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55화 (55/139)

55.

순간 내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아치 쪽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황도에 급한 용무가 있어 직접 뵙지 못하고 떠나게 된 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이번 대회의에 참석하시는 걸로 압니다. 황도에서 꼭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끝이라고?

“다른 말은 없더냐?”

“다른 말?”

“뭐, 예를 들어 어제라던가.”

“어제? 어제 나 빼고 둘이 뭐 했어?”

아치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노마가 몇 번 놀아 줬다더니, 그와 노는 게 퍽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순수한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순간 별거 안 했다고 지껄일 뻔했다. 별거 안 했긴. 평생 비밀로 묻어야 할 흑역사였다. 나는 급한 대로 대충 핑계를 댔다.

“아니다. 그저, 어제 만찬 때 내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은 것이다.”

“이게 전부인데.”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선 한 마디 언급도 없이 가다니 찝찝했다. 무엇보다 이건 이거대로 은근히 서운하기까지 했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아참! 그리고.”

“뭐가 또 있어?”

“앙투아네트 말이야!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있지? 배웅하는데, 나와 안 떨어지려 하지 뭐야. 그래서 디아시 경이 앙투아네트를 잘 달래서 고모가 황도에 갈 때 데려다주래. 좋지?”

아치가 몹시 상기된 얼굴로 떠들었고, 내 얼굴은 미묘하게 구겨졌다.

좋기는. 그를 다시 마주칠 생각을 하니 암담하기만 했다. 그냥 어제 기어서 방에 들어갈걸, 애초에 테라스에 나가지 말걸 하는 후회나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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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 없습니다, 가주님.”

에리카가 소넷 크루거에 대한 내용이 적힌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북부 구석에 있는 펜사 가문의 코딱지만 한 영지 안에 들어가야만, 그 영지의 여인네들 사이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은밀한 정보였다.

크루거 부인 소넷의 결혼 전 성은 ‘펜사’로, 패트라 랑드라이가 귀족이었을 때 이름이 소샤 펜사였다.

“됐다. 시간을 더 들이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었어. 조금 빨라진 것뿐이지.”

에리카는 송구하다는 듯이 숙인 머리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도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과부가 된 후에 다시 펜사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쭉. 몰래 산파역을 한 모양이더군.”

소넷 크루거는 산파들이 하는 일을 했지만 정확히는 아이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임신 여부를 진단하고 유산을 돕는 역할만을 해 왔다. 당연히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죽고 필립의 아이를 가진 패트라가 자연스럽게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소넷이 처음 받은 아이가 바로 그 둘의 아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거참 역사적인 일이었다.

“아이를 받는 게 아니라, 유산을 돕는 일을 하다니. 돈이 필요했다고 해도 돈이 되는 일이 아닐뿐더러, 이런 불법적인 일은 귀부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 텐데요.”

제국은 전지전능한 성력에 너무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들이 있었으니,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발명이 부족했다.

즉, 피임법이 다양하지 않았으며 있다 해도 효과가 대단치 않았다. 와중에 추문을 극히 꺼리는 제국의 풍조상 사생아가 생기는 것을 막는답시고 산파를 통제했다.

효과가 떨어지는 피임법, 프라이버시 따위 없는 산파의 진료. 이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수많은 여자의 인생을 말아먹기도 했다. 그러니 무면허 산파 소넷은 어쩌면 펜사의 여자들에게 숨겨진 영웅, 의적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소넷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과부가 되었다. 크루거 가주가 말도 안 되게 나이가 많은 탓이었다. 그런 그와 그녀 사이에 난 딸이 하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펜사로 쫓겨나듯이 돌아간 것을 보면, 더 알아보지 않아도 남몰래 이런 일을 하게 된 사연이 그 딸과 관련이 있단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정심 혹은 남 일 같지만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뭐, 소넷이 왜 무면허 산파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상관없지요.”

“그래. 숨길 게 많은 사람이니 협박이 너무 쉽겠군.”

에리카의 무심한 말에 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즘 정보 출처가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불법 산파라니, 외지인이나 남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정보라 더더욱 알아내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저 모르는 새 정보원이라도 두셨습니까?”

“너 모르는 새 정보원이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가주님.”

두루뭉술한 내 대답에 에리카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물론 그녀는 항상 진지하긴 했다.

“말하라.”

“역시 며칠 전 말도 안 되게 눈이 부으셨던 것이, 제가 폴른 경과 교제한단 사실을 미리 말씀 드리지 않아서 그러신―.”

그날 폭풍처럼 운 것에 에리카의 지분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본인 입으로 들으니 매우 짜증 났다. 저 모르는 정보원을 들인 이유가 혹시 내가 토라져서 그러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쾅―.

닥치라는 의미로 가볍게 책상을 내려치자 에리카가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괘씸한 에리카.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 심술을 부리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나는 몇 초간 그녀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다가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마침 에리카의 등 너머로 조용히 들어오는 우아한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에리카를 골려 주기 딱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그나저나. 자네와 해리 폴른 경은 최소 5년은 만난 듯한데. 결혼은 안 할 건가?”

나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심드렁한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동시에 에리카의 등 뒤, 집무실 문가에 서서 다음 보고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정확히는 8년입니다. 결혼은 그때 잠시 말씀드렸다시피 가주님 먼저 가시면 하려다 보니.”

