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노마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보낸 말린 테렛사가, 그녀의 침대맡 협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테렛사를 바라봤다. 홀린 듯이 협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의 입매가 막을 새도 없이 올라갔다. 웃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기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여기 두고 계셨을 줄은 몰랐다.’
은근히 주술적인 것을 잘 믿는 아이사가 단순히 행운을 바라고 협탁에 두고 있었던 것이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노마는 그저 감격했다.
열 오른 볼을 누르던 노마는 곧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잠든 아이사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물론 감히 닿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둑 뽀뽀는커녕 잠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대는 건 그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파렴치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노마는 기절한 듯이 잠든 그녀에게 그저 수줍은 목소리로 자그맣게 속삭였다.
“아이사 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힘들 때면 제가 당신 옆에서 그 짐을 덜어 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을 슬프게 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금방 만나요. 푹 주무세요.”
주문을 걸듯 귓속말을 마치고 퍼뜩 허리를 세웠다. 이젠 정말 가야겠다 싶었다.
‘그것부터 정리하고 돌아와야겠지.’
테렛사를 본 노마는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앙투아네트를 안은 그가 소리 없이 창밖으로 사라졌다.
* * *
harbaragi_syk
“으어……. 젠장, 내 눈…….”
눈이 제대로 부었는지 잘 떠지지가 않았다. 간만에 꽤 오랫동안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몽롱하기도 해서 나는 한동안 그렇게 가만 누워 있기만 했다.
“그래도 꿈도 안 꾸고 엄청 잘 잔 기분인데…….”
흐음. 뭘까……, 이 기억들은. 나는 잠꼬대하듯 나른하게 중얼대다가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둔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얼굴을 더듬어 봤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만져졌다. 얼굴을 더듬던 손을 내려 가슴팍, 복부를 짚었다. 여전히 연회용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밤에 찾아온 오필리아, 그 애가 준 쪽지.
쪼, 쪽지는 어디다 뒀더라? 뒤늦게 손바닥을 퍼뜩 펴 봤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에 의하면 분명, 쪽지를 쥔 채로 카펫에 주저앉아 있다가 갑갑함을 느끼고 테라스에 나갔다. 그리고…….
“뭐, 뭐야?”
어젯밤 기억에 있어선 안 될 것이 있었다. 나는 점차 창백하게 질려 갔다.
이건 꿈인가? 무조건 꿈이어야 해.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진짜지? 불행히 나는 어제 정신적으로 몰려 있긴 했으나, 맨정신이었다.
또 우는 모습을 보이다니! 노마 디아시에게 뭐라고 징징댄 거야? 쪽팔려! 하는 생각까지 미치자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아아악!”
“악! 뭐야!”
이불을 박차며 소리를 지르는데, 바로 옆에서 비슷한 비명이 터졌다.
“악!”
생각지 못한 타인의 소리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악을 썼다. 그래도 놀람이 가시지 않아 허락 없이 남의 침대에 엎드려 있던 불청객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 너!”
“아, 놀랐잖아! 왜 깨자마자 소리를 질러? 꿈꾸다 귀신이라도 봤어?”
“아치, 네 이 녀석! 아침부터 여기서 뭐 하냐! 누가 어른 방에 함부로 들어오랬냐!”
“아침은 무슨, 해가 중천인데.”
아치가 눈을 찡그리며 내 말을 받아쳤다.
“뭐야? 해가 중천이라―.”
그때 아치의 얼굴이 부은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발간 눈가와 제멋대로 부은 눈두덩이를 보아하니 누가 봐도 어젯밤 펑펑 운 몰골이었다. 심장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고모야말로, 얼굴이 그게 뭐야.”
음산하기 짝이 없는 내 질문에도 아치는 되레 내 몰골을 지적했다. 불어 터진 얼굴을 한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내 꼴이 더하면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 울었어? 울었구나.”
아치는 내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아이의 얼굴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니. 그럴 리가. 너야말로 울었나 본대. 누가 널 괴롭혔냐.”
“아니. 그럴 리가. 고모야말로 내가 어제 못된 말을 했다고 운 거야?”
울었냐 아니냐를 두고 고모와 조카의 신경전이 팽팽했다.
“……안 울었대도. 가주는 우는 거 아니다.”
“흡, 고모는 바보야……. 그 얼굴을 하고 뭘, 안 울었대!”
진실 공방은 길게 가지 못했다. 아치가 냅다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치의 눈물에 매우 약했다. 애가 울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치는 한 번 울면 워낙 서럽게 울어서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들기도 했다.
“고모. 어제 내가 고모한테 나쁜 말을 해서 운 거야?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아치가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통통한 볼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흐엉, 내가 잘못했어. 나는 고모뿐인데, 고모가 자꾸 위험하게 구니까. 너무 무섭단 말이야.”
“아가.”
“흥, 흑! 나는 고모밖에 없는데에. 나는 가족이 고모밖에 없는데―. 고모는 왜 자꾸 날 무섭게 하는 거야.”
아치는 그러면서 나는 진짜 무서워, 고모가 없으면 싫어, 고모밖에 없는데 왜 그래, 하며 세상 서럽게 오열했다.
‘아닌데, 요 녀석. 나 죽고 오필리아를 꽤나 잘 따르던데.’
그런 배배 꼬인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치가 울면서 드문드문 뱉는 말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눈물샘이 정말 고장이라도 난 듯했다.
“울지 말아라.”
