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성기사단은 얼마든지 경을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콜린스가 순수한 걱정과 사심을 담아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성기사단장이 되었을 노마 디아시가 사라지며 그 자리에 오른 콜린스였지만, 그는 기사로서 노마 디아시를 존경했다. 그는 노마가 마음을 추스르고 때가 되면 당연히 성기사단에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노마는 연신 살랑살랑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말했다시피,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야. 마음을 정한 지 꽤 되었어.”
“하지만 디아시 경.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당연히 혼란스러울 테지.”
“맞아. 나는 분명 아직 불안정한 상태가 맞아.”
“그래, 경. 그러니 천천히―.”
“하지만 성기사는 은퇴야. 겸직할 수 없는 일이거든.”
노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겸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다른 계획이 있나? 하는 얼굴을 한 콜린스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노마는 그런 그에게 살풋 미소를 띠곤 수줍게 말했다.
“내가, 야망이 있더군.”
“자네가 야망…….”
콜린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든 말든 노마는 네가 들은 게 맞다며 친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랐네. 내가 이리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은.”
“자네가 욕심…….”
결국 미간을 완전히 찡그린 콜린스가 또다시 홀린 듯이 중얼댔다. 그러면서 어쩐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노마의 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노마 디아시가 설마 장난을 치는 건가?’
그도 그럴 게 금욕주의의 의인화 같은 남자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거니와, 노마는 애초에 저런 이야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기억 속 그는 분명, 자기 이야기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 배신당한 충격이 너무 컸나? 그 노마 디아시가 정말 미쳐 버렸나?’
12년 만에 만난 기사단 동기가 저를 보며 심각하게 고민을 할 때, 노마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야망을 떠올렸다.
‘내 야망이야 엄청나지. 맥포이의 부군은 아무나 못 하니까.’
노마가 황도에 급히 온 이유는 하나. 성기사직에서 은퇴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몸은 아직 공식적으로 신전에 묶여 있었다. 니콜라스 디아시가 극구 그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아 임무 중 행방불명 처리되었기 때문이었다.
맥포이 가주 부군이 되려면 응당 맥포이 성에 머물러 성의 살림을 도맡을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주로 중앙의 대신전과 동부의 성지에 머무는 성기사를 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부엔 주둔하고 있는 성기사단이 없기도 했다.
노마는 깔끔하게 은퇴를 선택했다.
물론 성기사로서 명예와 긍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저더러 ‘이제 자유이시니 하고 싶은 거 하셔도 되지 않냐’고 했던 말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냥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맥포이 성에 방문한, 일주일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노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음을 깨닫고 소중히 간직하는 걸론 만족할 수 없다. 아주 옆에 있고 싶다.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섰으면 한다.
그렇다면 부군 자리밖에 없지 않은가?
그 자리는 쉽게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미 꿰차고 있는 자가 있었다.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때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은퇴는 당연했다. 노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짐짓 의미심장하게 미간을 모았다.
마찬가지로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노마를 보던 콜린스는, 고민에 빠진 아름다운 피조물을 앞에 두고 새삼 정신 줄을 다잡아야 했다.
더군다나 그 입에서 야망이라니. 금욕주의의 상징과 같은 노마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의미심장한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욕심이 너무 크군. 그만큼 얻기 어려운 자리라 은퇴를 번복하는 건 어렵겠어. 이해해 주게.”
자네 도대체 무슨 자리를 말하는 것인가? 하고 물으려던 콜린스는 사뭇 비장한 노마의 얼굴에 또다시 하려던 말을 잃었다.
그는 자포자기하거나 미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콜린스가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형형했다.
그때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한 노마가 몹시 바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은퇴식은 필요 없어. 이대로 바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
훌쩍 성기사단장실을 나가던 노마가 뒤를 돌아보며 산뜻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엔 생기가 넘쳐흘러서, 콜린스는 얼떨결에 고개나 끄덕이고 말았다.
“디아시 경. 역시, 다시 생각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느새 노마 뒤에 바짝 붙은 호위 기사 폰 바인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그에게 용기 내 말했다.
“그저 ‘노마 님’이면 된다.”
그러나 폰이 기대하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마의 대답은 즐겁게까지 들렸다.
‘디아시 경’을 존경하는 폰 바인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노마의 어마어마한 야망에 대해 들은 바 없는 그는 걱정이 앞섰다.
‘정말 무슨 생각이시지? 성기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걸 이렇게 쉽게 때려치운담. 대체 앞으로 뭘 하시려고 그러지? 가주님과 밀란 공은 이 사실을 아시나?’
고작 호위인 자신도 이렇게 그의 앞날이 걱정되는데, 정작 노마는 몹시 가뿐해 보일 뿐이었다.
폰은 결국 노마 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겠거니 할 수밖에 없었다. 해탈한 그가 무념무상으로 노마의 뒤를 따라 대신전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디아시 경?”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노마를 불러 세웠다.
“스탕 부인.”
황도와 카탐을 잇는 롬닥의 책임자, 엑트라 스탕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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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대신전. 뭔 놈의 계단이 이렇게 많은지.’
시종의 도움을 받으며 빼곡한 대신전 계단을 내려가던 엑트라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욕설을 짓씹었다.