에리카는 이제 와 딱히 숨기지 않았다. 집무실엔 나와 에리카, 입 무거운 그녀의 비서 둘까지 총 네 명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와중에 8년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8년이면 해리가 성년이 되자마자 사귀었다는 말인데……. 이것 봐라. 나는 왼 눈썹을 까딱였다.

“이렇게 늦게 가실 줄은 저도 몰랐지요.”

“내 약혼자는 곧 골로 가야 해서. 난 틀린 거 같으니 그대 먼저 가라.”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에리카의 특성상, 바로 받아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일로 그녀가 조용했다.

“뭐야?”

“……영 틀리시진 않은 것 같은데, 뭐. 가주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에리카가 아리송하게 대답했으나 그녀를 골려 줄 생각에 캐묻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띠고 그녀의 등 너머를 봤다. 아직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에리카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일단 가주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한데 아무래도 연애가 편한지라, 저는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결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리카는 해리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연하의 미남과 평생 연애만 하고 싶다는 발언은 꽤나 선구적이었다. 그리고 시대를 앞서 나가는 이 발상은,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 시모어 부인이 싫어하는 종류였다.

“그렇다는군, 시모어 부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아까부터 집무실 한편에 서 있던 시모어 부인을 향해 물었다. 그렇게 묻는 내 목소리엔 간만에 즐거움이 한가득이었다.

동시에 등 뒤에 시모어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에리카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곧 그녀의 얼굴이 오랜만에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러시깁니까?’ 하는 원망 가득한 그녀의 얼굴과 마주치자 깔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시모어 부인더러 평소보다 일찍 오라 일렀거든.”

“…….”

“8년이면 해리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인가? 그런데 또 결혼 생각은 없다니……. 순진한 총각을 냉큼 데려갔으면 책임을 져야지, 나 원, 참. 시모어 부인은 알았나 몰라.”

“…….”

“보아하니 모녀 간의 대화가 필요해 보이는군. 시모어 부인은 나중에 보고해도 좋다. 내 특별히 자리를 피해 줄 테니 단란하게 이야기 나누게.”

그러곤 ‘너무 오래는 말고’ 하며 홀랑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내가 느낀 황망함과 배신감을 제대로 갚아 주었다는 생각에 절로 사악한 웃음이 이빨 사이로 흘렀다.

‘우습지. 오필리아가 찾아온 밤엔 인생이 아주 끝난 것처럼 우울했는데.’

노마 디아시를 붙잡고 울어 대던 것이 무색하게 또다시 나는 어찌저찌 살고 있었다. 시원하게 울어서 어느 정도 털어 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도 나도 어떻게든 살 것이다. 살아남았으니 살아야지.’

그러한 생각을 하며 집무실에서 한참 멀어지는데, 멀리서 오랜만에 듣는 시모어 부인의 사자후가 들려왔다. 부인의 강력한 포효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지긋지긋한 모퍽과 랑드라이를 끝내 버리자.’

그로부터 이틀 후, 맥포이 가주가 비밀리에 성을 떠났다. 황도 대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오랜만에 느긋하게 마차 여행을 한다는 명목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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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랑드라이 님이 이상해. 황도에 있는 모퍽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모퍽 소가주 필립의 공공연한 애인, 패트라 랑드라이는 저택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다. 집사부터 잡일꾼까지 모두에게 친절할 뿐만 아니라, 그녀 자체로 유명인에 사랑스러움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랑스러운 랑드라이 님’이 이상했다. 사소한 일로 사용인들을 직접 벌하기는 물론, 저택의 괴팍한 안주인처럼 굴더니 급기야 별거 아닌 사유로 오래된 하녀 하나를 자르기까지 했다.

랑드라이 님이 변했어. 사용인들이 수군댔다.

패트라 랑드라이는 불안했다. 초조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 언니인 소넷 크루거를 은밀히 황도에 불렀을 때만 해도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소넷은 고향인 펜사의 여인네들만 아는 ‘무면허 산파’였다. 더 정확히는 그녀는 아이를 받는 산파가 아니라, 떨어뜨리는 산파였다.

패트라는 소넷에게 진단을 받고 혹시나 정말 아이가 들어선 거라면 곧장 없던 일로 만들 생각이었다. 맥포이를 상대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넷을 만나기 직전, 맥포이 가주가 황도 한복판에서 납치당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 납치가 광신도들의 짓이라는 것에, 모두가 아이사 맥포이가 죽었다 했다. 보름 가까이 아무런 소식도 없었으니 다들 그렇게 믿었다.

패트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맥포이 가주의 일은 안타깝지만 제겐 다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패트라는 누구보다 독하고 철저했다. 일단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완벽하게 주변에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을 택했다.

연기는 그녀의 업이라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 귀족이, 모퍽 부인이 될 거라는 단꿈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 맥포이 가주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필립은 나만 조용히 모퍽 영지든 어디든 숨어 아이를 낳고 몰래 살면 되지 않겠냐 하겠지만, 누구 좋으라고.’

숨어 사는 장소만 바뀔 뿐 ‘패트라 랑드라이’의 인생이 끝나는 건 똑같았다. 이래도 끝, 저래도 끝.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는 인생인 것만 같은 기분에, 도박을 선택한 것은 그녀 나름대로 마지막 발악이었다.

의외로 모퍽을 협박해 그를 입맛대로 주무른 것까진 술술 일이 풀렸다. 그러나 그 기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맥포이의 돈을 먹은 신전은, 푼돈엔 털끝 하나 반응하지 않는 독한 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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