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패기 하나는 인정해.’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온갖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패트라 랑드라이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딱히 울지는 않았다. 감정에 호소하는 일 없이 담담한 태도를 고수했다. 내 발밑에서 절대 그런 게 아니라며 냅다 오열하는 필립 모퍽보다 확실히 믿음직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녀에게 신뢰가 갔다.
사실 패트라는 직접 단죄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한낱 평민이었다. 이대로 신전 재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퍽 가문은 솟아날 구멍을 찾아 패트라와 사생아의 존재를 묻으려 할 것이다.
모퍽은 이미 궁지에 몰려 있었다. 빠르게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버텨 볼 것인지, 지금이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를 죽일 것인지.
필립이 아니더라도 그의 아버지 모퍽 가주라면 이미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알 터였다. 굳이 내 쪽에서 손을 쓰지 않아도 이대로라면 그녀는 높은 확률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저 약삭빠른 여자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서늘하게 빛나는 패트라의 붉은 눈동자를 보니 자연스럽게 며칠 전 그녀가 건방지게 거래를 제안했던 일이 떠올랐다.
굳이 펜사에 들러 직접 소넷을 잡아 온 이유는 대회의에 참석하러 황도에 가는 김에 필립, 패트라, 소넷을 한 방에 감옥에 처넣기 위함이었다. 날 보자마자 대뜸 기절부터 한 소넷을 마주하기 전까진 그랬다.
겁에 질려 있는 소넷이나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펜사를 보자 맥이 빠졌다. 그녀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까.
패트라를 바로 감옥에 처넣지 말고 자수하게 하자! 맥포이 가주가 간만에 자비를 베푼 게 바로 그날이었다.
조금 번거롭지만 패트라가 제 입으로 아이를 가진 사실과 모퍽의 파혼 요구는 맹약 이행을 피하기 위한 음모였다는 걸 밝힌다면, 내겐 이보다 우아한 방법이 없기도 했다.
내가 직접 단죄하면 널 진단한 소넷도 수사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펜사의 그녀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갈 텐데? 하고 협박하면 아무리 독한 패트라라도 꼬리를 내릴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덜덜 떠는 제 언니를 옆에 끼고 협박하면 패트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악당 같아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소넷과 펜사 여자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면 꼬리 자르기가 필요했다.
적당한 회유도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누가 먼저 배신하냐의 문제이니 더 버텨 봤자 모퍽에게 개죽음을 당할 거, 차라리 그에게 선제공격을 날리라고 속삭였다.
당장 패트라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제 입으로 모든 사실을 밝히고 제국 사교계에서 재기 불능으로 매장된 후, 모퍽 쪽에서 그녀에게 보복을 하더라도 그건 그녀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후계자를 잃은 모퍽 가주가 화풀이로 그녀를 살해하든 말든 그 이상은 내 알 바가 아니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내 손을 잡는다면 최소한 그녀는 혼자 몰락하진 않을 것이다.
“가만 앉아 있다 죽을 바엔 비겁한 필립 모퍽에게 한 방이라도 먹이는 게 낫지 않겠나?”
패트라는 날 보고도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더니, 악의적으로 내뱉는 내 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크루거 부인과 펜사 여자들에게 불똥을 튀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다.”
패트라는 바닥에 옹송그린 채 벌벌 떠는 소넷을 한번 힐끔 쳐다볼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 이것부터 물어봤어야 했군.”
“…….”
“살고 싶나?”
내가 사악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제야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찬찬히 구겨졌다.
“멍청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땐…… 다시 귀족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랬어요.”
딱 한 번. 변명 아닌 변명을 중얼거린 패트라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붉은 눈동자는 침착했다.
“제가 감히 맥포이 가주님께 거래를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무엄하게도 감히 거래를 입에 담았다.
“단순히 저와 모퍽의 죄를 신전에 고하는 것으론 부족하지요. 이 기회에 모퍽과 저를 재기 불능으로 망신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어디까지 진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패트라는 와중에 빠르게 살길을 도모할 줄 알았다.
“제겐 모퍽에게 몇십 년은 회자될 망신을 줄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확실히 오늘 일은 사교계를 넘어 온 제국에 오래도록 오르내릴 것이다.
심지어 티베이 부인의 가면무도회에서 인기 배우라는 패트라 랑드라이의 유명세를 이용했다. 대단한 파급력일 것이다.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패트라 랑드라이를 대신전으로 데려가라. 그녀와 맹약을 맺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노란 가면을 쓴 에리카가 곳곳에 숨어 있던 기사들에게 턱짓했다.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직도 내 발끝에서 허우적대는 필립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모퍽 소가주. 그대에겐 실망이 커. 맹약을 어긴 것을 감추려고 감히 그따위 ‘거짓 추문’을 퍼뜨리다니. 내일 해가 뜨자마자 정식으로 신전 재판을 요청하겠네.”
“아……. 가주님, 그런 게, 그런 게 아닙니다……!”
“왜, 신전 재판 하고 싶다며? 맹약, 이행해야지. 아직 결혼 전이라 다행이야. 그렇지 않나?”
얼굴이 희멀게진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패트라가 아이를 낳으면 신전에서 친자 검사가 이뤄질 것이다. 필립의 친자임이 확인되면 신전의 판단에 의해 맹약이 시행될 것이다.
맹약에 따라 다음 봄이 오면, 모퍽 가문은 필립을 파문하고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게 될 것이다. 필립 모퍽의 일신은 내게 떨어질 것이고, 그 뒤론 저걸 어떻게 구워삶던 내 마음이다.
애타게 나를 부르는 필립을 무시하고 계단 위로 시선을 옮겼다. 높은 곳에 올라가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던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티베이 부인.”
