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아까부터 되게 시끄럽네. 자네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또 여기 있나. 그렇게 한가해? 진짜 요즘 일 제대로 안 할래!”
“장갑은, 아이 씨! 일단 그건 아니야! 일단 빼 봐.”
“뭐가 아니야, 이게 진짜 미쳤나.”
살이 훤히 비쳐 보이는 장갑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가노가 급기야 내 손에서 장갑을 벗기려는 사람처럼 달려드는 통에, 나는 정색을 하며 손을 뒤로 뺐다.
“진짜 거길 가야겠다면 차라리 나도 데려가든가! 어차피 가면무도회잖아.”
“이 미련퉁이가!”
결국 내가 호통을 쳤다. 에리카는 옥신각신대는 나와 가노를 따분한 얼굴로 바라보다 귀를 틀어막았다.
실랑이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가노의 덩치는 너무 눈에 띄었다. 그는 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육체의 소유자라 안 그래도 얼굴보다 그 몸매로 더 많이 인식되곤 했다.
덕지덕지 붙은 성난 근육과 바다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는 가면을 쓴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다.
그걸 제일 잘 아는 놈이 말이야. 나는 성질대로 장갑을 빼 그의 얼굴에 패대기쳤다.
“사람들이 자네 덩치를 퍽이나 못 알아보겠다!”
“아!”
얼굴로 장갑을 받아 낸 가노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흐물거리는 장갑 따위,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이었다.
“성질 안 죽여! 어디서 그 덩치를 하고 땡깡인가! 바빠 죽겠는데 옆에서 일일이 잔소리나 하고 말이야.”
봐주지 않고 삿대질을 하는데, 그는 와중에 내가 던진 장갑을 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하여간 미친놈. 그 꼴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젓던 나는 상자 쪽으로 팩 다시 몸을 돌려 버렸다.
“아무래도 도그만 경 역시 나이 때문에 눈에 띄어 호위로는 평기사들만 입장할 겁니다. 가노 님은 삭발이라도 하시면 모를까, 그 붉은 머리칼부터 너무 눈에 띕니다.”
귀에서 손을 뗀 에리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노는 도움이 안 된다는 듯이 그런 에리카를 노려봤다.
나는 그런 그에게 쓰읍, 경고를 보냈다.
“눈 안 까나?”
가노가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그가 왜 여기서 지랄인가 하면―.
소넷의 뒤가 구린 것을 감지한 그가 한발 늦게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와 동선이 겹쳤기 때문이다.
무려 직접 촌구석 펜사까지 기어들어 온 가노와 길에서 딱 마주친 내 심정이란. 펜사에서 그를 마주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그를 본 내 첫마디는 ‘할 일이 없니?’였다.
할 일이 없을 리가. 가노는 할 일이 아주 많았다. 황도에 간다길래 그곳에 일이 있으니 간 김에 직접 일을 지시하는 정도라고 생각했지……, 웬걸.
장사치에게 시간은 금이고 타이밍은 생명인 것을. 내 경우 황도로 가는 길에 겸사겸사 펜사를 들른 것이었으나, 그는 아주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이미 소넷 쪽에 볼일은 끝났겠다 가노가 펜사를 더 들추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대로 그를 잡아다 황도에 함께 도착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실은 정원 뒷문에서 그렇고 그런 기류가 흐른 채 헤어지고 나서, 가노가 어색하게 느껴져 조금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평소와 같았다. 펜사에서 마주친 그는 여느 때처럼 저돌적으로 들이댔고, 맹렬하게 치대 왔다.
평소의 가노였다. 달라지지 않은 관계에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물론 이게 그의 배려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내내 말을 아끼던 에리카가 결국 퍽 불만스럽다는 듯이 한 소리 얹었다.
“확실히 이 방법은 저나 가주님 머리에서 나온 것보단 파급력이 크긴 하겠지요. 하지만 가주님께서 나서야 한다는 게 별로입니다. 가노 님 말이 틀리지 않은 게, 가주님께서 직접 상대할 가치가 없는 치들이니까요.”
