운 작자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에 이어 그들이 추문을 핑계 삼아 파혼을 요구했다는 것을 들었을 땐 눈앞이 하얘졌다.
노마 디아시는 맹세코 몰랐다. 밀란과 니콜라스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노마를 싸고돈 탓에, 그는 그동안 바깥과 차단되어 있었다. 질 나쁘고 자극적인 추문을 입에 올리지 않는 가풍의 영향이 크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나 싶었다.
담담한 엑트라의 목소리에 이런 일이 그녀에게 익숙한 것만 같아 더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들뜬 마음으로 맥포이에 찾아갔을 때 아이사는 내색을 전혀 안 하기도 했다.
여관 식당에서 자신이 정신을 놓고 난동을 부린 날, 어두운 숲속에서 그녀가 그런 소문과 희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제게 소리쳤던 일이 생각났다.
성력과 검기를 타고난 노마는 언제나 제가 가진 힘을 경계하며 살았다. 절제하는 것엔 도가 튼 그였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새삼 참기 어려웠다.
“가주님께선 오늘 아주 끝을 보실 생각이십니다.”
물론 엑트라는 맥포이의 목적이나 약혼자와 맺은 맹약 내용, 내연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노마를 가주님 짝으로 밀고 있긴 하지만 그는 아직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엑트라는 그저 오늘 밤 티베이 부인의 가면무도회에 우리 가주님이 참석하고 그곳에 필립 모퍽과 그와 내연 관계인 여자가 온다는 말을 흘렸다.
12년을 잠들어 있던 노마도 가면무도회가 중앙의 퇴폐적인 놀이 중 하나란 것은 알고 있었다.
어째서 아이사 님이 그런 곳에 직접 간단 말인가? 그의 고결한 머리로는 아이사의 뜻을 쉬이 가늠하기 어려웠다.
“티베이 부인 가면무도회는, 가면무도회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관능적인 파티입니다. 실은 좋게 말해 관능적이지 변태들이란 변태는 다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변태라니. 노마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디아시 경이야 그런 곳과 인연이 없으시겠지만.”
엑트라가 그런 노마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저희 가주님 호위로 디아시 경 같은 분이 있어 주신다면, 이 늙은이 마음이 편하겠네요. 저희 가주님껜 별 거지 같은 놈이 여러모로 잘 꼬이기도 한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닉스 같은 새끼 말이죠,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노마는 방금 막 기사를 때려치우고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지금 닉스를 봉인하는 일로 성지에 있으니, 아직 은퇴 처리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기사는 맞지.’
거기까지 생각한 노마가 즉답했다.
“제가 맥포이 가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노마는 그렇게 엑트라의 도움을 받아 무도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시간에 티베이의 저택에 들어갔다.
때마침 연극이 시작된 회장은 어둑했고 하나같이 색색의 가면을 쓴 손님들의 시선은 모두 간이 무대를 향한 채였다. 덕분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여러모로 눈에 띄는 그의 외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디아시 경의 외관은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는 게 문제다만, 연극이 시작된 후에 들어가시면 대놓고 경께 시선이 쏠리진 않을 겁니다.”
과연 엑트라가 말한 대로였다. 또한 그녀가 말한 것처럼 가면무도회는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를, 가면을 쓴 남녀가 한데 뒤섞여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있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어쩐지 긴장이 풀어지는 독한 향기나 느릿한 악기 소리에 맞춰 모두 온 근육을 느슨히 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끈적하고 어둑한 회장을 헤쳐 나가던 노마는, 어렵지 않게 아이사를 찾았다.
그녀를 찾는 건 노마에겐 숨 쉬는 일보다 쉬웠다. 그녀는 제 가슴팍에 찰 정도로 몹시 체구가 자그마했음에도, 그녀는 여러모로 그의 눈에 아주 잘 들어왔다.
검기를 다뤄 감각이 예민하고 눈썰미가 좋은 탓이겠지만 노마는 사랑의 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년 만에 만난 것처럼 애가 타 한달음에 그녀 앞에 서고 싶었으나, 노마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변태들이 닿지 않게 남몰래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인데 이래서야 자신이 변태 같지 않나.
아이사가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을 땐 연극이 한창이었다. 마침 약혼자 역의 배우가 그 내연 관계의 역의 배우에게 맹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가면 아래에서 노마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가면무도회에서 어떻게 필립 모퍽과 그 내연녀를 끝장낼 수 있는지 의문이었던 노마는 그제야 맥포이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항시 온화한 그의 기색이 사납게 날뛰었다. 간이 무대에 선 두 사람이 배우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에게 저도 모르게 살의를 느꼈다.
회장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각 귀족의 호위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살기에 일제히 당황했다. 암살자인가? 하고 하나같이 허둥댔지만, 사람이 많아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가주님께선 외부 도움받는 걸 싫어하십니다. 그러니까, 뭐든 맥포이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티베이 저택 뒷문에서 절 배웅하던 스탕 부인의 조언을 기억한 노마는 가까스로 감정을 갈무리했다.
“맥포이가 기울었을 땐 다들 나 몰라라 했던 자들이다, 뭐 이런 생각이시지요. 그래서 특히 맥포이의 정적 제거에 외부인이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엑트라는 그러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니, 뭘 보던 참으셔야 합니다. 오늘 회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가주님의 뜻이니까요.”