그나마 내려가는 건 나은 편이었다. 오르는 건 더 힘들어서 늙은이들은 대신전에 오지 말라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물론 신전에 뇌물을 보내는 입장이긴 했지만,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먹는 것도 그렇고…… 하여간 괘씸한 놈들이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던 엑트라는, 반대로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 등 너머를 구경하는 것을 발견했다.
무얼 보는 거지? 하고 뒤를 돈 그녀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디아시 경?”
자연광 아래에서 유독 빛이 나는 남자는 카탐에서 흐지부지하게 헤어졌던 노마 디아시였다.
“스탕 부인.”
엑트라를 알아본 노마가 반갑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순간 엑트라는 강력한 햇살을 마주한 것과 같은 눈부심을 느꼈다.
“세상에, 디아시 경! 이게 얼마 만인가요, 여기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설마 황도에 계실 줄이야!”
눈부심에 지지 않고, 엑트라는 열심히 내려온 계단을 와다다 다시 오르며 외쳤다. 이렇게 우연히, ‘오늘 같은 날’에 노마 디아시를 마주치다니! 이건 정말 운명 아닐까 싶었다.
노마는 그런 엑트라를 저지하며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순식간에 엑트라 앞에 선 노마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부인, 계단에서 급히 뛰시면 위험합니다.”
“어머나. 경은 여전히 멋지시군요.”
“부인께서도 여전히 멋지십니다. 대신전엔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도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황급히 노마 뒤에 따라붙은 폰은 ‘방금 은퇴하셨으면서 뭘 도와?’ 라고 생각하며 그의 뒤통수를 남몰래 흘겨봤다.
“경께선 어쩜 이리 하시는 말마다 고우신지 모르겠습니다. 저야 롬닥 일로 왔는데, 마침 방금 용무가 다 끝났습니다.”
엑트라의 임무 중 하나는 대신전에 정기적으로 뒷돈을 넣어 주는 일이었다. 사원도 아니고 무려 대신전에 뒷돈을 넣는 일이라, 아랫사람을 거치지 않고 그녀가 직접 처리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녀는 태연히 화제를 끝냈다.
“그러시군요. 마차는 있으십니까?”
“예. 이 계단 끝에 바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부인을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엑트라는 그 말에 화색을 띠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폰은 속으로 ‘아, 또!’라고 외치며 도리질을 쳤다.
황도와 카탐을 잇는 담당자 엑트라는 오늘 아주 바빴다. 롬닥 일로도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가주님의 명으로 비밀리에 물건 몇 개를 옮기는 중이었다.
덕분에 엑트라의 마차는 지금 짐으로 가득했다. 그녀 한 명이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라 짐마차가 따로 없었다.
그녀의 마차 상태를 본 노마는 당연히 엑트라에게 제 마차를 함께 타고 가시라 권했다. 엑트라가 노린 바였다.
냉큼 마차를 얻어 탄 엑트라는 황도 번화가 중 하나인 덴바 거리까지 가 달라 부탁했다. 황도에서 가장 활기찬 그곳엔 롬닥 상단의 건물이 있었다. 황성과 붙어 있는 대신전에서 다소 멀어 마차로 꽤 달려야 하는 거리이기도 했다.
덕분에 화기애애하게 노마와 이야기꽃을 피우던 엑트라는 그가 황도에 오기 전 맥포이 본성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듣고 순간 기쁨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밀란 디아시를 필두로 디아시 가문이 사절단을 꾸려 맥포이 성에 방문했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디아시 경이 있었다니!
‘웬걸. 수줍음을 타시는 줄만 알았더니 아주 대담하시지 않은가. 무엇보다 요양 중이라 알려진 디아시 경이 직접 맥포이 본성에 가셨다는 건…….’
그녀는 광대가 솟아오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무나 붙잡고 경사 났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건 굳이 물을 필요도 없다. 디아시 경은, 우리 가주님께 마음이 있는 것이 확실해!’
엑트라 스탕은 매우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상황 판단력이 역시 뛰어났다. 잠시 팽팽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제 무릎을 탁 쳤다.
‘잠깐. 이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모퍽을 치우면서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디아시 경을 앉히기 딱 좋지 않나?’
그녀는 제 마차에 가득 실린 짐들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생각만 해도 피식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엑트라가 가주님께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다.
“디아시 경. 혹시 가면무도회에 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노마는 그저 시시각각 변하는 엑트라가 마냥 재미있었다. 뜬금없는 질문으로 보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저 즐거운 마음에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엔 경께선 보라색도 잘 받으실 것 같군요!”
흥분한 듯한 엑트라가 확신에 가득 찬 투로 외쳤다.
“네. 보라색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노마에, 엑트라의 가슴이 끝도 없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지금 노리고 말씀하신 게 분명하지? 가주님은 몰라도 디아시 경은 지금, 우리 가주님과 로맨스를 하고 계신 게 맞지?’
엑트라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흠, 흠 헛기침을 뱉곤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지. 가주님 부군 찾기는, 가신 된 자로서 사명 아니겠는가!’
심호흡까지 한 엑트라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 경께선, 탄타로스에서 살아 돌아오신 저희 가주님께서 어떤 추문을 겪고 계신지 아십니까?”
그녀는 방금까지 온갖 푼수를 떤 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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