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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61화 (61/139)

61.

이리 끼지도 저리 끼지도 못하고 있던 필립은, 어느 때보다 패트라가 반갑게 느껴졌다. 멍청한 그의 머리는 잠시 상황에 따라 그녀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필립은 역류하는 연어처럼 펄떡거리며 무도회장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는 그는 밀어닥치는 인파에 쉽게 밀쳐졌다.

필립이 한번 크게 휘청거린 사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어? 어디 갔지? 분명 저 앞에 있었는―.’

입구에서 쏟아진 손님들이 문 앞에서 얼쩡대는 그를 한껏 째려보고 지나갔다. 필립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사람은 너무 많았고, 드디어 찾은 패트라를 순식간에 놓치자 조급증이 일었다. 그는 참을성도 없어서 조금만 일이 잘못돼도 어쩔 줄 모르곤 했다.

습관처럼 정신 사납게 손톱을 물어뜯으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탁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약한 공황에 빠졌던 필립이 부산하게 어깨를 푸덕거리며 뒤를 돌았다.

계절을 잊은 듯이 팔이 다 드러나는 짧은 소매, 목과 가슴 부근이 시원하게 파인 보라색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맥포이의 색.’

지은 죄가 많은 필립은 순간 맥포이 가주를 마주쳤다는 착각에 빠져 숨을 헐떡였다.

“저런. 많이 놀랐어요?”

눈앞의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정신 차리라는 듯이 필립의 눈앞에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살갗이 훤히 비치는 은은한 보랏빛 장갑이 그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안녕, 내 사랑.”

“아…… 아.”

하얀 반가면 아래,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입꼬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필립은 빠르게 안심했다.

“패, 패트라. 놀랐잖아.”

그를 잡은 이는 패트라 랑드라이였다. 바짝 궁지에 몰렸다가 패트라를 보니, 최근 그녀가 자신을 괴롭게 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갔다.

“어딜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날 찾았나요?”

“말이라고!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기다리다가 죽을 뻔했어. 오늘은 사람도 너무 많고…….”

필립이 패트라의 허리를 덥석 낚아채며 징징거렸다.

“……어머.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나요? 저는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내 사랑은 모르는 게 없네요.”

이미 무대가 시작된 듯 패트라의 말투는 연극 조였지만, 필립은 그저 그녀의 음성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욱 사랑스러운 것만 같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당신과 영원히 이렇게 안고 있고 싶지만, 슬프게도 난 이제 그만 무대를 준비하러 가야겠어요. 오늘은 오랜만에 제가 주인공이거든요.”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그랬다면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

“공연할 극이 갑자기 바뀌어서 말할 시간이 없었지 뭐예요.”

“그래? 당신이 주연인 연극이라면……. 일전에 그 건국 신화 이야기인가?”

“아뇨, 필립.”

휘휘 고개를 저은 패트라가 필립을 더욱 꽉 안으며 속삭였다.

“사랑. 사랑 이야기예요.”

그러곤 미련 없는 동작으로 필립에게서 떨어진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필립은 그런 그녀에게 오랜만에 두근거림을 느꼈다. 지금 제 눈앞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상냥하고 아름다운 패트라’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어요. 알았죠? 극이 시작되기 전에, 내 시중을 드는 아이가 당신 자리를 알려 줄 거예요.”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 필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베이 부인으로 보이는, 붉은 가면을 쓴 여자의 환영사를 끝으로 지체 없이 연극의 막이 올랐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패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환호했다. 굳이 맥포이의 색을 입고 무대에 오른 그녀를 보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은 어느 부유한 상인의 외동딸, ‘안네마리’였다. 그녀에겐 부모님이 정해 준 친절한 약혼자가 있었다.

약혼자 역을 맡은 또 다른 배우가 등장했다. 그는 왼 가슴에 자수정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패트라 위주로 극을 보던 필립은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필립은 패트라가 사랑 이야기라고 했으니, 당연히 안네마리와 그 약혼자의 사랑을 다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극은 시작부터 막장극으로 돌변했다.

안네마리가 뒤를 돌면, 약혼자는 아름다운 내연녀와 수위 높은 애정 행각을 벌였다.

가면무도회에서 펼쳐지는 공연의 묘미는 예법을 신경 쓰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며 볼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가면을 쓴 관중들은 약혼자와 내연녀의 대담한 행동이 나올 때마다 소리쳤다.

“바보 같은 안네마리, 뒤를 보라고!”

“불쌍한 안네마리, 개잡놈 같은 약혼자 같으니라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사람의 반이 불륜 행각을 벌이는 중이었지만, 그들은 극에 잔뜩 몰입해 약혼자를 향해 욕설을 지껄였다. 물론 개중엔 대인배인 양 풍자로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에 맞춰 필립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그는 관중의 격한 반응을 틈타 자신의 옆에 어느새 다른 사람이 섰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혼을 두 달 앞두고 약혼자와 그 내연녀 사이에 급기야 아이가 생겼을 때는, 여기저기서 거친 욕설과 야유, 호통이 터졌다.

“미쳤군! 도대체 누가 이런 저급한 극을 쓴 거지?”

“미친 거 아니야? 끔찍하군! 나라면 목을 졸라 죽여 버렸을 거야!”

