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하핫! 나만 아는 소식인 줄 알았더니, 이거 온 제국 사람이 아는 모양이군!”
“모퍽이라고 하면 대회의에 발도 못 붙인 지가 수십 년인데! 창피한 일이지, 암. 나라면 수치스러워 황도 땅도 못 밟을 걸세!”
“그 악독한 여자를 모르나? 롬닥의 이익을 결정짓는 자리에 그 여자가 빠지겠어? 그 여자라면 지옥에 빠져도 부득불 참석할 걸세!”
“흥, 귀족이 상단이나 차리고 말이야. 어쩌면 이게 전부 귀족 망신을 다 주고 다닌 대가 아니겠나?”
모두가 맥포이 가주의 참석 여부를 두고 한마디씩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탄타로스와 관련된 맥포이 가주의 너저분한 추문은 이미 기정사실이기도 했다.
추잡한 수다 속에서, 오직 북부의 노턴 가주만 불쾌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노턴 가주는 아치 맥포이의 외삼촌이자 아이사 맥포이의 죽은 새언니인 록시의 오빠였다. 맥포이가의 사돈이자 오랜 우호 관계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살아 있긴 한 건가? 황제 폐하를 알현했다지만, 그 외엔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 않나!”
“그도 그렇군! 폐하를 알현했다는 것도 그저 맥포이의 공작일지도 모르지. 디아시 가문과 사절이 오간 일도 눈속임일지 누가 아나?”
맥포이 가주가 살아 돌아왔다고 한 지가 꽤 되었는데, 이 중 맥포이 가주를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실은 정말 그때 죽은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혹,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나?
그들은 어느 쪽도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맥포이 가주의 참석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 웅성거림이 점차 커질 때쯤, 어린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디아시 가주 대리께서 드시오!”
밀란 디아시의 입장에 신나게 웃고 떠들던 가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했다.
오늘도 엄숙한 그가 대회의장에 들어서자, 장내엔 무안한 헛기침 소리만 연신 들렸다. 그는 그런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죽음 같은 침묵이 불편해 저마다 눈치를 보는데 때마침 시종 아이가 다시 소리쳤다.
“맥포이 가주께서 드시오!”
밀란 덕에 한껏 엄숙해진 분위기 속, 소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욱 우렁차게 대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어린 시종 넷이 달려들어야 열리는 거대한 문짝이 양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짧은 시간, 밀란 디아시가 등장했을 때보다 긴장감이 흘렀다. 수많은 시선이 서서히 벌어지는 문틈으로 향했다. 개중엔 그곳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자들도 있었다.
마침내 열린 문으로 들어온 이는, 누가 봐도 아이사 맥포이였다. 건국제에서 일어난 ‘맥포이 가주 납치 사건’ 이후 처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보란 듯이 등장한 그녀를 향해 그들은 놀라움, 호기심, 약간의 실망이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세상에 정말 살아 있었잖아.’
‘그런 추문과 수모에 시달리고 있는데 기어코 나왔단 말인가?’
‘징글징글한 여자!’
가주들은 저마다 비슷한 생각을 하며 술렁거렸다. 오직 밀란 디아시와 북부의 노턴 가주만이 평정을 유지했다.
* * *
harbaragi_syk
‘꿀 먹은 벙어리들이 따로 없군. 아주 마음에 들어.’
밀란 디아시야 얼마 전 맥포이에 머물기까지 했으니 날 봐도 놀랄 것 없었다.
노턴 가주 또한 그간 긴밀히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아치 맥포이의 외삼촌이며 노턴은 롬닥의 주요 육로 중 하나이자 동대륙으로 이어지는 거점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요한 대회의장에 발을 내디뎠다. 맥포이를 험담하는 자들은, 결국엔 대부분 내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하는 자들이었다.
한 걸음씩 디딜 때마다 가문의 인장이 빼곡히 수놓아진 기다란 망토 자락이 휘날렸다. 은사로 만든 연꽃과 그것을 품은 태양이 넘실대는 모습은 꽤나 장관일 것이다.
저 오만한 늙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나를 향해 묵례를 해야 했다. 통쾌한 일이다.
그들과의 격차를 즐기던 나는, 내 맞은편 자리에 고고한 자태로 앉아 있는 밀란 디아시를 보고 잠시 움찔했다. 얼마 전 허접하게 그를 대접을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요하는 티를 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여느 때처럼 황제를 제외하면 가장 늦은 착석이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것 또한 기선 제압의 일종이었다. 오늘 같은 날엔 초장에 기를 누를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대회의니까!
“오랜만은 아니군.”
심드렁한 척 운을 띄우자 몇몇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내가 멀쩡한 게 신기한 듯이 여태 눈을 못 떼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 흥미로워 죽겠다는 얼굴들이 참 불쾌하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실컷 내 흉을 봤을 테니, 이쪽에서도 망언 하나 해 주는 게 이치에 맞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늙은 가주들의 혈압을 쭉 올려 줄 생각에 입매가 절로 올라갔다.
“이번에도 새 얼굴 하나 없고. 다들 참 오래들 사는군. 비법들이 뭔가?”
능청스런 목소리에 늙은이들의 고개가 전부 이쪽을 향했다. 그들은 앉자마자 도발을 하는 내게 얼굴을 붉혔지만 직접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하, 정색들 하기는. 다 아는 얼굴들이라 좋다는 말이었네.”