아이와 마찬가지로 울상을 한 주제에 짐짓 엄한 목소리로 아치를 달래며 팔을 뻗었다. 엉엉 울던 아치가 냉큼 침대로 뛰어들어 내 품에 안겼다.
“고모가 잘못했다. 미안해.”
나는 아치를 꽉 안아 주며 말했다. 분명 내가 울 때 노마가 이렇게 해 줬던 것 같은데. 아치는 눈물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울지 말라니까.”
“힝, 고모. 나랑 평생 같이 살아야 해. 흐윽! 나 두고 죽으면, 죽으면 가만 안 둘 거야!”
평생 같이 살자는 조카의 말이 이렇게 감동스러울 건 또 뭔지. 퉁퉁 부은 두 눈에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모르겠다. 나도 늙었나 보지.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
사용인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라고 잔소리를 한 게 무색하게 나 역시 성이 떠나가라 울었다.
“흠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기 시절 부럽지 않게 한참 고모 허리에 매달려 운 아치는, 뒤늦게 민망하긴 한지 헛기침으로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필립 모퍽은 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잘 나가던 아치가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제 아프기까지 한 퉁퉁한 눈으로 아치를 내려다봤다.
‘이 얼굴만 밝히는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네가 필립을 마음에 안 들어 했던 이유는, 내 알기로 단순히 그놈이 제 눈에 못생겼기 때문일 텐데.’
아치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고모가 너무 아까웠어. 아니, 애초에 ‘맥포이 가주 부군’ 자리를 어떻게 그런 놈한테 줘.”
“맞는 말이다만, 나는 내게 견줄 놈 찾는 게 아니란다. 얘야.”
“아이참, 사람이 왜 이렇게 꽉 막혔어?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생각해 봐. 고모는 맥포이 가주라니까?”
아치가 매우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후계자는 내 조카인 너지. 널 입적하려면 내게 부군이 있어야 하고.”
제국법이 거지 같은 이유야 셀 수 없지만, 그중 가장 뭐 같은 조항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귀족이고 평민이고, 미혼은 양자를 들일 수 없었다.
물론 이 조항은 다양한 범죄에서 미성년인 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조카를 후계자로 밀고 있는 내 입장에선 가장 성가신 것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왜 굳이 날 양자 삼아야 해?”
“당연한 걸 묻는구나. 네 입지를 위해서지. 애초에 내가 가주가 된 과정도 그렇고, 맥포이는 꼴랑 너와 나뿐이니 정당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카보단 아들,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하지만 우린 ‘맥포이’잖아. 그리고 고모는 맥포이의 가주지. 맥포이 가주가 후계자라 칭한 것으로, 나는 이미 정당해.”
아치가 가슴을 넓게 펴며 말했다. 당당한 태도와 올곧은 목소리는 자존감 높은 어린이의 표본 같아 내심 뿌듯했다.
“나는, 나 때문에 고모가 같잖은 놈 아무나 골라다 대충 결혼하는 게 싫어.”
“…….”
“고모가 결혼해서 날 양자 삼지 않아도, 내가 더 똑똑해져서 믿을 만한 소가주가 되면 되잖아. 모두가 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대단한 사람이 될게. 나, 성력도 열심히 갈고닦고 있는걸.”
아치는 그러면서 응? 하며 내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모퍽 같은 놈들이랑 결혼할 거면 하지 마. 그런 놈들과 가계도로 엮이기 싫어.”
“……내 새끼.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하담.”
나는 보드라운 아치의 적금발을 손빗으로 슬슬 쓸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야 귀여운 투정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울다가 웃으면 뭐가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고모 닮았지.”
아치는 그렇게 말하고 부끄러웠는지 내 허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린이는 어린이였다. 귓바퀴가 조금 붉어진 게 귀여워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아! 웃지 마!”
“그래.”
간만에 예쁜 짓을 하는 아치를 보고 있자니 끔찍했던 어제가 한참 전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때 얌전히 예쁨을 만끽하던 아치가 대뜸 말했다.
“아참, 내가 손님도 배웅했어.”
“……배웅?”
맙소사. 눈 뜨자마자 아치를 발견하는 바람에 완전히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치는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이겠지만 나는 다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 지금 몇 시지?”
“응? 정오가 지났어. 난 처음엔 고모가 쓰러진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옆에 붙어 있었던 거 아냐. 얀이 그냥 자는 거래서, 악!”
얀? 내가 주치의까지 왔다 간 것도 모르고 잤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노마 디아시가 내게 수면제라도 먹였나?
나는 대경해서 아치를 밀고 허겁지겁 침대에서 기어 나갔다.
“아야!”
“맙소사 디아시는. 밀란 디아시 공……!”
“이미 한참 전에 갔지, 뭘.”
내게 밀쳐진 아치가 인상을 쓰고 대꾸했다. 안 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걱정 마. 이 아치 맥포이가 손님 배웅 하나 못할까 봐? 소가주로서 제대로 배웅했으니 걱정 말어. 아, 그리고 디아시 경이―.”
당장 에리카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치가 덧붙인 말이 나를 붙잡았다.
“노마, 디아시?”
“응. 디아시 경이 고모한테 말을 전해 달랬어. 귀 좀 줘 봐.”
“그……. 귓속말로 해야 하는 거냐?”
“고모한테만 ‘몰래’ 전해 달라 했거든.”
아치는 굉장한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은밀한 척했다. 어쩐지 들떠 보이는 건 착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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