노마는 엑트라가 한 말을 되뇌며 무대 앞, 그녀 옆에 서서 몸을 떨고 있는 남자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 그녀가 하는 일을 망칠 순 없지.’
긴 잠에 들기 전 노마는 한평생 이 제국에서 인내, 절제, 금욕의 대명사였다. 타이틀에 걸맞게 그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아주 잘 참았다.
그러나 1막이 끝나고 필립 모퍽이 그 조그마한 입으로 그녀의 순결에 대해 떠들어 댈 때, 그의 두꺼운 신경 줄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인내, 절제, 금욕의 상징 노마 디아시 경’은 옛말이었다. 단단히 눈이 뒤집힌 그가 본능처럼 몸을 움직였다.
노마는 사전에 허락받은 호위 기사가 아니라 검을 소지할 수 없었다. 검이 없던 그는 마침 눈에 들어온 한 호위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뺏긴 기사가 눈 깜빡할 새도 없었다.
챙―.
금속 마찰음이 소름 끼치게 고막을 파고들었고, 무도회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검을 빼 든 괴한에게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노마 디아시가 필립 모퍽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이어 결투를 요청한 노마가 가면을 벗어 던졌다. 칼끝은 흐트러짐 없이 필립을 향한 채였다.
깡―.
값비싼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미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본 모두가 천상계 아름다움에 헛숨을 들이켰다.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노마 디아시의 그림 같은 옆태가 보이는 자리에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의 괴한은 노마 디아시가 확실했다. 저 얼굴에 은발은 제국에 둘도 없다.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산뜻한 미모의 노마 디아시는 끈적한 가면무도회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중에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새삼 니콜라스 디아시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노마가 위험인물이 아니란 걸 깨달은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멈췄다. 그들은 그 얼굴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보기 위해 기웃대기 시작했다.
‘디아시’ 사람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 얼굴을 저렇게 구경하다니.
마침내 내 왼 눈썹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넋 놓고 노마를 구경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이는 분명, 잘 짜여진 판에 계획에 없던 노마 디아시가 튀어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거다.
여관 식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마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이면 어쩌나 했는데 그는 매우 화가 나 보일 뿐 멀쩡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내 미간이 더욱 깊숙하게 파였다. 노마는 대단히 분노하고, 동시에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굉장한 모욕을 받은 사람이 그인 줄 알겠다.
그가 평소 사람만 보면 생글생글 웃어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 순하고 꽃 같은 남자로 그를 기억해서 그런지 그런 표정은 의외였다.
아름다운 남자가 제대로 상처받은 얼굴로 ‘목숨을 건 결투’를 요청하니 지목받은 자는 희대의 파렴치한, 악당, 대역죄인이 분명했다.
상처받은 미인의 얼굴엔 그런 효과가 있었다. 필립은 죄가 없어도 있었다. 미인의 얼굴에 먹구름을 끼게 했으니 그걸로 충분히 죄가 많았다.
그의 아름다움에 관중이 얼어붙고, 그의 슬픔과 분노에 그들의 마음도 들끓었다.
나 역시 알 수 없는 전개에 당황하면서도 새삼 잘 꾸며 놓은 노마 디아시의 미모에 뇌가 굳고 말았다. 상처받은 그의 얼굴에 주먹을 쥐기도 했다. 그는 화사하고 하얀 피부 덕에 어두운 색이 잘 받는 것 같았다.
“맥포이 가주님께선 탄타로스에서 나를 구해 주신 은인이시다. 맥포이 가주님께서 내게 두 번째 삶을 주셨으니, 나의 남은 삶은 그분의 것과 다름없다.”
뜻밖에 낭만 문학에서나 보던 내용을 직관하게 된 부인들이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람?’ 하고 흥분했다.
“그분의 명예를 더럽힌 것은 나의 명예를 더럽힌 것과 같다.”
필립이 오줌을 지리거나 말거나, 부인들이 환호를 하거나 말거나. 노마는 단호한 어조로 제 할 말만 계속했다.
“그대에게 명예가 있다면 일어나 답하라.”
결투.
위대한 제국에서 ‘목숨을 건 결투’라 함은 마장 결투를 뜻했다.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맞붙어 단 한 칼에, 한판승을 벌이는 귀족들의 결투였다. 명예와 평판에 죽고 사는 제국 귀족들의 생태가 반영된 비효율의 끝과 같은 문화라 할 수 있었다.
한판승으로 심장을 노리는 것이 규칙이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큰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제국의 기나긴 역사 동안 마장 결투가 실제로 성사된 일은 드물었다.
자연스레 마장 결투는 대부분 귀부인들이 즐기는 문학에서 주로 일어났다. 부인들은 연극이나 글로만 접하던 ‘목숨을 건 결투’에 크게 흥분했다.
“세상에, 결투라니! 귀부인을 위한 결투라니!”
술에 꽤나 취한 한 부인이 흥분해서 외치자 그 옆에 다른 부인이 딴지를 걸었다.
“맥포이 가주가 ‘귀부인’은 아니지 않나? 그녀는 고귀하지만, 노처녀야.”
“그래도! 낭만적이지 않은가!”
“저렇게 아름다운 기사가 여자의 명예를 위해 나서다니, 소설도 이보단 못할 거야.”
“내 평생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부인들이 저마다 낭만적이라며 한 소리씩 할 때, 필립은 완전히 패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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