나는 사람 좋은 척 가식을 떨며 실눈으로 웃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한 늙은 가주 하나가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시종 아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맥포이 가주! 그게 무슨 망―!”
“황태자 저하께서 납시오! 모두 예를 갖추시오!”
목청 좋은 시종 아이 덕에 늙은 가주의 쇳소리가 묻혔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는 대놓고 끌끌 웃었다.
‘그나저나 황태자라니. 황제가 후계 굳히기에 나섰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이면서 내심 놀랐다. 황제가 벌써 황태자를 이런 큰 자리에 내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내가 알기로 아직까지 공식적인 정무에 나선 일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는…….
‘아직 밖에 내놓기엔 너무 멍청하지 않았나?’
황태자 빌리넌트 로덴시가 시종과 기사를 줄줄이 끼고 대회의장 안에 들어왔다.
모두가 허리를 깊게 숙인 채 바닥을 보았고, 빌리넌트는 가주들의 머리꼭지를 하나하나 구경하며 느릿한 걸음으로 가장 상석에 올랐다.
작은 태양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황태자가, 제게 대부분 조부모뻘인 가주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처음 황제 대리로 정무에 나섰으니 기 싸움은 당연한 수순이긴 했다. 그는 가주들에게 쉽게 고개를 들라고 하지 않았다. 정수리에 꽂히는 오만방자한 시선을 감지한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황태자 빌리넌트는 듣던 대로 한 싹퉁머리 한다는 것을.
‘로덴시 아니랄까 봐 일단 성질머리가 개같다는 건 확실하군. 뭐, 열일곱이면 특히나 말을 더럽게 안 들을 나이이기도 하지.’
과연, 성질머리는 죽은 황태녀 칼리페시를 닮았으나 머리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멍청하다는 소문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 되바라진 시선은 내 정수리에 유독 오래 꽂히는 것만 같았다.
“되었다, 공들은 고개를 들라.”
아하―. 허리를 들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 작은 주인은 맥포이를 경계한다.
‘약삭빠른 황제가 맥포이를 경계하라고 일러 주기라도 했나 보지.’
황제는 내게 많은 걸 받아 처먹었다. 그 대가로 내게 많은 걸 허락했으니, 맛있게 먹어 치울 땐 몰랐으나 돌이켜 보면 결과가 매우 탐탁지 않을 것이다.
황권을 생각하면 특정 귀족 가문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건 절대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황제를 빼닮아 덩치 하나는 좋은 소년에게 한번 져 주기로 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허리를 숙여 본 적 없는 안하무인 멍청이 앞에선 강약 조절이 필수였다.
눈을 내리깔고 다시 한번 황태자를 향해 기꺼이 고개를 숙여 주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호전적인 눈길을 거두었다. 상대방의 공손한 태도에 첫 기 싸움에서 이겼다 착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주 좋았다.
곧 빌리넌트 로덴시가 꽤나 엄숙한 목소리로 개정을 알렸다. 연습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빌리넌트가 생각보다 이르게 후계자로서 나선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아니, 사실 저 멍청한 노안의 소년은 딱히 중요치 않았다.
“통행세부터 시작하지.”
통행세. 롬닥의 성공 신화는 해로를 통한 해상 무역에서 시작되었지만, 동대륙과 이어지는 육로 또한 중요한 돈줄이었다.
고로 육로를 오갈 때 드는 통행세는 롬닥의 수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동시에 맥포이 가주의 건재함을 보여 줄 때였다.
후우.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후 2년간의 이득을 위해 가주들의 박 터지는 개싸움이 시작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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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시 경.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몇 번째 이어지는 간곡한 만류에 노마는 더 이상 대답을 생략하고 특유의 햇살 같은 미소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언뜻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한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에 성기사단장 콜린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같은 해에 성기사 서임을 받은 두 사람은 그나마 친분이 있었지만 절친하다고 할 순 없었다.
성기사단은 성력과 검기를 다루는 자라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입단할 수 있었다. 오로지 성력과 검기로만 질서가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콜린스는 평민 출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디아시 가문의 장남이라는 노마를 마냥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다.
아름답다 못해 성스러운 외관이 한몫을 하기도 했다. 그의 각별한 외관은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겼지만, 동시에 마치 성역처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다만 그렇다고 그와 허물없이 친했던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고, 콜린스가 알기로 노마는 ‘이고’라는 황실 기사와 두터운 우정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고는…….
콜린스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휘휘 저었다.
어쨌거나 콜린스는 노마를 가까이서 본 세월이 있었다. 그가 은근히 고집이 있고 단호한 사람이란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 미소를 짓고 있는 노마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콜린스는 12년 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노마를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서른 중반에 선 자신과, 아직도 스물 초반에 머물러 있는 그를 보자니 새삼 기묘했다.
처음 노마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다. 콜린스 역시 노마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그런 저주였다. 노마가 당한 저주는 육체와 영혼이 가루로 잘게 흩어져서 종국엔 영원히 사라지는 저주였단 말이다.
형은 죽은 게 아니라던 니콜라스 디아시의 말을 모두가 죄책감 때문에 하는 헛소리라 생각했다.
‘그가 정말 저주를 튕겨 냈고 제 형을 살렸던 모양이군.’
눈앞에 있는 그를 보고도 실은 아직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그 긴 세월 잠에 들었다 깨어난 노마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니 콜린스는 대뜸 자신을 찾아와 성기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도, 다 그가 아직 혼란스러운 탓일 것이라 넘겨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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