누군가 잔뜩 격앙된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필립의 얼굴이 완전히 희게 질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연극일 뿐인데,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인데……. 필립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약혼자와 내연녀가 만나 은밀히 속삭였다. 약혼자가 노래하길 실은 안네마리의 재산이 탐나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그녀에게 ‘맹약’을 했다며, 그녀를 배신한 걸 들키면 자신은 목숨을 잃는다고 오열했다.

관중석에서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약혼자가 철저하게 벌받기를 원했다.

필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곧장 제 뒤에 선 노란 가면을 쓴 여자를 밀치고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종잇장 같은 그의 몸으론 그녀를 밀어 낼 수 없었다. 작은 실랑이에 순식간에 그에게 시선이 쏠렸다.

모두가 저를 향해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필립은 재차 그 틈을 비집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필립의 뒷목을 잡아챘다. 얄팍한 그가 힘없이 끌려갔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기 무섭게 그의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나? 일어나.”

“…….”

필립 모퍽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감히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놓칠 생각인가? 일어나라고. 자, 이다음부터가 진짜 재밌으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필립은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어나라는 말을 따라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로 서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원래도 썩 기능이 좋지 않은 그의 머리통은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더 이상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편안한 인생을 살아왔던 필립은 지금 이 순간이 꿈속인 것만 같았다. 제게 이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연극은 계속되었다.

약혼자와 그 내연녀는 아이가 생긴 것을 안네마리에게 들키기 전에 그녀와의 혼약을 파기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은, 더러운 추문을 만들었다. 추문은 곧 사실로 여겨졌다.

약혼자는 보는 사람 마음이 절절해지도록 상처받은 남자를 연기하다, 내연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천박하게 웃었다.

시끌벅적하게 한마디씩 감상을 던지던 관중들이 숙연해졌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자들도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연극이 아니라는 건 바보도 눈치챌 수 있었다.

1막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안네마리는 마녀 취급을 받고 성에서 쫓겨났다. 그 장면은 처절하고 안타까우며 잔인했다.

안네마리로 분한 패트라는 그녀 인생 최고의 연기를 뽐냈다. 패트라의 인생 연기에도, 더 이상 극을 보며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정확히 필립을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들은 필립의 가슴팍에서 빛나는 브로치와 약혼자를 연기한 배우의 가슴팍을 번갈아 보며 수군댔다.

그사이,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성에서 쫓겨난 안네마리가 숲에서 정신을 잃는 것으로 마침내 첫 번째 막이 끝이 났다.

“아니야, 아니야……! 저렇게까진, 저럴 생각은. 그래,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난 그저 다들 떠드는 추문을……!”

필립이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열연을 펼친 패트라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필립은 시뻘건 눈을 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런 그녀를 노려봤다.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패트라가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녀의 얼굴이 낱낱이 드러나자 세상에, 어머나!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극을 맥포이 가주님께 바칩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패트라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회장에 메아리쳤다.

술렁임은 더욱 커져 일순 파장이 일었다.

필립의 머리통이 부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패트라와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얼굴 전체를 가린 하얀 가면 때문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필립은 그제야 회장의 입구에서 봤던 보라색 드레스의 주인이 패트라가 아니라 지금 제 옆에 서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감에 눈물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그때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한 발짝 무대로 다가섰다. 좌중에 삽시간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있다더니. 그래서, 할 말은 이게 전부인가?”

그렇게 말한 여자가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어 던졌다. 깡, 사정없이 내던져진 가면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가, 가, 가주……. 가주님, 가주님…….”

아예 바닥에 주저앉은 필립이 내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죽어 가는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이건 뭐, 내가 악당처럼 보였다.

‘애초에 내게 덤빌 때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필립 모퍽의 머리가 꽃밭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인생에 이렇다 할 풍파가 없었으니 제 인생이 비참해질 수 있다는 상상도 못 해 봤을 거다.

쯧, 재수 없기는. 나는 거칠게 드레스 끝단을 털어 필립을 떨쳐 냈다.

“매, 맥포이 가주!”

때마침 내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가 외쳤다. 동시에 곳곳에서 경악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리 가주님이 연기라니.’

오직 필립 모퍽의 뒤에 서 있던 에리카만이 노란 가면 뒤에서 이를 악물고 웃었다. 술렁임이 잦아들 즈음,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와 모퍽 소가주의 죄를 네 입으로 고하는 이유가 뭐냐.”

“필립 모퍽은 결국엔, 제 아이를 가진 저를 죽일 테니까요.”

“아니야!”

다시 한번 좌중에 경악에 찬 비명이 터졌고, 필립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닥쳐, 이 망할 년! 천한 입을 어디서 놀리는 거야! 안 닥쳐? 그 입 찢어 버리기 전에 다물란 말이야!”

“내가 네 말을 어찌 믿냐.”

나는 그러면서 징그럽게 일그러진 필립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몹시 재미나다는 듯한 내 표정에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내 약혼자를 믿는데. 네가 내 약혼자를 엿 먹이려고 꾸민 짓일지 누가 알아.”

직전의 연극보다 맥포이 가주와 패트라의 대화에 더 몰입한 관중들은 필립과 함께 숨을 죽였다.

“저 역시 가주님께 맹약을 하겠습니다.”

내 입꼬리가 길쭉하게 늘어졌다.

“제 배 속의 아이가 모퍽 소가주의 아이가 아니면, 가주님께 목숨을 내놓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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