“실컷 놀아 본 가노 머리통에서 나와도 이것보다 효과적인 망신 주기는 없을 것 같은데.”
“……요즘엔 그렇게 논 적 없어.”
갑작스러운 봉변에 가노가 시답지 않게 부정했다. 어쩐지 필사적이라 조금 웃음이 나와 그를 놀리듯 물었다.
“그렇게 노는 게 뭔데.”
“……하.”
정원에서 나를 골탕 먹인 복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쐐기를 박았다.
“자네한테 가면무도회 정도는 유치하겠군.”
불리한 과거사 이야기에 줄곧 시끄럽던 가노가 드디어 조용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방에서 나가진 않았다.
가노는 오래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들러붙었다.
“따로 입장하면 되잖아. 날 알아보더라도 당신이 가면무도회 따위에 간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진짜 오기만 해.”
그런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쓰읍, 경고를 보냈다. 나의 철벽에 그가 또다시 와작 인상을 구겼다.
“자네에겐 다른 중요한 일을 맡길 거니까 허튼 생각 말아.”
“또 날 멀리 보내 버릴 생각이구나?”
“자네밖에 못 하는 일이야.”
진한 눈썹을 찡그린 채 비아냥대던 가노는, 자네밖에 못 한다는 말에 금세 두 눈을 반짝였다.
“메르케시 로덴시.”
“2황녀?”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군.”
“출궁한 2황녀에겐 사람을 이미 붙여 놨잖아. 그 여자는 갑자기 왜?”
그러곤 그는 미간을 조금 모으고 말을 골랐다.
“그 황녀는…… 미쳤잖아. 왜 찾지?”
그 딴에 최대한 상스럽지 않은 표현을 찾은 듯했다.
“그래, 그렇게 알려져 있지. 모자라고, 미쳤다고. 그런데 내 생각엔.”
그렇게 말하는 내 입매가 올라갔다.
“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더군.”
불량한 자세로 벽에 기대서 있던 가노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움직일 마음이 들지 않나?”
“그건 제법…… 흥미롭네.”
몇 년 전, 황궁을 나간 2황녀는 제국을 아주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해로를 통해 서쪽의 크고 작은 왕국과 왕래하는 가노라면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쪽에서 눈치채지 않게 정말 제정신인지부터 확인하지. 아마 제정신일 텐데 그녀를 찾는 게 쉽진 않을 거야. 황후가 보낸 사람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고.”
빌리넌트가 내 예상보다 빠르게 대회의에 나왔다. 빠르면 10년 안에 권력 교체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황제가 신체 건강하다 보니 어쩌면 몇십 년에 걸쳐 천천히 권력을 이양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말 많고 탈 많은 ‘로덴시 황가’의 움직임을 살필 때는 맞았다.
1황녀 칼리페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어언 11년 전. 멍청한 황자 빌리넌트가 열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황태자로 책봉된 것이 7년 전.
칼리페시가 죽은 후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던 2황녀가 황궁을 나간 것도 7년 전으로, 빌리넌트가 황태자가 되었을 때였다.
두 황녀가 첫 번째 황후 소생이라면, 빌리넌트는 황제가 첫 번째 황후 사후에 들인 두 번째 황후의 소생이었다.
제국법엔 여자가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 없다. 갑자기 죽은 언니, 배다른 남동생과 계모. 기반이랄 것이 없는 2황녀 입장에선 미친 척하고 빠져 주는 것이 편히 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을 테다.
물론 메르케시가 실은 모자라지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오필리아와 밤>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 미치지 않았다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로덴시 황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황제란 여전히 이 거대한 제국의 정점이었다.
목숨 부지하는 데 성공한 메르케시는 그걸로 만족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메르케시 역시 그 ‘로덴시’ 아닌가.
격변의 시기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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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황도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가면무도회는 단연 티베이 부인의 가면무도회였다.