“예, 가주님.”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티베이 부인의 또 다른 신분은 비밀 정보상이었다. 중앙의 모든 중요 정보를 모으는 것, 또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대부분 그녀의 손에서 시작됐다.
“이 무도회의 주인은 그대이니, 오늘 일의 증인으로 부인이 가장 적합하겠군.”
“예. 가주님께 도움이 된다면 저의 영광입니다.”
티베이 부인이 우아한 손짓으로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모퍽 망신 주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녀 역시 이 일로 얻는 것이 많았다.
오늘의 스캔들 덕에 그녀의 무도회는 한동안 인기가 꺼질 일이 없을 것이다. 초대장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그대 저택으로 마차를 보내지. 그리고 에리카는 패트라 랑드라이를 직접 데려가라. 모퍽 소가주가 증거 인멸을 위해 그녀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간이 무대에서 내려온 패트라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맥포이 기사들을 따라 나갔다. 에리카는 내게 눈을 한번 맞춘 뒤 그 뒤를 따라 먼저 회장을 나섰다.
“이럴 순……!”
빠르게 정리되는 상황에 필립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이대로 이 소란을 끝내면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님, 오, 오해십니다. 다 저 요사스러운 계집이 저를 속인 겁니다! 전, 피해자입니다!”
“뭐라는 거야. 애는 혼자 가지나? 패트라 랑드라이가 건국 신화에 나오는 요정도 아니고.”
건국 신화엔 요정의 피를 이은 어떤 가문의 초대 가주가 홀로 수태한 전설이 있긴 했다.
“정말입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가, 가주님의 약혼자가 아닙니까.”
더 들어 줄 가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필립은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파혼을 요구한 편지도 그 미친 여자가 쓰라는 대로 썼을 뿐입니다! 저 악독한 여자가 저를 협박해서……!”
놀랍게도 그는 정말 자신이 명백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단단히 착각 중인 모양인데 맹약을 어긴 순간 그는 배신자였다. 이미 그는 내게 죄인으로, 하나하나 잘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으며 무엇보다 안 궁금했다.
“파혼 사유도 다 그 천한 것의 생각이지, 제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 알고 있다. 이 한심한 놈아.
나는 귀를 후비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눈치껏 맥포이 가주가 가는 길을 열었다. 필립이 멀어지는 내 등에 대고 절박하게 외쳤다.
“저, 저는 맹세코 가주님께서 광신도들과 놀아난 것을 파혼 사유로 삼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좌중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놀랍게도 필립은 추문을 사실인 양 떠들고 있었다. 추문은 어디까지나 더러운 ‘소문’, 낭설이었다.
즉, 떠들 자리를 가려야 했다.
하물며 대귀족의 면전에 대고 그와 관련된 추문을 입에 올린 사람은 그 자리에서 혀가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필립이 방금 지껄인 건 그야말로 미친 소리였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았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필립은 그저 내 발걸음을 멈춘 것에 만족하는지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필립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퍽 아슬아슬해 보이는 몸짓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질겁을 하며 멀어졌다.
순식간에 나와 필립을 가운데 두고 관중이 빙 둘러싼 모양새가 되었다. 내 기사들이 그 앞을 막아서며 재빠르게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가주님께서 떳떳한 몸이 아니셔도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그 평민 계집이 신분 상승에 눈이 멀어 가주님과 제 사이를 이간질한 겁니다.”
필립은 순결을 잃은 신부를 내치지 않는 ‘너그러운’ 약혼자를 자처하면 내가 감동이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이다.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놈을 상대하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눈앞이 아찔했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비난을 받아 돌아 버린 게 분명했다. 아니면 어색함을 못 이겨 연거푸 마셔 댄 과실주에 제대로 취했거나. 맨정신으로 저럴 순 없다.
쉴 틈 없이 흐르던 악기 소리도 어느새 멈춰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석상처럼 굳은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는 가주님께서 순결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그 계집 말을 듣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정작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을 눈치가 없었다.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방긋 웃자, 식은땀을 닦아 대던 필립이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잘했다. 개쓰레기 자식.’
시키지도 않은 자폭을 한 필립 모퍽에게 잘했다고 웃어 주었을 뿐이다. 호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다시 등을 돌렸다. 당황한 필립이 나를 향해 팔을 뻗을 때였다.
챙―.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동시에 다수의 비명이 터졌다.
‘검?’
검을 뽑는 소리가 분명했으나, 무도회는 기본적으로 무장 금지였다.
내 기사들이 검을 차고 있었던가?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
검을 뽑아 든 건, 내 기사들이 아니었다.
웬 남자가 필립의 목덜미에 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투명한 은발과 대비되는, 짙푸른색에 보라색 자수가 인상적인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흰 가면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날카로운 턱선, 커다란 키와 벌어진 어깨에서 미남자의 기운이 강하게 흘렀다.
그 실루엣은 어째 익숙했으며, 돌아가는 꼴이 마치…….
어쩐지 카탐으로 향하다 들른 여관 식당에서 노마 디아시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렸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말했다.
“내 은인을 모욕하다니 기사로서 참을 수 없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움츠러들게 하는 음성이었다. 항상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누군가와 너무 달랐으나, 저 목소린―.
몹시 익숙한 목소리에 입이 쩍 벌어졌다.
“디아시의 노마가 모퍽의 필립에게 목숨을 건 결투를 요청한다.”
노마는 오늘 낮에 막 성기사를 그만두었지만, 검을 뽑기 위해 뻔뻔하게 굴었다.
“아……! 아, 악……!”
별안간 목덜미에 검이 겨누어진 필립이 오줌을 지렸다.
디아시의 노마라니. 노마 디아시? 무도회 손님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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