티베이 부인은 동부 대귀족 출신으로, 중앙 귀족 티베이 가문에 시집을 와 서른 즈음에 과부가 된 유명인이었다.
맥포이 가주가 기상천외한 가십거리의 중심에 있다면, 티베이 부인은 온갖 치정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과부였고 사람을 홀리는 말재주와 높은 안목을 가졌다. 모두 그녀와 이야기해 보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런 티베이 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엔 언제나 사람이 몰렸다.
특히 대놓고 떠들진 않아도 황도 귀족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은밀한 초대’를 받고 싶어 했다. 그녀더러 나댄다거나, 사람을 홀리는 마녀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그 은밀한 초대장을 받기 위해 기꺼이 돈을 퍼부었다.
그런고로 티베이 부인이 취미 붙인 것들은 황도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취미 중 하나가 바로 ‘가면무도회’였다.
그녀의 가면무도회는 압도적인 규모, 화려하고 다양한 무대와 이벤트로 유명했다. 매일 색다른 자극을 쫓아 떠돌아다니는 귀족들에게 안성맞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초대장’은 이제는 그 유명세 덕에 부르는 것이 값이었으며, 초대장만 가졌다면 평민도 들어갈 수 있다.
가면무도회의 취지가 처음부터 불순했던 것은 아니다. 본래는 지식 교류의 장이었으며, 가면 역시 신분의 격차 없이 누구나 지식을 논하자는 의도로 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술과 어두운 조명, 늦은 시간, 긴장이 풀리는 향기, 남녀가 한데 모여 있다 보니 의미는 빠르게 변질되었다.
‘티베이의 가면무도회’는 어느새 관능적인 파티가 되었고, 암묵적 룰이 있다곤 하나 모든 소문의 시작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보라색……. 보라색…….’
하얀 가면을 쓴 필립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 같지? 분명 초대장 수는 정해져 있을 텐데. 기분 탓인가.’
와중에 다 아는 사람들로 한가득이었다. 가면을 썼다고 하나 알아보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매일같이 출석하는 귀족들이야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반은 필립이 패트라와 참석한 것처럼 ‘애인’을 대동한 채였다. 노골적으로 의상과 장식의 색을 맞춘 것으로 충분히 누가 누구의 밀회 상대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패트라가 골라 준 자수정 브로치를 왼 가슴에 찬 필립은, 벌써부터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떠들어 대는 사람들 틈에서 과일주를 홀짝이며 눈을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눈알을 굴려도 패트라가 보이지 않았다.
인기인이라도 되는 듯 파티란 파티는 죄다 참석하는 주제에, 필립은 말솜씨도 붙임성도 모자라 패트라 없이는 자연스럽게 무리에 스며드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녀가 없으면 좀처럼 대화에 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아직 안 왔나? 그럴 리가 없는데…….’
패트라는 보통 가장 먼저 와서 친한 귀부인들을 하나씩 찾아가 눈도장을 찍곤 했다. 그녀가 평소보다 너무 늦다는 생각을 할 때, 벌컥 회장의 문이 열리고 방금 도착한 무리가 우르르 밀려들어 왔다.
그러나 그중에도 보라색은 없었다. 필립은 어색하게 서서 과실주만 몇 잔째 홀짝였다.
‘내가 이렇게 애타게 보라색을 찾게 될 줄이야.’
최근 자신을 아주 힘들게 하는 맥포이의 색이나 찾고 있자니, 제 처지가 우스워 실소가 조금 터지기도 했다.
그때 또 한 무리가 도착했는지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필립은 이번에야말로 패트라가 왔나 해서 또다시 바쁘게 눈알을 굴렸다.
빼곡히 공간을 채우는 인파, 조금씩 오르는 술기운. 어쩐지 무도회장에 울리는 고풍스러운 연주가 격렬하게 치닫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아, 패트라다.’
마침내 문으로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턱까지 가려지는 흰 가면을 쓴 여자의 드레스는, 분명 오늘 낮에 패트라가 보여 줬던 그 드레스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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